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김중혁, 자이언트북스,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김중혁, 자이언트북스, 2021.)

Dog君 2022. 3. 3. 20:54

 

  김중혁의 글에는 엉뚱한 상상력이 가득해서 그의 글을 읽으면 글 읽는 나도 덩달아 공상을 하게 된다. 특히 그게 나도 언젠가 한번쯤 해봤던 공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에어태그 광고도 재미있다. 한 남자가 외출 전에 열쇠를 찾고 있다. 어디에도 없다. 다행히 에어태그를 부착해 두었다. 에어태그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소파 사이로 들어간 남자는 '분실문들이 모여 사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고양이, 수많은 동전, 땅콩 껍질, 아이팟, 리모컨 등이 모여 살고 있다. 아마 그곳에 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인, 흑연을 좋아하는 괴물도 살고 있을 것이다. (17쪽.)

 

  '음원 깡패'라고 하면 음원 순위를 조작하기 위해 동원된 조직폭력배가 떠오르고, '착한 가격'이라고 하면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숫자들이 떠오른다. 정확하지 않은 은유는 잘못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21쪽.)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매일 그렇게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호의 가득한 제안을 받아도 '저의'를 먼저 의심해야 하고, 다른 꿍꿍이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삶은 얼마나 팍팍한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할 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듯 누군가 나에게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
  한 달에 하루쯤, 아니 그게 힘들면 일 년에 하루쯤 바보 멍청이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믿지 못할 만큼 잔혹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울 가득한 탄식을 하는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대신,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바보처럼 뭔가 베풀려고 노력하고, 시장에서는 "밑지고 파는 거예요."라는 상인의 말을 그대로 믿어 보자.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114~115쪽.)

 

  내가 아는 긍정 캐릭터 중에 가장 매력적인 '빨간 머리 앤'은 인생의 쓰디쓴 맛을 다 경험했는데도 그토록 밝을 수 있다는게 경이롭다. 앤이 마릴라 아주머니와 나누는 대화 중에서 '실수'에 대한 게 있다.
  "마릴라 아주머니, 내일은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날이라고 생각하니 기쁘지 않으세요?"
  해맑은 빨간 머리 앤이 말했다.
  "넌 분명히 내일도 실수를 많이 저지를 거야. 너 같은 실수투성이는 본 적이 없으니까, 앤."
  역시 비관적인 마릴라 아주머니.
  "맞아요.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는 거 아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절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요."
  "그 대신 날마다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데, 뭐가 좋은 점이라는 거냐?"
  실수도 창의적으로 하는 빨간 머리 앤.
  "어머,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다고요. 제가 그 한계까지 간다면 더 이상 실수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놓여요."
  세상에, 이런 통찰이라니......, 그렇다. 분명 우리에겐 실수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 하나의 실수를 하더라도 기죽지 말자. 대신 오늘 했던 실수를 종이에 꼼꼼하게 적어 보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129~130쪽.)

 

  짤막한 글들을 모은 책이라 글의 호흡이 짧고 여백도 많아서 책장은 금방 넘어간다. 출근 버스 안에서 거의 다 읽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김중혁은 어떻게 이렇게 다종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하는걸까. 소설가니까 당연히 소설은 쓸텐데, 그 외에 책을 찢어서 벽 장식도 하고(38~39쪽.), 산책하며 길가의 식물도 찾아보고(41~43쪽.), 매일 1초씩 영상도 찍고(50~52쪽.), 녹음도 하고(53~54쪽.) 가만히 누워도 있고(64쪽.), 음악도 듣고(82~83쪽.), 앱도 찾아보고(104~106쪽.), 오늘 하루도 복기하고(128~130쪽.), 라디오도 듣고(133~135쪽.), 인터넷 쇼핑몰도 들어가고(136~138쪽.) 뭐 암튼 되게 많이 한다. 아니 이 많은 일들을 한 명의 인간이 해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여행을 삶에 비유해 보자. 여행지에서는 완벽한 준비보다 위기에 대처할 융통성이 훨씬 중요한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서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만히 서 있을 때 내비게이션은 방향을 알려 주지 못한다. 내가 출발해야만 GPS가 내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게 되고, 그제야 어디로 갈지 알려 준다. 삶도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일은 일단 저지르고 나면 수습할 기회가 생기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방향도 생기지 않는다. (30~31쪽.)

 

  누워서 5분 동안 가만히 있어 보자. 이런 저런 생각이 날 것이다. 이런 생각도 쫓아가고, 저런 생각도 쫓아가다 보면 5분이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5분 동안 더 누워 있어 보자. 생각이 조금씩 잦아들고 졸음이 밀려올 것이다. 눈을 뜨고 어떤 사물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 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좋다. 10분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20분 동안 누워 있어 보고, 잠이 오면 잠이 드는 걸 막지 말고, 깨고 싶을 때 깨고, 더 자고 싶으면 자고, 그러다 보면 문득 행복하다는 감각이 온몸에 가득 들어찰 것이다. (64쪽.)

 

  내 가방 안에는 늘 물건이 많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꼭 챙겨야 할 물건들이 있다. 손톱이 길어서 신경 쓰일지도 모르니까 손톱깎이, 갑자기 시간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책도 한 권, 글이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아이패드, 놓칠 수 없는 풍경을 만날지도 모르니 카메라, 이렇게 하나씩 챙기다 보면 가벼운 외출에도 짐이 한가득이다.
  막상 나가면 쓰는 일이 거의 없다. 비상시를 위한 물건들을 쓰지 않았다는 건 비상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니 기뻐할 만하다고 위로해야 할까. 뜻밖의 영감을 얻은 순간이 없었으니 슬퍼해야 할까. (205쪽.)

 

교정. 초판 1쇄
24쪽 밑에서 3줄 : "나는 계절의 귀를 통해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문맥상 이야기를 듣는 건 '계절의 귀'가 아니라 '계절의 입' 같은데...)
32쪽 밑에서 1줄 : 내기를1 좋아하는 -> 내기를 좋아하는 (그런데 김중혁 글이라면 이것도 오타가 아닐 수 있다 싶은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