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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의 반역 (계승범, 역사비평사,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모후의 반역 (계승범, 역사비평사, 2021.)

Dog君 2022. 4. 20. 20:20

 

  이 책은 (마치 한강이 그러하듯) 두 개의 물줄기에서 발원했다.

 

  이 책의 북한강은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다. 광해군이라는 인물과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한명기와 오항녕의 책인 것 같다. 한명기의 관점이 대중문화와 상식 선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오항녕의 책이 이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하여 지배적인 통설이 수정되는 중이라고 하겠다. 기존의 두 관점이 정과 반의 관계라고 할 때, 이제 슬슬 합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시점에 이 책이 나왔다. 계승범은 기존의 두 관점이 광해군 개인에 대한 평가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광해군의 치세가 조선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가 더해질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 광해군의 재위기간(1608~1623)을 다룬 연구는 제법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광해군이라는 인물 자체에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 특히 그의 세자 시절 16년 전체를 놓고 그가 겪은 경험을 통해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그 내면까지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광해군을 집중 조명한 대중 교양서 두 종이 있으나, 저자의 필요에 따라 광해군을 호명해낸, 그래서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사실상 주인공이 되어 광해군을 활용한 면이 강하다.

  (주)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참조. 한명기가 1930년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래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 추세를 계승했다면, 오항녕은 그런 재평가를 전면 비판하고 광해군을 내정과 외정에서 모두 실패한 군주라는 '본래의 위치'로 되돌렸다. 두 책 모두 광해군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이해의 증대에 기여하였다. 다만 모두 광해군을 피고석에 두고 저자가 각각 변호사와 검사의 역할을 하며 쓴 대중서이기에, 과연 두 책의 내용이 사실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두 책에 대한 종합 비평으로는 계승범, 「광해군, 두 개의 상반된 평가」, 『한국사학사학보』 32, 2015 참조. (32~33쪽.)

 

  이 책의 남한강은 저자의 전작이다. 저자는 전작 『중종의 시대』를 통해 조선이라는 사회가 당초 불교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나라로 이행하는 변곡점으로 중종 대를 지목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조선시대의 변곡점을 찾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의 다음 작업은 조선을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어쩌다가 조선이 식민지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정도로 경직되고 무능한 사회가 되었는지, 혹은 지금의 한국 사회로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을 밝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머 암튼 그래서 『중종의 시대』 다음으로 저자가 지목한 조선의 변곡점은 광해군의 시대다. 그의 신작 『모후의 반역』은 광해군 대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성리학의 조선이 다시 한번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장자 임해군의 성품이 크게 문제되자, 신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광해군에게 쏠렸다. 광해군은 어려서부터 사려가 갚고 효심이 남달랐으며, 장성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다고 널리 인정받았다. 이런 성품으로 그는 자주 세자의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도 대군의 탄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고 군들도 아직 어린 탓에, 건저建儲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정 논의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의인왕후가 20년 가까이 임신하지 못하자, 세자 책봉 논의는 바로 다시 비등하였다.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는 대군이 없으면 군이라도 빨리 세자로 책봉하여 종묘사직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
  그 뒤로 1591년(선조 24)에는 3정승인 북인 계열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 서인 계열 좌의정 정철鄭澈(1536~1593), 남인 계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1542~1607) 및 남인 계열 부제학 이성중李誠中(1539~1593) 등이 세자를 하루바삐 결정하도록 선조에게 함께 건의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함께 건의하기로 약속한 날 이산해가 병을 이유로 출근하지 않았고, 유성룡과 정철 등만 선조를 알현하였다. 약속대로 정철이 먼저 세자 책봉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크게 진노하자, 유성룡은 입을 다물고 정철을 옹호해주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정철 등 다수의 서인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선조는 세자 책봉 문제가 조정의 주요 안건으로 오르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며, 심지어 발론자를 좌천시키는 등 강한 불만을 표하곤 했다. (39~40쪽.)

