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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디플롯,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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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디플롯, 2022.)

Dog君 2022. 1. 26. 10:23

 

1-1. 한 때 진화론에 꽂혀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은 적이 있다. 특히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의 책(『풀하우스』와 『여덟마리 새끼돼지』)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 덕에 2019년에 장대익 번역으로 나온 『종의 기원』 초판 완역본을 영국에서 주문하고 어쩌고 하는 생난리를 치고 그랬지.

 

Stephen Jay Gould, 1941~2002

 

1-2. 본 투 비 문과인 내가 진화론에 그토록 꽂혔던 것은 진화론이 사회과학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노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말이다. 물론 엄밀히 따져서 다윈의 진화론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른 기원을 가진 별개의 논의였지만 어쨌거나 그게 19세기 어느 시점에 서로 만나서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일으켰고 그 후과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The white man's burden


1-3. 그래서 문과는 문과대로, 이과는 이과대로 진화론의 본령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들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졌는데, 어쩌면 이 책도 그런 맥락 위에서 나온 대중서가 아닌가 싶으다.

 

2-1.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별달리 대단하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진화라는 것을, 가장 잘 적응한 놈이 살아남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리 혹은 냉엄한 경쟁의 세계로 이해하지만 막상 그 내용을 따져보면 실제 진화의 내용은 경쟁보다는 협력의 측면이 더 강하고 적자the fittest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도 개체 간의 협력과 공감을 강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개념 역시 다정한 자의 생존survival of the friendliest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한 것은 초강력 인지능력이었는데,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인 친화력이다. (...) (29쪽.)

 

  빙하시대에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늑대를 가축화했다고 가정하면 비현실적인 시나리오가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에게 가장 친화적이고 가장 덜 호전적인 늑대만을 골라서 10여 세대 이상을 번식시켰어야 한다. 그랬다면 적어도 수백 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랬다면 수렵채집인들은 이 덩치 크고 충동적 공격성을 지닌 늑대들과 지내면서, 고생해서 얻은 고기의 상당 부분을 날마다 성체 늑대들과 나눠 먹으며 살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그보다는 사람이 통제하는 가축화 이전에 하나의 가축화 단계 즉, 자기가축화 시기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정착해서 사는 인구 집단이 많아지면서 주린 늑대들에게는 밤에 즐길 맛난 먹을거리가 많아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버린 뼈도 좋은 야식이겠지만, 조리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소화가 빠른 사람의 똥도 음식 못지않게 영양가가 풍부하다. 사람이 사는 천막에 접근할 만큼 침착하고 용감한 늑대라면 이 똥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늑대들에게 번식상 이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이 같이 쓰레기를 뒤져 먹고 또 이들끼리 짯짓기했을 것이다. 친화력 좋은 늑대와 겁 많은 늑대 사이에 유전자 이동이 일어나는 빈도는 감소했을 것이고, 사람의 의도적 선택 없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친화력 좋은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을 수 있다.
  이렇게 친화력을 선택하고 단 몇 세대 만에 이 특별한 늑대 개체군의 겉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털 색과 귀 모양, 꼬리 모양이 모두 변했을 것이다. 인류는 이 생김새로 청소부 늑대에게 점점 관대해졌을 것이고, 머징낳아서 이들, 원시 개에게 우리의 손짓을 읽을 줄 아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78~79쪽.)

 

  우리의 얼굴, 손가락 길이, 두개골이 가축화의 징후를 보여준다면, 가축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인 피부색의 변화는 어떨까? (...)
  (...) 우리의 신체 가운데 단 한 부분의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사람과 가축화된 동물의 동공만 연령, 성별과 무관하게 일생에 걸쳐 다양한 색 변화가 나타난다. 우리의 다채로운 홍채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독특하게도 흰색 화포인 공막 위에 홍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막은 색소가 없어 하얗다.
  (...)
  우리는 공막이 하얀 유일한 영장류다. 게다가 눈의 형태도 아몬드 모양이어서 공막이 더 눈에 띄는 까닭에 시선을 조금만 움직여도 무엇을 보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의 눈도 다른 종들처럼 위장형이었으나 어느 시점부터 광고형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가설이 맞다면,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하얀 공막의 눈을 가졌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 종들은 다른 영장류 동물들처럼 색소로 눈을 덮어 시선을 숨겼을 것이다. 다른 사람 종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어두운 공막을 보고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고. (130~136쪽.)

 

  차이는 사람 아이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때 나타났다. 2세의 사람 아기는 완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의 뇌를 가지고도, 훨씬 성숙한 뇌를 가진 유인원들보다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보였다. (...) 물이 든 컵을 쏟지 않게 멀쩡히 내려놓을 줄도 모르고 때맞춰 화장실에도 갈 줄 모르는 그 아이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을 줄 아는 것이다.
  (...) 어린 나이부터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춰, 수많은 세대를 거리면서 쌓여온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점도 우리 종의 생존에 비할 데 없는 우위를 준다. (152~153쪽.)

