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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료 (박재영, 청년의사, 2013.)

Dog君 2021. 5. 19. 16:00

 

  2011년 말 기준으로 전국에 분만 병원이 없는 시군구는 48곳으로, 전국의 229개 시군구 중에서 21%에 이른다. 신생아 10만 명 출생당 산모사망 수를 의미하는 모성 사망률의 경우, 전국 평균이 14명이고 서울은 10.8명인데, 강원도는 34.6명이고 충북은 27.6명이다. 모성 사망률이 높은 곳은 대부분 분만 취약지와 일치한다. 분만 취약지의 모성 사망률은 1970년대 전국 평균치와 비슷하다. 이는 임산부 관리 수준이 40년 후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쪽.)

 

  한국의료의 더욱 큰 장점은, 이처럼 양호한 국민 건강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의료비를 매우 적게 지출하고 있다는 데 있다. (...)
  의료비를 적게 쓴다고 해서 국민들의 의료 이용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
  진료나 수술을 받기 위해 장시간 기다려야 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의료는 여러 가지 약점 또한 함께 갖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점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다는 데 있다. (...)
(...) 우리 건강보험이 중증질환보다 경증질환에 대한 보장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
  의사를 쉽게 자주 만날 수 있는 대신 한 번 만날 때는 3분에 만족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
의사들은 교과서적 진료만 해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다면서 비급여 시술에 열을 올리고 의약품 리베이트의 유혹에 넘어간다. (...) (25~28쪽.)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의사라는 직종의 존재 자체가 매우 독특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현대의학이 발달하기 전에 문화권별로 다양하게 존재했던 전통의학이나 민간요법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몇몇 전통의학이나 치료법들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인정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일부 보완한다고 해서 보완대체의학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CAM으로 불리면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있고, 정립된 교육 과정과 공인된 자격 체계까지 갖춘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한국의 한의학과 같이 높은 위상을 가진 것은 전혀 없다. (...)
  이유는 간단하다. 물리학이 하나이고 화학이 하나이고 수학이 하나인 것처럼, 의학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인류가 밝히고 축적해 온 모든 지식의 총체가 하나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 바로 과학이다. 물론 의학은 과학의 일부다. (...) 의학은 명백히 응용과학의 한 분야댜. 당연히 세계의 모든 의사들은 같은 패러다임을 공유한다. (77~78쪽.)

 

  한국의료는 사실 처음부터 대충 지은 건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좋은 건물을 지을 줄 몰랐다기보다는 건축 자재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었 다. 급한 대로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수준의 가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비가 새는 곳만 때우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넘어갔다. (...) (206쪽.)

 

(...) 앞으로 의료의 기본 패러다임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 나는, 향후 도래할 의료서비스 시장의 큰 변화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예측과 희망사항이 섞여 있는 목록이지만, 일부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
  넷째, 단순한 치료를 넘어 '돌봄'을 중시해야 한다. 현대의 의료체계에서 가장 부족한 것 중의 하나는 '돌봄'이다. 현대의학은 오랫동안 생물학적 질병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에게 제시되는 선택지는 '최대한의 치료'와 '퇴원'의 두 가지였을 뿐, 환자가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죽음을 준비하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의사도 정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의사들은 흔히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해 줄 수 있는, 해 줘야 하는 일들은 매우 많다. (...)
  다섯째,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 종사자들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처럼 의료의 패러다임이 달라질 경우, 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 역시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
  여섯째, 의료소비자의 권리와 책임이 동시에 증대돼야 한다. 과거의 보건의료는 전적으로 전문가에게 의존하고 위임하는 방식이었다. 환자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고, 환자에게 주어진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 로는 의료소비자에게 충분히 많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훨씬 넓은 범위의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 (...) 동시에 의료소비자들의 책임도 늘어나냐 한다.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고 의료 이용을 합리적으로 해야 하는 개인적 책임도 커져야 하고, 합리적인 의료제도를 만들고 적절한 비용을 공동으 로 부담하는 사회적 책임도 커져야 한다. (...) (256~259쪽.)

