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서울리뷰오브북스 5호 (서울리뷰, 2022.) 본문
2호를 읽으면서 "2호까지는 무조건 샀지만 3호부터는 어떤 책을 리뷰하는지를 보고 나서 구입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학위논문 쓰느라 3호와 4호에는 눈길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텀블벅에서 정기구독 펀딩을 보고야 말았고, 나는 또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기구독을 신청하고 말았다는 뭐 그런 이야기...
당연히 이번에도 역사 쪽에 좀 더 눈길이 갔고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앗 이건 역덕 냄새잖아!!! 그 중에서도 『총, 균, 쇠』에 먼저 눈이 갔다. 오호라, 서리북에서 드디어 『총, 균, 쇠』를 다룬다고?! 게다가 필자가 주경철!!
『총, 균, 쇠』는 흔히 유럽중심주의를 반박하는 텍스트로 읽히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썼던 것처럼 『총, 균, 쇠』의 세계관을 수긍한다면, 지구 자전축이 존나게 비틀어지지 않는 이상 서구중심주의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총, 균, 쇠』는, 작금의 서구중심주의를 가장 철저하게 뒷받침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럼에도 『총, 균, 쇠』를 굳이 反서구중심주의 텍스트라고 거듭 주장한다면, 나는 『총, 균, 쇠』가 '유럽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反서구중심주의'라고 말하련다. 서구가 누리고 있는 작금의 '우위'가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지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서구인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마음 편한 변명이 없을 것이다. 그냥 우리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을 뿐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트리컨티넨탈에 대한 식민지 건설과 가공할 착취는 모른 척 해도 되니까.
사실 주경철의 서평 역시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편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서평은 아니다.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의 차이라는 단순한 요소로 그처럼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찬탄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점이야말로 흔히 비판을 초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 주장은 100퍼센트 타당한가? 대륙이 동서로 뻗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물 혹은 중요한 기술의 전파가 용이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보면 사방에 엄청난 사막과 초원지대, 고산준령이 막고 있어서 생각만큼 전파가 용이하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위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쉽게 단순화한 게 아닐까? 아마도 이 문제는 계속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주경철, 「세계의 운명을 설명하는 거대 서사 - 『총, 균, 쇠』」, 25쪽.)
주경철의 서평은 논리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총, 균, 쇠』에 대한 거개의 비판은 (방금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제임스 블로트가 논했던 것처럼) 작금의 저발전을 낳은 결정적인 변수를 논할 때 '환경 혹은 지리'에 좀 더 비중을 둘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 더 둘 것인지에 맞춰져 있다. 전자가 『총, 균, 쇠』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진다면, 반대로 후자는 『총, 균, 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주경철의 서평 역시 그런 점을 염두에 둔 듯 그 양자를 대비하는 식으로 구도를 설정한다. 그런데 그게 약간 뭐랄까... 글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위의 양자를 염두에 두고 아래 인용을 보자.
인간 집단 간 지성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점에서 저자는 인종주의 혹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지리결정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을 살 만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에 대해 지리 '결정론'이라고 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그는 분명 지리 요인이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지만, 인간이 그런 지리 여건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동시에 강조한다. 세계의 운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몫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의 지리결정론의 혐의는 피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비판은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의 설명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큰 스케일에서만 들어맞아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이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앞서 나가게 된 점도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예컨대 '왜 중국이 아니고 유럽이 승리했는가?', 혹은 '왜 동유럽이 아니고 서유럽인가?' (...) 하는 종류의 질문이다. (...) 중국은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시점에 외부에 문호를 닫고 스스로 폐쇄적이 되었고, 이 때문에 승기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이런 방식의 답은 원래 저자가 제시한 논리와는 분명 결이 다르다.
현재 세계의 불평등과 불균형은 13,000년 초장기 역사의 흐름보다도 근현대사의 사건들로 더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주장에 따르면 1820년경 지구상 최부국과 최빈국 사이의 1인당 GDP 차이는 약 3 대 1이었으나 20세기 말이 되면 72 대 1로 벌어진다. (...) 물론 이 지점에서도 저자를 옹호한다면, 바로 19세기 초의 3대 1의 차이가 그 이후의 엄청난 격차를 가져온 출발점이라고 말해 줄 수는 있다. 그럼에도 초장기적 진화론의 설명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무뎌 보인다. (...) (주경철, 「세계의 운명을 설명하는 거대 서사 - 『총, 균, 쇠』」, 26~27쪽.)