 

  부왕 선조의 견제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세자 광해군의 지위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더 불안해진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런데 그 근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는 별로 없다. '적자' 영창대군이 '서자' 광해군보다 종법상 상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치밀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재고가 필요하다.
  (...)
  먼저 입후立後 문제와 관련해, 아들이 없어 동종同宗의 조카를 양자로 들인 후에는 비록 나중에 친자가 태어나더라도 파계罷繼하지 않고 친자를 중자衆子로 취급하는 경향이 16세기 후반 선조 대에 이르러 대세로 굳어지고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6세기 후반은 입후 후에 친자가 태어나더라도 이미 정해진 부자의 의리를 바꿀 수 없으니 친자를 중자로 삼아야 한다는 종법 관습이 정착하던 시기였다. 그 뒤 인조(r. 1623~1649) 때에는 양자의 장자권 불변을 아예 법령으로 만들어 반포함으로써 선조 대 이래의 판례들을 법제화하였다. (...)
  이를 종합해보면 16세기 후반에는 입후의 결정을 번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적자가 없는 경우에 서자에게도 입후의 법적 권한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사례에 적용해보면, 뒤늦게 영창대군이 태어났더라도 이미 합법적으로 세자로 공인받은 광해군의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요컨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세자 광해군의 지위가 불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본 이유를 종법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위협한 결정적 요인은 종법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지나친 견제 및 선조의 그런 의중을 감지한 일부 신료들의 재빠른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선조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이할 때부터 조심스럽게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었다. 선조는 새 왕비의 책봉을 계기로 세자 광해군을 더 심하게 홀대하였다. 세자 광해군이 문안을 드리러 와도 선조는 문밖에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했으므로 세자가 아니니 앞으로는 문안하러 오지 말라는 극언도 되풀이하였다. (73~76쪽.)

 

  광해군의 세자 지위가 불안해진 이유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종법 문제보다 부왕 선조의 과도한 견제와 홀대 및 그로 인해 일부 신료들(유당)이 친영창대군 노선을 걷는 등 정치적 요인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세자 책봉 주청이 다섯 차례나 거절되어 끝내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점도 광해군에게는 매우 불리하였다. (...)
  광해군의 성격도 대범하다거나 과단성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16년 동안 세자인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극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작 광해군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 이런 경험은 그를 더욱 방어적이고 조심성 있는 성격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신료들을 직접 불러다 눈앞에 세워놓고 혼내면서 휘어잡는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위 후에도 광해군은 여러 복잡한 사안을 풀기 위해 신료들과 대면하기보다는 승정원을 통해 문서로 논쟁하고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정치 스타일은 타고난 성격 외에도 세자 시절의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불안감과 불신감의 결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명이 세자 광해군의 책봉을 기어이 거절한 점도 향후 광해군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 명의 이런 태도는 당시 명의 내부 사정과 맞물려 복합적으로 발생한 결과이지만, 광해군에게는 회복되기 힘든 큰 상처로 남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명나라에서 광해군에 대한 승인을 계속 거부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왜냐하면 불과 10여 년 뒤 후금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명나라가 조선의 도움을 원했을 때, 명나라를 도와주기는커녕 후금의 누르하치와 우호적 대화를 추구한 장본인이 바로 명에 대해 감정이 좋을리 없는 국왕 광해군이었기 때문이다.
  (...)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유폐로 이어진 소용돌이 정국의 한복판에서 국왕 광해군이 내린 결정들은 왜란을 계기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와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의 성격에 맞게 취한 선택이었다. 국왕 광해군이 황제의 징병 칙서를 받지 않고 오히려 후금과 대화를 추구한 것은 현명한 외교를 능동적으로 추구했다기보다는 명으로부터 이미 마음이 떠난 그가 외부(후금)의 위협에서 종묘사직을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자구책이었다. (...) (83~85쪽.)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만으로 보면 『모후의 반역』은 오항녕의 광해군 묘사와 비슷해 보인다. 광해군은 즉위 전부터 이래저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이었기에 즉위 후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의 확립과 신권의 제약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음을 이 책은 가감없이 전달한다. 특히 명청교체기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개인적 트라우마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냐면 내가 그걸 판단할 깜냥은 안 되니까) 꽤 흥미로운 설명이다. (오항녕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계승범은 오히려 광해군의 적극성을 최대한 부각한다. 그가 설명하는 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제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북인 계열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던, 우리가 기존에 알던 광해군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라 즉위 전부터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했고 이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소지가 있어 보이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병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선조 아들은 맞는거 같다.) 임해군의 제거, 계축옥사, 인목대비의 거취 등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으로 상황을 주도했다.

