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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김혼비, 안온북스, 2021.)

Dog君 2022. 3. 9. 20:50

 

  김혼비의 글을 좋아한다. 일단 웃기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개탄의 양으로 개탄 화력발전소 서너 개는 거뜬히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건 너무 아재 개그 같아서 이게 뭐야,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나, 나 역시도 이런 개그를 매우 자주 구사하기 때문에 이걸로 책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웃기기만 했다면 아마 1~2권 정도만 읽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김혼비를 진짜로 좋아하는 이유는 약하고 평범한 소시민의 마음으로 살아낸 인생 이야기라는 느낌이 때문이다. 『아무튼, 술』과 『전국축제자랑』에서 꼭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을 이야기할 때 한 발 떨어진 관찰자나 고나리질하는 관리자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설명할 때 그 세상 속에 자신이 있다는 점을 까먹지 않으며, 설사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면 적어도 대상과 자신의 거리를 최대한 가깝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 덕에 그가 자아내는 웃음은 스스로에 대한 웃음[自嘲]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한참 웃다가도 어느새 나 자신도 그 대상들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묶음 속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벼르고 별렀던 해외여행이라는 커다란 감격이 있었고, 그 유명하다는 〈모나리자〉를 직접 눈으로 본 흥분이 있었고, 〈모나리자〉에서 누구네 딸내미를 떠올리며 터뜨린 공유된 폭소도 있었다. 〈모나리자〉가 별로였다는, 어떤 시작이 될는지도 모를 작은 취향이 비로소 만들어진 근사한 순간도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에 관해 미리 공부해 와서 친구들에게 조용조용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이름도 종류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예쁜 꽃' 앞에서 찍은 내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꽃의 이름을 설명해주는 '꽃박사'도 있었고, 그 꽃박사는 "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예쁘다고 사진이나 한 장 박고 가는 게 전부"라며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의 매 순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들도 나도.
  이후로도 블로그, 책, 잡지, SNS 등에서 읽은 무수한 여행기들에서 여러 종류의 개탄맨들을 만났다. (...) '그런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식 패키지여행이나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 "여행까지 와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요즘 애들" "인터넷 정보만 믿고 현지인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관광객용 식당에 뭣도 모르고 줄 선 사람들" "역사적 명소에는 관심도 없고 쇼핑만 하다 가는 애들"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여행기 곳곳에 등장했다.
  아니,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고 오면 안 되나. (...)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28~30쪽.)
 
  (...) 언젠가부터 소위 말하는 '솔직함'이라는 것들에 지쳤다. 솔직함은 멋진 미덕이고, 나 역시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하려고 노력하며,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곤 하지만, 솔직함을 무기 삼아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환멸 같은 게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를테면 매해 4월 16일을 전후로 온오프에서 자주 보고 들었던 "세월호 이제 지겹다" 같은 말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으로 시작하는(조심스러우면 하지 마......) 어린이나 난민,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사회 바깥으로 더 밀어내고 배제하는 말들.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그런 말들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는 비난과 조롱들. 깨어 있는 사람인 척하는 가식이다, '맞말'하는 걸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피시충이다,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는 위선자들이다, 적어도 난 솔직하다...... 등등.
  어떤 사람들은 '솔직한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솔직한 나'에 대해 너무나 비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으니, 아무 노력 없이 손쉽게 딸 수 있는 타이틀이 '솔직한 나'여서 그런 것일까. 앞으로도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싶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데 이걸 그럴듯하게 포장해줄 타이틀이 '솔직한 나' 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솔직함, 정말 누구도 바라지 않고 별다른 가치도 없고 하나도 안 중요하니 세상에 유해함을 흩뿌리지 말고 그냥 마음에 넣어두라고.
  정말이지  제발 가식과 위선이라도 떨어줬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 같은 타인의 커다란 비극을 공감하지 못하겠으면 눈치껏 슬퍼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고, 내 기분에 거슬리더라도 시대의 윤리적 흐름을 받아들이며 제발 깨어 있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고, 도덕적 우월성? 그걸 누가 획득하는 것이 그렇게나 분하면 본인도 획득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60~62쪽.)

 

  그러니까 그의 글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풍자나 조소, 골계미 같은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는 따스함 같은 것 말이다. 그의 글이 사소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시작하더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친구와 이웃과 연인과 가족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메시지로 끝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
  요즘은 비행기를 볼 때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다른 여자들의 손을 빌리고 또 손이 되어주면서 우리가 계속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에 대해. 떠나간 여자들 뒤에 남은 읻르은 어쨌거나 어디로은 계속 날아가야 하고, 서로의 비행을 응원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힘에 부쳐 주저앉아버린 순간에 문득 펼쳐볼 수 있는 다정한 기억들을 서로의 마음에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비행기를 보면서 다정을 다짐했다. (...) (152~153쪽.)

 

ps. 그나저나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올 상반기 중으로 꼭 격투기를 배우러 가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먹었다. (이렇게 종종 리마인드를 해줘야 결심이 안 흔들리는 나라는 놈...)

 

  무엇보다 공포를 버텨내는 힘이 달라졌다. 그라운드 위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리적 충돌을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면 여차하면 나도 육탄 방어할 거야, 때릴 수 있다면 나도 같이 때릴 거야,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공포가 조금 줄었다. 진짜로 그럴 수 있든 없는(아마도 실제 상황이 닥치면 못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그런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을 때는, 백지처럼 새하얘진 머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점도 공포의 요인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적어도 나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이것만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수비수 한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 마음대로 누구를 때리라는 뜻이 아니다. 폭력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문명의 선을 지키며 살되, 저 선을 넘어버린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공포와 억압에 가로막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뜻이다. 또 나는 그전까지 왜 맞서 싸울 생각도 못 한 걸까? (...)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만 도가 트느라, 고함치고 때리고 맞는 원초적 싸움에서 나를 주체로 놓아보지 못한 것이다.
  (...)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다고 무력하게 포기하는 게 아니라 '맞대응'이라는선택지를 쥐고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
  그리고 궁금하다. 축구도 이럴진대 본격 격투 스포츠는 싸움에 대해 무엇을 더 알려줄까? 내 몸무게의 두 배가 나가는 바벨을 번쩍번쩍 들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단단해질까? 몸도 몸이지만 다양한 감각들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여기까지 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여기까지 해볼 수 있게 만들므로. 스트레칭으로 몸을 최대한 길게 뻗어보는 것처럼 내 마음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최대한 길게 뻗어보고싶다. 나는 더 잘 싸우고 싶다. 더. 더. (47~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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