위 인용문은 『총, 균, 쇠』에 대한 거개의 비판을 다루는데, 주경철은 대체로 『총, 균, 쇠』를 변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문단에서 『총, 균, 쇠』가 '환경 혹은 지리' 외에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저급한 지리결정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이건 이 서평의 전체적인 결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번째 문단에서는 『총, 균, 쇠』가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를 결정적 변수로 서술했기 때문에 『총, 균, 쇠』의 전체적인 논리와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즉 『총, 균, 쇠』에서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난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앞서 첫 번째 문단의 주장과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못하다. 세 번째 문단에서는 좀 더 나가는데, 당장 첫 번째 문장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못박듯이 선언해버리고, 그 다음에는 "초장기적 진화론의 설명이 ... 너무 무뎌 보인다"라고까지 해버린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총, 균, 쇠』에 대한 비판 부분은 스리슬쩍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총, 균, 쇠』의 전체 논리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가 중요하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이 서평 안에서는 너무 모호하게 처리된다는 거다. 『총, 균, 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지점을 다루면서 '그래 너네 말도 맞는데 그래도 『총, 균, 쇠』 이 책 이거 괜찮은 책이여... 아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응?'하는 식으로 넘어가버리면 사실상 이건 논점을 흐리는 것이 된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서평 전체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영 맥아리가 없어진 느낌이다.
더 많은 말들을 덧붙어야겠지만 내 지력의 한계로 내 글은 일단 여기까지.
그 외에 밑줄 그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핑커의 주장은 내 경험, 생각, 기억, 역사, 현재, 미래의 꿈이라는 렌즈를 거치며 수십 수백 가지로 굴절된다. 내게 진보가 의미 있다면, 그것은 핑커가 제시하는 서양의 진보, 백인의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외세의 침략에 쥐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압축적 근대화와 개발 독재 체제에서 슬퍼하고 기뻐했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횡 속에 목소리를 잃은 약자가 믿는 진보이다. 나는 억압받고 지배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이성, 과학, 진보, 휴머니즘이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핑커가 제시한 계몽과는 다른 얼굴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아직 또렷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계몽』의 표지를 장식한 핑커의 얼굴보다 우리 자신의 투박한 얼굴과 더 비슷할 것임은 분명하다. (홍성욱, 「세상은 좋아졌다, 그런데 왜?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지금 다시 계몽』」, 94쪽.)
2019년 홈리스 주거팀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양동 쪽방 주민들의 83.1퍼센트는 재개발 이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동네가 익숙하다"라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홈리스 운동에 오랜 기간 헌신해 온 이동현 활동가의 생각도 같다. 가난한 이들일수록 도심에 있어야 먹고살 수 있고, 오래 살던 곳, 익숙한 관계들이 있는 곳이라 떠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 화자들이 전하는 '익숙함'의 서사는 세세하다. 지방은 서울보다 수급비가 적고, 시내의 병원까지 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 가난한 사람이 모여야 정부나 기업, 교회의 후원도 모인다. 수도 서울의 중심지를 부동산 논리로 따지는 사람들, 자립과 자활을 탈빈곤의 경로로 전제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서사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양동 쪽방촌 주민들이 얘기하는 "익숙함"이란, 기회와 자원을 힘겹게, 가까스로 연결해 낸 결과이자 성취라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 도시락, 인력사무소, 사랑의 집, 교회, 급식소, 지원센터, 상담소, (...). 가족, 학교, 일터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사람들, 명의범죄에 휘말려 신용 불량자가 된 사람들, 환자 숫자가 병원 수익과 직결되는 의료 시스템의 먹잇감이 되어 수년간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약물 중독자가 된 사람들이 연결해 낸 사람과 사물의 목록이다. 이렇게 구축된 빈자의 연결망이 출구 없는 미궁처럼 보인다면 누굴 탓해야 하나? 가난과 싸워 온 사람들이 가난한 개인을 전면에 등장시켰을 때, 이 개인의 몸이 다른 사람, 사물, 법, 정책과 연결되면서 펼쳐지는 세계를 서사화·역사화할 때, 우리는 은막의 구조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배치(assemblage)를 들여다보고,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거대한 불평등의 시대, 선진국 진입을 자축하는 나라에서 이 배치가 정말 최선인지, 우리가 이 배치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이 생명에 대한 동료 인간의 예의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문영, 「가난한 개인은 그 자체로 세계다 -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168~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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