 

  광해군은 (...) 임해군 제거 작업을 시작하였다. 즉위한 지 열이틀 만이었다. 북인 계열의 일부 대간이, 임해군이 몰래 무기를 저장하고 무인들을 불러 모으는 등 행동이 수상하니 즉시 체포하여 섬으로 유배해야 한다고 올린 계사가 첫 불을 지폈다. 대신들 앞에서 광해군은 동기간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애통하다는 뜻을 거듭 표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의 체포, 가택연금, 도서(진도) 유배 등 일련의 조치를 그날이 가기 전에 전격적으로 처리하였다. (...)
  (...) 광해군은 고변 내용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도 않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임해군의 죄를 기정사실화하고 곧바로 유배 조치를 내렸다. 심지어 이 판결은 추국청을 설치하기도 전에 나왔다. 판결과 처벌을 확정하여 내린 지 나흘이 지나서야 추국청을 설치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런 사법절차는 상례에 크게 어긋나는 방식이었다. 역모의 고변이 들어오면, 국왕의 판단에 따라 먼저 추국청을 설치하고 고변한 자를 심문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에 피의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런데 고변자와 피의자의 공초는커녕 추국청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대간의 말만 듣고 바로 그 즉시 피의자에게 중죄를 선언하고 판결까지 내린 꼴이었다. (...)
  (...) 임해군은 끝없는 악행으로 말미암아 왜란 전부터 이미 인심을 크게 잃은 탓에 선조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임해군을 유배하고 추국 과정을 진두지휘했지만, 임해군을 처형하라는 신료들의 건의를 계속 물리치며 재가하지 않았다. 형을 죽이라는 여론 때문에 자신의 심경이 몹시 심란하다면서 슬픈 기색을 보이기 일쑤였다. 그랬건만 그는 역대 제왕들이 왕족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때 종종 사용한 전인살해甸人殺害 방식을 임해군에게 적용하였다.
  (...) 광해군이 바라는 최선의 모양새는 모든 조정 신료가 임해군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는 가운데 자신은 그 수락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온 조정이 임해군 처형을 한목소리로 높이는 상황을 '즐기고', 조선의 새 국왕이 자신임을 천하에 분명히 보여주다가 적당한 때에 임해군을 전인살해 방식으로 제거하는 것이 가장 깔끔한 일처리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위소를 지키던 교동 별장 이정표李廷彪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그가 왜 갑자기 죽었는지 그 원인과 정황을 전혀 캐묻지 않았다. 신료들 앞에서 그가 보인 첫 반응은 깊은 슬픔을 토로하고 곧바로 예를 갖춰 후하게 염빈斂殯해주라는 하교였다. 슬픔을 '충분히' 표한 후에도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관을 파견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97~102쪽.)

