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지식의풍경, 2000.) 본문
사학과에서 학부 4년을 꼬박 채웠지만, 정작 고전이라고 할만한 책은 별로 읽지 않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있고, '마르탱 게르의 귀향'도 거기에 들어간다. 근데 이게 참 희한한 일이다. 내가 학부를 다니던 2000년대 중반이면 문사철 공히 포스트주의의 폭풍의 스톰이 몰아치던 시기라 여기도 포스트 저기도 포스트, 아주그냥 오만데서 탈이 어쩌고 탈이 저쩌고 해서 인문대 학생들이 인문대 앞 족구장에서 봉산탈춤을 추고 그랬더랬다. 나도 덩달아 후기- 후기- 후기- 하면서 지마켓보다 더 많은 후기를 써대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한국에서 미시사/신문화사가 소개된 맥락이 바로 그 탈-마르크스주의의 연장선이었단 거지.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그냥 내가 게을러서지.
머 사실 전혀 트라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야 시바 그래도 이 정도 책은 원서로 봐야지 않겠냐 하면서 같은 과 애들 몇이랑 원서 스터디랍시고 이 책의 첫 서너 페이지만 읽고 나자빠진 적은 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을 읽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랬던 것을 가짜 남편 만들기와 유유의 귀향을 읽은 김에 함께 읽었는데, 아 이거 진짜 명불허전이다. 분량은 그다지 길지 않지만 사건 그 자체가 가진 덕인지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내가 읽기에 이 책은 강명관과 권내현의 중간에 위치한 듯하다. 대체적인 서술 순서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가운데 놓고 앞쪽에는 당시 랑그독 지역의 상속관행을 설명하며 배경을 깔아두고 뒤쪽에는 코라스의 텍스트를 면밀하게 파고들어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추측한다. 물론 추측과 상상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후자의 접근법, 즉 신문화사의 방법론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있고 나도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게 최종 결론으로까지 이어지는 핵심적인 연결고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니 나도 그 이상으로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구성이 확실히 장점인 것 같기는 하다. 강명관을 읽을 때는 과도해 보이는 추측에, 권내현을 읽을 때는 너무 많은 듯 느껴지는 레퍼런스에 아쉬움을 느꼈는데, 이 책은 양자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배치해서 각각의 아쉬움이 서로 상쇄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밍숭맹숭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확실히 강명관, 권내현,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로 이어지는 트릴로지는 앞으로도 많이 회자될 것 같다. 아니 지금까지 역사학계에, 세부 분과를 초월한, 이렇게나 깔끔하고 완벽한 삼위일체가 또 있었나.
그러나 젊은 아버지에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그 후 12년 간의 생활로부터 마르탱 게르의 정신상태를 판단한다면, 다른 젊은이들과의 칼 싸움이나 곡예를 제외하고 아르티가에는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몇 년 간의 성 불능 이후 불안정한 성 생활, 곧 결혼할 누이들로 이루어진 가정, 아들 상시의 출생으로 이제 분명해진 상속자로서의 그의 지위, 마르탱은 이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바스크 가족 내에서 나이 든 가장과 젊은 가장 사이의 관계는 잘해야 미묘한 것이었다. 완고한 아버지 상시와 고집 센 아들 마르탱의 사이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40쪽.)
(...) 친척들이 마르탱과 헤어지라고 재촉했을 때 그녀는 단호히 거부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르트랑드 드 롤스의 어떤 성격상의 특징을 알 수 있는데 그녀는 이미 열여섯 살에 그러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여자로서의 평판에 대한 관심, 확고한 독립심, 자신의 성(性)에 대해 부과대는 압력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에 대한 재빠른 현실 감각 등이 그것이었다. 결혼을 무효화했더라면 이어 부모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했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아내의 특정한 의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마르탱의 누이들과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낼 기회를 얻었고 그들과 의좋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를 지킨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 (48~49쪽.)
여자들은 남편의 선의에, 그리고 과부가 될 경우에는 아들들의 선의에 크게 종속되어 있었다. 원칙적으로 랑그독의 관습은 과부에게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 모두와 그 지참금 가치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증가액"을 돌려줄 것을 보장했다. 실제로는 아르티가와 주변 읍과 촌락들에서는 혼인 계약서에 이 점을 기재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결정은 남편의 유언장에서 이루어진다. 기껏해야 남편은 아내가 "재혼하지 않고" (일부 유언장들은 "정조를 지키며"를 덧붙였다) 사는 한에서만 그의 모든 재산에 대해 용익권을 가질 수 있다고 규정한다. (...)
이러한 농민 세계의 현실은 훌륭한 농민의 아내로서의 기술들뿐 아니라 남편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어 내고, 과부로 남아 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하는 여성의 능력을 고무했다. (...) 그들은 과부로서 촌락의 다른 여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며, 나(Na)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고 새로 결혼한 아들에게 포도밭을 주고 대자(代子)들 모두에게는 양말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어머니와 딸의 깊은 유대와 은밀한 공모를 통해 그 체제를 전달하고 그것에 협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
베르트랑드가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새로운 터전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바로 그때 마르탱 게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변고였다. (...) 당분간 피에르 게르가 죽은 형의 상당한 재산을 관리하고 마르탱의 결혼하지 않은 누이들의 후견인이 될 것이었다.
(...)
이 모든 사건들로 인해 베르트랑드의 지위는 더욱 축소되었다. 한 남자의 아내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부도 아닌 그녀는 다시 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되었다. 누구의 아내도 과부도 아닌 그녀는 방앗간, 우물, 기와 공장에서, 그리고 수확 때에 마을의 다른 여인들과 마주쳐야 했다. (...) (51~55쪽.)
(...) 그녀는 피고가 답변 속에서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마르탱 게르에 대해 과거에 알았던 것만을 말해야 했으며, 자신을 간음죄에 빠트릴 만한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속기 쉬운 여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해야 했으며 그것은 여성들이 언제든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법관 앞에서 발휘하던 기술이었다. (101쪽.)
교정. 초판 8쇄
65쪽 밑에서 8줄 : 실재 인물들도 -> 실제 인물들도
103쪽 밑에서 9줄 : 칙령온 -> 칙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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