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손성욱, 푸른역사, 2020.) 본문
한때 역사지리학 언저리에서 얼쩡댄 적이 있다. 조선시대 교통로를 한참 걷고 연구했는데 그때 대상 중 하나가 연행로였다. 대략 독립문 정도에서 시작해서 은평구를 지나 고양과 파주를 거쳐 임진각까지 가는 길이었다. 농업사회에서 보통사람이 자기 살던 동네를 벗어날 일은 없고 서북지역에서 과거 보려고 한양까지 가는 사람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지도 않았을테니, 이 길은 주로 연행사절 혹은 중국에서 온 사절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두 번의 호란 이후 청나라를 바라보는 조선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저깟 오랑캐들은 기껏해야 백년도 못 가서 스스로 망할 거라 생각하며 삼전도의 굴욕감을 꾹꾹 참아 눌렀는데, 이게 왠걸, 강희-옹정-건륭의 치세를 거치며 청나라의 국세는 날로 번성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소중화주의로 상처난 자존심을 달랬을 것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며 호란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자기위로로 세상에 적응해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정적 변화는 그들이 남긴 '연행록'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그 기록들을 모아 독자가 읽기 편하게 서술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조선인들은 오랑캐의 운은 100년을 못 간다며 청나라가 망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쇠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강성해졌으며, 중화의 정수를 계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청은 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명의 수도였던 북경에 수도를 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명을 계승했다. 명은 천운이 다해 사라진 것이며 청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한 기반 위에 주변을 복속시키고 천하의 질서를 만들어 갔다. 오랑캐가 100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고 더욱 흥하니, 분명 천운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때 조선인의 마음에 진동하던 누린내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되면 내부적 문제가 안정되면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졌으며, 조선 사신단의 북경 내 활동에 대한 통제도 누그러졌다. 조선 사신은 오랑캐의 수도를 관찰할 기회가 많아졌고, 100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고 성세를 만들어 가는 청나라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 (20~21쪽.)
조선 사람 최초로 원명원에 들어간 이는 황인점黃仁點과 홍수보洪秀輔였다. 이들은 정기 사행인 삼절연공행의 정사와 부사로 북경에 왔다가 1782년 정월대보름에 원명원에서 열린 상원절上元節 연회에 초청받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 (...) 홍수보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자가 노나라의 신하로 제나라와의 협곡 회맹에 참석하는 심정이었다. 삼전도 굴욕의 아픈 기억과 만주족을 오랑캐로 멸시하는 마음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만 연회에 참석해 그처럼 불편함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았다.
(...)
조선 사신이 원명원의 연회에 참석하면서 아방궁이니 망국의 지름길이니 하는 비판은 사라졌다. 원명원은 북경에 들르면 꼭 봐야 할 장관이 되었다. (...) 사신단 일행원은 천하의 장관을 보기 위해 원명원으로 몰려들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담 밖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와 등불놀이를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과 입은 간사하다. 이궁에서 황음을 즐긴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천하의 장관이라 칭한다. 사치스러운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면 연회에 막대한 돈을 쓰는 황제를 비판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비판을 하는 이는 극소수였다. (...) (44~45쪽.)
물론 연행록 연구가 이 책이 처음은 아니고 주로 국문학 쪽에서 연행록 연구성과가 상당히 많이 쌓여있다. 다만 문학 베이스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연구는 연행록 그 자체에 대한 텍스트 연구의 비중이 높고, 당대의 정치사회적 맥락과의 연결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 (이게 다 내가 역사학 베이스라서 그런거겠지...) 그래서 그런가, 역사학적 관점에서 연행록을 재구성한 이 책은, 연구사적으로도 의의가 적지 않다고 느껴진다. 예컨대 3부에서 길게 설명하는 숙종 대에서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의 왕세자(왕세제) 책봉 문제가 그렇다. 당시의 조선 사신들이 해결해야 했던 현안들은 대체로 당시의 동아시아 세계질서 및 조선 내의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들이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을 무척이나 충실하게 드러낸다. 같은 소재를 보고도 다른 결과물을 도출하니, 이게 바로 독자로서의 즐거움 아닌가 싶다.
이응준이 윌리엄스를 만난 이야기는 조선의 기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밀 사안이라 기록되지 않았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소실됐을까. 아니면 귀국 후 보고하지 않았을까.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척화斥和' 분위기가 최고점에 달한 시점에서 서양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척화'를 내세우는 동안 서양과 관련된 정보나 지식을 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응준과 같이 미국 외교관을 만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으로 돌아가 숨겨야 할 이야기였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서 사진을 찍었으나, 조선에 가 자랑할 수 없었듯이 말이다. (91쪽.)
마지막으로 하나 보태고 싶은 것은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참가한 중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황도는 조선 내에서 작동하던 질서가 일시적으로 멈추는 공간이다. 그 덕에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이들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교유하고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경험은 조선 내로는 확장되지 못했다.
이상적은 능력이 출중했지만, 신분의 한계를 뚫을 수 없었다. 그는 청나라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시문을 주고받으며, 한·중 문화교류에 이바지했다. 그가 교류한 이들 중 다수는 청나라의 현실에 문제를 느끼고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었다. 서양 세력이 점점 동아시아를 덮쳐 오는 상황 속에서, 이상적의 인적 네트워크는 조선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내부로 확장되지 못했다. 그의 스승 김정희는 옹방강과 적극적으로 교유하면서 북경 내 교류 범위를 확장했으며, 자신이 구축한 네트워크를 조선 내로 확장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김정희 자신이 뛰어난 학예적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세도가문이자 경화사족으로 능력 있는 중인 출신 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반면 이상적이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는 이상건, 이경수, 오경석, 김석준, 이용숙 등 역관 그룹으로 확대되는 데 그쳤다. (125쪽.)
김정희는 오경석을 격려해 주면서도 안타깝게 바라봤을지 모르겠다. 이상적이 신분 때문에 조선에서 재능을 한껏 발휘하지 못한 모습을 내내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인이란 신분이 오경석에게는 기회였다. 이상적처럼 조선에서 발휘할 수 없었던 재능을 북경에서 펼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행적에서 양반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오경석은 오히려 중인이었기에 쉽게 이상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북경 내 문인 네트워크도 이어받을 수 있었다. (134쪽.)
분명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통로가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 중국을 통해 서구의 지식과 문화를 충분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경험이 조선 내에서 확장되고 공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이 세계사의 흐름에 차츰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애초에 경험을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경험을 하고도 그것을 자기화하지 못했던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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