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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길윤형, 서해문집, 2020.)

Dog君 2022. 3. 3. 20:42

 

  한국은 언제나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전근대의 한국을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이 어쩌고 경합이 저쩌고 하는 이들이 많고(근데 이건 임진왜란 이래로 일본 쪽에서 계속 써오던 수사 아닌감?), 근대 이후에도 열강끼리의 각축전을 빼고 한국을 말하기가 어렵다. 오로지 주구장창 그것만 갖고 말하니 이제는 좀 지겨운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머 우짜겠노. 우리가 후진 동네에서 태어난걸.

 

  근데 진짜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공백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9일(인천 입항은 9월 8일)까지의 26일 동안이다. 이 책은 그 26일 간의 분주했던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총독부 치안 당국자 앞에서 '일본의 패배'라는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았으니, 당장 그 자리에서 험한 꼴을 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카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분노가 아닌 침통의 기색"으로 안재홍의 얘기를 들은 뒤, 어느정도 수긍한 듯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다. 총독부 입장에서도 안재홍의 이 발언은 주목할만한 내용이었다. 일제에 의해 무려 9차례나 옥고를 치른 안재홍이라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입에서 해방이 되면 일본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겠다는 말 대신 '유혈방지'와 '병존호영(서로 의존하며 함께 잘 살자는 의미)' 같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41쪽.)

 

  이 책이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정치드라마처럼 느껴지는 것은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 설정을 기가 막히게 잘 했기 때문이다. 몽양 여운형은 디테일은 약간 부족할지언정 탁월한 카리스마와 행동력으로 통합을 주도한 행동주의자였고, 민세 안재홍은 리더십이 넘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묵묵하게 좌우통합을 지지한 온건한 덕망가였으며, 고하 송진우는 명분은 있으되 지나치게 신중한 탓에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란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매개로 세 개의 이질적인 그룹이 뭉친 '느슨한 연합체'였다. 첫째는 이만규·최근우·이여성·이상백 등 여운형의 오랜 측근 그룹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어느 길을 택하든지 끝까지 따를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정백을 비롯한 옛 서울파와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여운형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합류해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이들과는 이념적 색깔을 달리하는 안재홍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홍은 당시 건준 구성을 "공산당원인 극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의 우익, 무조건 형님을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고 적었다. (226쪽.)

 

  송진우는 일제가 항복한다고 조급히 나서 경거망동하기보다 역사의 순리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나름 일리 있는 판단이었지만,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는 격동의 상황에서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대응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는 '결정적인 선'을 지키며 일본 정계 인사나 총독부 당국과 아슬아슬한 시국담을 마다하지 않던 여운형과는 '화해할 수 없는' 인식의 격차였다. (86쪽.)

 

  이상의 캐릭터 설정에서 대략 느껴지겠지만, 이 책에서 굳이 빌런을 한 사람만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송진우다. 식민지시기를 거치며 여러 이념에 따라 진영이 나뉜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해방 이후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을 수 있는 공간을 사실상 보이콧한 송진우에 대해, 이 책은 은근한 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참여를 논할 때에도 건준이 수용할 수 없는 친일 경력 우익인사들의 명단을 들이밀며 사실상 파토를 놓는데 열중했다.

 

  물론 빌런을 둘 이상 꼽을 수 있다면 좌익도 빌런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도 자기와 다른 이념을 가진 이들과 타협하고 공존하며 조율하기보다는 상대를 헐뜯으며 자기 비중을 늘리는데 골몰했다.

 

  해방 당일 계동에 다양한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좌익세가 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모인 이들의 실력이었다. 정백·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투쟁 경험을 가진 "너무나 날카로운 정예분자들"이었다. (...) 그에 비해 이만규·이여성·이상백·양재하·최근우 등 여운형의 측근들은 정치나 정치조직에 대해 뚜렷한 주관이나 경험이 없는 신사들이었다. 결국 건준의 주도권은 여운형의 측근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건국동맹이 아닌 단단한 철의 조직력으로 뭉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서서히 넘어가게 된다.
  (...)
  건준은 이후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편향은 이후 안재홍-이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좌우합작 움직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좌우합작이 실패한 뒤 안재홍이 건준을 떠나자 남은 좌익들은 해방 정국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통해 좌우대립을 돌이킬 수 없는 증오와 상호불신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게 된다. (147~148쪽.)

 

  미군 진주로 우익은 더이상 좌익이 득세한 건준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기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 동지가 아니게 된 정치세력은 적일뿐이었다. 좌우합작을 포기한 우익들은 이후 여운형과 건준을 향해 비열하다 싶을 만큼 가혹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267쪽.)

 

  저자의 여운형의 그것에 가장 가깝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한국인들이 하나의 조직을 구성해서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 조직으로 준비되었던 것이 건준이라는 거고.

 

  만약 좌우 인사가 망라된 건준 확대위원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면, 해방 직후 조선의 좌우합작과 정치통합은 진통 끝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해외에 머무르고 있던 김구와 이승만 등도 귀국 뒤 건준의 틀을 인정하고 이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남한 내 극심한 좌우대립과 상호 증오는 피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대표성을 확보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 인민들의 일치된 의사를 미군정에 전달했다면, 한반도의 분단 또한 막을 있지 않았을까. (284쪽.)

 

  물론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하나의 조직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움직이는 건 당위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한국의 좌우파가 지들끼리는 지지고 볶으면서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14,000,605의 1 정도의 실낱같은 가능성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그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주려고 애썼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26일 간의 정치드라마에는 분명 인간의 의지와 우연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어떻게든 송진우를 설득했더라면, 아니면 송진우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적극성을 발휘했다면, 경성에 왔던 OSS 요원들이 좀 더 경성에 머무르며 임시정부의 정치적 교두보 역할을 했더라면, 하는 등등의 가정을 자꾸 하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고들 하지만, 자꾸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목표는 그 26일 후에 미군정이 건준을 배척하고 친일파가 득세한 것이 필연의 결과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꼭 그러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의 현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교정. 초판 2쇄
각주 4줄 : 《도메이 통신》으로부터 -> 《도메이통신》으로부터
86쪽 8줄 : 송진주의 -> 송진우의
151쪽 9줄 : 열정적이 -> 열정적인
225쪽 3줄 : 휘김기어 -> 휘감기어
242쪽 첫번째 문단 : 이 문단은 건국준비위원회 확대위원회가 62명에서 135명으로 늘어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의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숫자가 62명에서 135명으로 늘어나서 독자로서는 다소 혼란스럽다. 물론 곧이어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독자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판이 바뀔 때 242~244쪽의 서술을 수정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245쪽 밑에서 4줄 : (안재홍과) 좌익계와 의견이 -> (안재홍이) 좌익계와 의견이 : '안재홍' 뒤에는 주격조사가 붙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261쪽 10줄 : 데이비드 러스크David Rusk
262쪽 사진캡션 : 데이비드 러스크 : 딘 러스크Dean Rusk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풀네임이 데이비드 딘 러스크David Dean Rusk이기 때문에 이 표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서술에서 딘 러스크라는 이름을 더 많이 썼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터넷에도 딘 러스크라는 항목으로 정리된 경우가 더 많으며, 당대의 사료에 딘 러스크로 더 많이 표기된 것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러스크라고 검색하면 그의 아들이자 알버커키 시장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 데이비드 패트릭 러스크David Patrick Rusk가 더 많이 나온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명 표기를 수정하거나 설명을 붙이는게 좋을 것 같다.
306쪽 13줄 : 전달을 -> 전단을
404쪽 9줄 : 알류산 열도에서 -> 알류샨 열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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