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 (이영석, 푸른역사, 2015.) 본문

잡冊나부랭이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 (이영석, 푸른역사, 2015.)

Dog君 2022. 3. 8. 22:14


  아주 친절하게 서술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여기서 소개하는 주요 저술을 읽지 않은 상태라면 이 글을 그대로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니 진입장벽의 꽤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건 반대로 말하자면, 특정한 목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맞춤독서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당 역사가들의 저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좋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이 책을 가이드로 삼아서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에 재도전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으니까. (이번이 네 번째인가...) 그러고보면 이 책은 자기의 뒤를 이어 영국사 연구에 투신할 연구자를 위해 선배 연구자가 미리 남겨둔 가이드북같은 느낌도 있다.

 

  스톤의 연구에서 핵심은 개방적 친족가족과 가정 중심의 핵가족을 거의 이분법적으로 대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간 유대감이 없는 전근대적 가족에서 애정에 바탕을 둔 근대적 가족으로의 이행이라는 단선적인 진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톤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근대화 모델에 토대를 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가족 안에 애정의 감정이 전혀 없이 소원함과 거리감만 퍼져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스톤은 두 가지 요인을 거로한다. 하나는 가족의 경계가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가족은 "외부나 이웃 또는 친족의 지원, 충고, 감시, 간섭"을 받기가 쉬웠으며 가족 구성원 간의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구학적 요인에 따른 가족관계의 불안정이다. 당시에는 부부 한 쪽의 조기 사망으로 인해 부부가 함께 사는 기간도 20년을 넘지 못했고 자녀들이 15세 이전에 사망하는 비율도 거의 30~40퍼센트에 이르렀다. 이 같은 불안정성은 가족관계가 쉽게 깨졌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간에 깊은 애정을 쏟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
  한편, 스톤은 이같이 냉담한 가족관계가 애정에 바탕을 둔 관계로 바뀌게 된 요인도 인구학적 측면에서 찾는다. 우선 부부의 결혼기간이 이저놉다 길어지면서 동반자로서의 부부관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미 17세기 전반에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같은 설교자들이 부부의 동료관계를 강조했다. 또한 수입과 지위에 대한 야심보다 애정적 만족이라는 관점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
  아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고조되던 시대에 귀족과 젠트리 가족의 자녀 수가 감소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스톤이 지적한 대로, 양육비 상승과 자녀 수 감소 사이에 특정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스톤은 그가 수합한 자료를 토대로 평균 자녀 수의 변화를 검토한다. 16세기에 귀족 및 젠트리 가족의 자녀 수는 평균 5명이었다. 그 숫자는 17세기 전반에 오히려 증가하다가 1660년을 정점으로 다시 감소 추세로 반전된다. 1700년경에는 5명 이하로 떨어졌고 같은 세기 중엽에는 4명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자녀수가 감소할수록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정도가 더 짙어졌으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요컨대 17세기 이후 감성적 개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가족관계가 널리 퍼진 것이다. (72~74쪽.)

 

  다음으로, 스톤의 연구서 대부분은 전체사 서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귀족사회나 가족사나 또는 결혼의 사회사 등 어떤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해당 주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과 상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그 주제 특유의 구조와 변동을 추적한다. 이것은 일종의 건축구조물과 같은 균형미를 느끼게 한다. 사실 전체사 서술은 전시대 역사가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젊은 역사가들에게서 전체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접근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방식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서술은 궁극적으로 전체사를 지향해야 한다. 특히 사회사가의 경우 더욱더 그렇다. (88쪽.)

 

  서구 역사가들의 세계사 서술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에서도 20세기의 모든 변화는 유럽 주요국가와 미국에 의해 주도된다. (...) 2차세계대전 무대에서도 주연과 조연은 유럽과 미국이었고, 아시아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본이 무대의 중앙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바꿀 만큼 비중 있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광활한 지역을 역사의 무대에서 배제한 세계사 서술, 그것도 20세기사 서술이 가능할까? (...) 사실 이러한 지적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할 수 없다. 홉스봄이 제아무리 유럽 외부세계와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유럽중심주의라는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를 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홉스봄이 보기에 20세기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미국의 주도 아래 전개된 역사적 경험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 지역의 전망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사 서술은 역사 동아시아 역사가들의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88~193쪽.)