 

  의사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소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환자가 반드시 의료기관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 (301쪽.)

 

(...) 의료 분야에서 의사 개인의 지적 능력이나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낮아진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이나 정보를 더 이상 독점할 수도 없다. (...) 의사가 하던 역할 중에서 상당 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첨단 장비에 의해 대체된다. 의사가 하던 역할 중에서 일부는 보건의료 분야의 다른 직종에게로 옮겨간다. 불완전한 의학의 권위를 부여잡고 있는 의사보다는 환자와 진정으로 공감하고 소통할 줄 아는 의사가 더 필요해진다. (331쪽.)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진실 말하기disclosure'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의외로 간단하다. 환자에게 나쁜 결과가 발생했을 때 병원 측이 우선 유감과 공감의 뜻을 표하고,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철저히 조사해 완전히 공개하겠다고 밝히고, 조사 결과 의료진의 과실이 드러날 경우 적절한 보상을 할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 세 가지 핵심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은 1987년에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에 있는 보훈병원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렉싱턴 보훈병원은 두 건의 의료소송에서 패소하여 150만 달러 이상을 배상한 이후, (...) '공개, 사과, 보상'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
  약 10년간의 '실험'이 진행된 이후 (...) 렉싱턴 보훈병원은 인근에 있는 36개 보훈병원들 중에서 '배상 신청claim'의 건수는 5위에 해당했지만, 총 배상액은 29위에 불과했다. 평균 배상액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 많은 병원들은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의 도입을 망설였다. 여러 가지 우려 때문이었다. (...) 가장 중요한 우려는, 사고 발생 직후에 행한 사과가 나중에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병원 측의 과실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단지 '잘못을 인정했었다'는 것 때문에 배상 책임을 져야 하 는 상황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 2005년 당시 미국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와 뉴욕 주 상원의원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흔히 메딕MEDIC 법안으로 불리는 '전미 의료 과실 공개 및 배상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에는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이 환자나 가족에 대하여 행한 어떠한 형태의 사과나 후회의 표현도 법적 책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내용과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의 확산을 위한 재정 지원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메딕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 핵심 내용 중 하나였던 '사과 면책 법안'이 여러 주에서 잇따라 제정됨에 따라,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에 의한 모든 언급은 추후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게 됐다. (...) 의사들은 '뒤탈'을 걱정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유감 표명을 할 수 있게 됐고, 환자나 그 가족들은 분노에 휩싸이지 않고 차분히 진실 규명 및 사후 처리에 임할 수 있게 됐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도 상대 병원이 이 프로그램을 도입한 병원일 경우, 병원 측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고 불 필요한 소송을 자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윈-윈' 현상이 나타 난 것이다.
(...)
  국내의 연구에서도 이런 사실은 확인된 바 있다. 의료사고를 경험한 가족들을 대상으로 의료소송을 제기한 원인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의료소송을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유는 향후 사고방지와 의사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었다. 책임추궁이나 보상은 그 다음이었던 것이다. (337~343쪽.)

 

  의료소비자들에게 맡겨진 몫도 있다. 병원에 대한 불신이나 불만 중에서 적지 않은 부분은 개별 의료기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의료서비스 자체의 특성이나 우리 의료 시스템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의료 공급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의료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 있는 시민의 역할이다. 시민들의 적절한 비용 분담과 합리적인 의료 이용 습관 없이는 우리 의료 시스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똑똑한 의료소비자'가 많아질수록, 의료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이해 수준이 높아질수록 의료 개혁의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413쪽.)

 

교정.

84쪽 5줄 : 된다 -> 각주 54번이 본문 글자와 겹쳐 있다.

327쪽 9줄 : 고장 난 기계와 -> 고장난 기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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