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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김혼비, 제철소,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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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김혼비, 제철소, 2019.)

Dog君 2021. 5. 19. 21:56

 

  나도 원이처럼 술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화상실에서 보낸 포스트모던한 밤은 끔찍했고,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기억이 툭툭 끊기는 경험도 끔찍했고, 다음 날의 숙취, 숙취로 인한 두통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고 혼자 조용히 이를 갈았다. (...)
  하지만 나는 술꾼의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2주 정도 지나자 입가에 맴돌던 술맛과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엷은 흥분, 들떠서 떠들던 분위기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술 생각이 났다. (...) (29~30쪽.)

 

  비슷한 맥락에서 만취해 돌아오는 길에 내일 해장할 생각으로 라면을 샀고, 후후, 이렇게 취했어도 내일을 준비하다니, 나는 정말 프로 술꾼!이라는 우쭐함과 함께 잠들었는데, 다음 날 끓이려고 꺼내보니 라면 과자인 '뿌셔뿌셔'였다는 걸 깨닫고 황망했다면? 물론 '뿌셔뿌셔'를 끓여 먹는 사람도 있긴 하다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건 미술을 좋아하고 탁월한 재능마저 있는 자식에게 법대를 강요하는 부모 같은 일이다. 뿌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는데 왜 굳이 끓인단 말인가. (...) (43쪽.)

 

  그날 이후 몇 달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쩐지 나는 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과 그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 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 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살아가려면. (61~62쪽.)

 

  그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셔서가 아니라 자주 마셔서 술꾼인 부류라 주량은 그리 세지 않은데, 그날은 희한했다. 둘이서 1차에서 소주 네 병을 마셨고 2차에서 맥주 세 병을 마셨는데도 말짱했다. 심지어 가게가 파해서 2차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술이 더 마시고 싶었다. 그날따라 간이 센 안주들을 계속 먹어서 간이 세진 것일까? (75쪽.)

 

  대학 때 어느 선배가 자신이 연출하는 단편영화의 한 신에 잠깐 출연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 당시에는 상황만 던져주고 즉흥연기를 시키는 것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린다고 굳게 믿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영화판 곳곳에 홍상수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드리워져 있던 시절이었다…. (110쪽.)

 

  한참 욕을 하다 보니 조금 후련해지면서도 더 슬퍼졌다. 씨발이 욕이 아니라 눈물 같았다. 목 놓아 울고 싶은 유의 슬픔이라기보다 뭔가 매우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 훼손된 것 같은 슬픔이었다. 갑자기 P가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 P와 욕 레슨을 주고받으며 청하를 마셨던 술집이 떠올랐다. P가 욕 레슨을 주고받으며 청하를 마셨던 술집이 떠올랐다. P가 쓸쓸하게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한국에 있어봤자 고생할 일만 널린 게 지긋지긋하다고 지긋지긋하게 고생해서 번 돈으로 캐나다로 넘어가 호텔에 취직한 P에게 당장 전화를 걸고 싶었다. 나의 완성된 욕을, 눈물을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일자리가 날아갔는데 비싼 국제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어우, 야, 네 말이 맞다. 다 맞다. 진짜. (119쪽.)

 

  결국 기질 차이인 것 같다. 술이 얹어진 말들을 싫어하는 기질과 술이라도 얹어져 세상 밖으로 나온 말들을 좋아하는 기질. 나는 항상 술을 마시고 꺼내놓았던 말들보다 술 없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을 훨씬 후회스러워하는 쪽이었다(그건 내가 원체 꺼내놓는 걸 잘 못 하는 사람이라 그렇기도 할 것이다).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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