 

  (...) 퍼거슨의 편향된 시각은 학문적으로 엄정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식민지인들의 경험에 관해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식민지인은 철저하게 영제국의 식민화 대상일 뿐이다. 그는 발전이라는 보편사적 개념을 설정하고 그 매개자로서 영제국의 역할, 즉 문명화 사명, 리빙스턴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회고적 수법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퍼거슨은 나와 '타자'의 만남에서 쌍방향의 작용 또는 영향을 무시한다. (...) 퍼거슨의 '만남'에는 오직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만이 있을 뿐이다. (...)
  이보다 더 문제는 그의 시대착오적인 태도다. (...) 퍼거슨도 인정하듯이, 영국인은 폭력을 통해 제국을 건설했다. (...) 이제 이러한 폭력은 은폐될 수 없다. (...) 19세기 영제국이 세계 지배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퍼거슨은 지난 세기에 이미 실패한 제국 모델을 강조할 뿐이다.
  (...)
  더욱이 영제국의 통치가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했다는 주장이나 20세기의 세계대전이 사악한 제국과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 노력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다. (...) 퍼거슨에게는 제국주의자들만 존재한다.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 삶을 살았던 식민지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 (230~232쪽.)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이후 연구를 예언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특히 에릭 홉스봄과 니얼 퍼거슨에 관해서 공통적으로 '피식민지인' 즉, 트리컨티넨탈의 경험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아마도 한국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문제의식일 것이다. 즉, 피식민자의 관점에서 제국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려는 노력 말이다. 초창기 서양사연구의 목표가 우리가 달성해야 할 지향점을 탐구하는 것이다고 한다면, 서구에 못지 않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냈고 서구가 반드시 문명의 모범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지금 시점에서 서양사 연구의 목표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저자가 다음 책으로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발표한 것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 그는 자신의 전집 간행을 이사 가는 사람의 집안청소에 비유했다.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은 자신의 삶이 남긴 일종의 쓰레기와 같다. 저간의 세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만이 수거하고 분류할 수 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흘려놓은 그 잡다한 것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내용이었다. (...)
  (...)
  노명식 교수는 은퇴 후에는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대전에 주로 거주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몇 년간 일생에 걸쳐 발표한 글들을 한데 모으고 분류하는 데 몰두했다. 그분의 표현에 따르면, '어질러놓은 것을 청소'한 후 이 사회에 열두 권짜리 전집을 건네주었다. 주위 사람과 후학들에게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다시 그분의 명복을 빈다. (417~418쪽.)


  같은 맥락에서 노명식에 대한 '추도사'에서 다소 뭉클해졌다. 촛불시위를 계기로 SNS에 입문한 저자는 정권 교체 이후 SNS를 통해 자기 저술을 공유하는 '지식의 민주화'에 힘을 쏟았다. 출판에 관해서도, 그가 몰두한 것은 자신의 기존 연구를 책으로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은퇴 이후 자기 저술을 정리하는데 몰두했던 노명식의 그것과 겹친다. 그가 노명식을 글로 정리한 것은 자기 은사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노명식을 롤모델로 삼아 자기의 남은 학문적 여생을 미리 정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정말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지만, 글쎄, 나중에 언젠가 역사학자 이영석의 학문세계를 정리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책이 반드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정. 초판 1쇄
193쪽 1줄 :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주격조사가 중복이므로 생략)
294쪽 밑에서 4줄 : 취미와 타락Taste and Corruption
296쪽 2줄 : 맛과 부패 (294쪽과 296쪽 번역이 다름)
386쪽 10줄 : 구가하면 살고 -> 구가하면서 살고
391쪽 사진캡션 : 도쿄 일본제국육군포병공창日本帝国東京砲兵工廠 (한국어와 원어 표기가 서로 다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