 

2-2. 이거 봐라. 뭐 대단한 내용 없잖냐. 그냥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축약이 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3. ...라고 생각하고 끝낸다면 우리는 낚시에 걸린 거다. (실제로 이 책의 추천사 중 상당수가 여기에 낚였다;;) 사실 이 책은 그런 낙관론에서 멈출 수가 없다. 진화라는 것이 공감능력과 협응력을 키우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작금의 인류사회가 보여주는 가공할 폭력과 갈등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이 안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원인 역시 진화에서 찾는다. 내 주변에 대한 공감과 협응능력이 강해질 수록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 혹은 정체성에 대한 편견과 공격성도 강해졌다는 것이다. 예禮의 실천에서 친소원근親疎遠近을 따졌던 유가儒家의 도덕관 같은 거랄까.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이 강화된 우리 종에게도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이 생겨났다. (...)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여 협력하면서 유대가 강해짐면 서로를 가족처럼 느낀다. (...) 우리에게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새로운 능력과 더불어 일가친척이 아닌 집단 구성원을, 심지어는 집단 내 타인까지 강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
  사회과학자들은 이 경향을 '편견'이라고 불러왔는데, 편견의 일반적 정의는 한 집단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위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 (180~182쪽.)

 

4-1. 자 이렇게 폭력의 원인까지 짚어냈으니 자연스럽게 폭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까지 이야기가 이어지겠지? (그러라고 원인을 찾는 거니까.)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이야기가 '갑분전원일기'가 된다.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251쪽.)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자들은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접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등을 완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이 낮은 상황에서 여러 집단이 함께할 수 있다면 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 (260쪽.)

 

  가장 바람직한 도시의 모습은 다양한 국가와 민족, 인종, 성 정체성이 섞인 화기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는 공간이다. 이 다양성이 사람들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며, 혁신과 경제적 성장을 이끌고 사회의 관용을 강화시킬 것이다. (...)
  최악은 사람들의 접촉을 막는 도시다. 고층 건물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몇 년을 같은 층에 살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이웃, 사람들이 오가며 일상을 만들어내는 길가라고는 없이, 네모반듯한 대형 체인점과 패스트푸드 레스토랑만 즐비하고, 철통 같은 입구며 담당으로 동네에 머물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가로막는 동네, 고속도로가 동네를 통과해서 건널목이나 녹지 한 뙈기 없는 풍경이다. (280~281쪽.)

 

4-2. 아니 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하아, 글쎄... 너무 나이브하고 두루뭉술한 이야기로 끝나는 거 아닌가 싶다. 서로 얼굴 맞대고 사는 가족 간에도 윤석열 찍냐 이재명 찍냐로 얼굴을 붉히는 우리 사회를 봐도 그렇고, 르완다나 나치 독일에서도 그 전까지 양측이 서로 함께 공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독일의 골드하겐 논쟁이나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나 임지현의 『기억전쟁』이나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 제기하는 문제는 '서로 이웃하며 살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폭력적으로 변했나'인데, 그 해법으로 '서로 이웃하며 살면 된다'라고 하면, 뭐랄까 좀, 돌고도는 느낌이다.

 

약간 요런 느낌?

 

그리고 추천사에 대하여.

 

  '주례사 비평' 혹은 '주례사 서평'이라는 말이 있다.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 비평/서평을 냉소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본디 비평이라는 것이 대상의 장단점을 냉정하게 따져묻는 일이고, 서평 역시도 저자와 독자가 주고받는 '대화'의 결과물임을 생각하면 좋은 말만 늘어놓는 '주례사 비평/서평'이 썩 좋지 않은 것임은 확실하다

 

  다만 '업계 바깥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거나 할 때는 '주례사 비평/서평'이 가진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업계 내부'에서야 서로 치열하게 지적하고 논쟁하면서 이야기들을 다듬어가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독서시장 자체가 쪼그라드는 상황에서는, 이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 혹은 이 책이 가진 유익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글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럴 때의 서평은 낯선 책을 접할 때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독자에게 더 많은 책을 알리는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례사 서평'이라고 해서 마냥 쓰기 쉬운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장점' 혹은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이 책의 단점' 혹은 '이 책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을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수고를 요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그토록 냉소적으로 대하는 '주례사'를 쓰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성실성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 요즘 한창 잘 나간다. 교보문고 재고를 검색하면 0 혹은 1만 뜨는 역사책과는 달리 (역사책 재고의 세계는 언제나 2진법이지...) 수십 권씩 재고를 쌓아놓고 파는 책이다. 책의 명성답게 꽤 많은 셀럽들의 추천사가 앞뒤 표지에 가득한 책이다.

 

  그런데 글쎄 ㅎㅎㅎ 한두 분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추천사가 음... 책 안 읽고 쓰여진 것 같은 강력한 의심이 든다. 책 제목과 서두 몇 페이지만 읽고도 쓸 수 있는 내용들이라서 그렇다. 책 말미에 덧붙인 저자의 글에 따르면 저자들이 정말로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책 말미에 있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제대로 담아낸 추천사가 거의 없다. 하긴 셀럽들이니 이 짧은 추천사 하나 쓰겠다고 책을 꼼꼼히 읽을 여유는 없었겠지. 아니, 그럴 거면 아예 추천사를 안 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만... 뭐, 내가 모르는 또 어떤 사정들 혹은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추천사 문화 같은 게 있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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