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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冊나부랭이

1919 (박찬승, 다산초당, 2019.)

Dog君 2021. 5. 19. 21:58

 

(...) 태형은 신체에 형벌을 가하는 야만적인 제도로, 갑오개혁 이후에도 미처 폐지되지 않았는데, 총독부가 일본에서는 이미 폐지된 이 제도를 한국에서는 법령으로 공식 채택한 것이다. 일제는 그 이유로 '민도의 차이'를 내세웠다. 감옥 시설의 미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핞편으로 공포심과 수치심을 유발시켜 범죄 감소 효과를 거두려 한 것이지만, 이른바 '조선인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차별과 멸시가 짙게 깔린 지독한 악법이었다.
(...) 태형은 한국인에게 수치감과 모욕감,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는 3·1운동 당시 각 지역 주민들이 헌병과 순사 주재소를 습격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일본인의 토지 집적과 농장 개설은, 곧 한국 농민의 토지 상실과 소작농으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농지를 잃은 농민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떠돌게 된다. (...)
  또한 일본은 조선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일찍이 통감부 시기부터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 상인을 몰락시키고, 일본 자본이 보다 원활하게 한국에 진출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그동안 주로 개항장에 머무르던 일본 상인들이 내륙 철도의 주요 결절점이 되는 도시와 전통 도시에 진출해 곧바로 상권을 장악한다. (...)
  공업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 (38~39쪽.)

 

  1910년대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 지배의 기본 방침을 '차별적 동화주의'로 정한다. 그래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을 통해 민족 교육을 말살하고 한국인을 우민화, 일본인화하려 한 것이다. (...)
  1911년 8월 공포된 조선교육령은 이러한 식민지 교육 정책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교육령은 교육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교육은 천황의 명에 기초해 충성스럽고 선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 1914년 1,068개였던 사립학교의 수는 1919년 749개로 격감한다. 1919년 한국인 학령 아동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3.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학제도 차별적으로 운영해 보통학교 4년제, 고등보통학교 4년제였는데, 이는 이론의 소학교 6년제, 중학교 5년제와 큰 차이가 있었다. (...)
  보통학교에서는 일본어 학습이 중시되어, 주 총 수업시간 26시간 가운데 무려 10시간이 일본어 수업 시간이었다.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의 교사도 일본인 교사를 대거 초빙했으며, 교장은 전원 일본인으로만 임명했다. 또 일본인 교사는 한국인 교사보다 곱절의 봉급을 받았다.
  한국인의 중등 및 고등 교육 진학도 크게 제한됐다. (...) (39~40쪽.)

 

(...) 또한 『오사카아사히신문』은 당시 국내에서 상당한 부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최린(崔麟),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은 훗날 재판 과정에서 이런 기사를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밝힌다. (51쪽.)

 

  거사일은 2월 8일로 잡혔다. 위원들은 이날 유학생 학우회의 임원 선거를 위한 총회를 연다고 공지했다. 이날 오전 1시 무렵 위원들은 시내 여러 곳에서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사 및 공사, 내각의 각 대신, 귀족원과 중의원 의원, 조선총독부, 각 신문 및 잡지사, 그리고 여러 학자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오후 3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초오히가 열렸다. 윤창석의 사회로 회의가 시작되자 백관수는 단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이천만 민족을 대표해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한다!" (76~77쪽.)

 

  최린은 자서전에서 "운동의 방식은 일정한 처소에 회집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 만세를 높이 부르는데, 폭력적인 행동은 일절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최초에 결심한 3원칙을 따른 것으로서, 천도교의 제2세 교조 최해월(崔海月) 선생의 신원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의암성사(손병희)의 뜻에 의한 것이며, 또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간디의 전술과도 흡사해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있어서는 참으로 묘미가 있는 신규의 방략이라고 할 수가 있다"라고 회고했다. 민족대표의 만세운동 역시 이처럼 인도의 간디에게 영향을 받은 비폭력 무저항주의 운동의 새로운 방략으로 채택된 것이다. (203쪽.)

 

(...) 세브란스의전 학생 1명이 앞장서고 200여 명의 군중이 그의 뒤를 따라 경찰 및 이왕직(일제강점기 옛 대한제국 황실의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의 보병대와 육박전을 벌인 끝에 안으로 돌입했다. 그런데 덕수궁에 들어간 그들은 그곳의 너무나 호화로운 별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왕세자 이은을 면회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왕직 쪽에서 눈물로 물러가주기를 간청해 덕수궁에서 물러났다. 같은 땅 위에서 똑같이 망국을 맞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처지였지만, 이왕가와 일반 민중이 처한 삶과 입장은 이렇게 달랐다. (207쪽.)

 

  당시 베이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국외 독립운동가의 공화주의에 대한 지향은 확고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1운동 이후 새로운 나라는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데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은 대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됐고, 1년 뒤인 1918년 11월에는 전쟁에서 패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바이마르공화국이 수립된다. 이러한 사건들 역시 한국인들에게 제정의 시대는 가고 공화정의 시대가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 (334~335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한국사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군주나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제국'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권이 있는 '민국'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1919년 3월의 함성은 역사의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봄날의 함성을 앞으로도 잊지 않고 계속 되새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52~353쪽.)

 

교정.

178쪽 2줄 : 600장를 -> 600장을

178쪽 12줄 : 1,500장를 -> 1,500장을

236쪽 3줄 : 금양장 -> 김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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