 

  (...) 계축옥사에 임하는 광해군의 최우선적 관심은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일이 었다. 영창대군의 처리 문제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대비논쟁은 광해군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계축옥사를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신료들 사이에 영창대군의 처단에 대해서 공개적인 심한 반대가 없었다. (...) 영창대군의 무고함은 다들 알고 있지만 왕조국가의 특성상 영창대군은 앞으로 두고두고 나라의 화근이 되리라는 정서가 조야에 편만하였다.
  그런데 옥사의 와중에 대비의 거취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자 대비에 대한 문책만큼은 절대로 불가하다는 반대 여론이 매우 강하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런 새로운 정서는 심지어, 영창대군은 영문도 모르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으니 처단하지 말고 은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여론으로까지 확산되었다. (...) 이는 애초 광해군의 의도와 정면으로 상충하는 최악의 변수였다.
   (...)
  영창대군 제거를 우선시하던 광해군에게 이런 변화가 크게 거슬렸음은 당연하다. 이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처벌과 인목대비의 거취 문제를 연계하지 않음으로써 일단은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옥사로만 계축옥사의 범위를 국한시키려 하였다. (...) (116~117쪽.)

 

  (...) 광해군과 대간의 충돌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 거의 모든 경우에 광해군의 뜻대로 결말이 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간쟁은 그 성격상 왕의 비례非禮를 발견한 대간이 먼저 발론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히려 광해군이 먼저 대간의 잘못을 지적하여 논쟁이 촉발한 경우도 제법 있었다. (...)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에도 단호했지만 왕권의 행사에 제동을 거는 대간도 묵과하지 않았다. 광해군 대에 대북 계열이 삼사를 발판삼아 세력을 확정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그들이 '소심한' 광해군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광해군의 확고한 토역 의지를 충실히 따른 덕에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결코 대북 계열 등 특정 정치 세력에게 끌려다니지 않았으며, 오히려 삼사를 줄곧 압도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간쟁이나 탄핵을 유도해내기까지 하였다. (165쪽.)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 광해군의 적모는 의인왕후이고 계모는 인목왕후(대비)였다. 공빈은 그저 사친일 뿐이었다. 그러나 공빈이 사후에 왕비로 책봉을 맏고 태묘에 봉안된 결과 이제는 왕후로서 광해군의 생모이자 동시에 적모가 되었다. 더군다나 왕비의 관복까지 명에서 하사받았으니, '본래 측실이었다'는 약점도 완벽하게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서자로 입후하여 후사를 이은 모양새가 아니라 처음부터 적자의 신분으로서 대통을 이은 국왕으로 탈바꿈하였다. (...) 인목대비는 이제 본처의 아들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한갓 계모로 새롭게 자리매김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광해군이 느끼던 '모후 핍박'의 부담을 어떤 식으로든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인목대비를 폐위하더라도 아들이 모후를 폐했다는 비난을 희석하는 효과였다. (...) 왕이 역모를 꾸민 대비를 처벌하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처벌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사안이었으며, 그만큼 광해군의 윤리적·심리적 부담도 훨씬 덜하였다. (201쪽.)

 

  요컨대 광해군은 폐위 논쟁 기간 내내 결코 어느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잃지도 않았다. 그는 정국을 보는 정확한 판단에 기초하여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폐위론 정국도 광해군이 계획한 그대로 흘러갔다. 광해군은 백관의 대비 폐위 정청을 유도해내 공식적으로는 계축옥사의 진실성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왕권이 잘 작동하는지를 시험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서인과 남인 계열에 대한 숙청을 최소화하고 대북 계열의 지나친 요구는 묵살함으로써 당쟁에 말려 들지 않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무엇보다도 대비에 대한 폄손을 명하고도 정작 그 절목에는 서명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여 상충하는 두 개의 유교 덕목인 공의(忠)와 사은(孝)을 절충하면서 정국을 수습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국의 주도권은 계속해서 광해군 손안에 있었던 것이다. (243~244쪽.)

 

  그런데 이거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는 거다. 특히 인목대비의 거취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인목대비에 반역의 혐의가 실제로 있는가 없느나를 논할 수가 없게 됐다는 거다. 광해군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데 사실 관계 자체를 문제삼으면 이건 자칫 광해군이 거짓말장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목대비의 반역 혐의에 관한 진실성 여부는 부차화되는 대신 광해군조차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효'의 가치를 근거로 들어야만 광해군에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광해군이 인목대비 사안을 처리할 때 부담스러운 부분은 단지 불효라는 유교적 천륜天倫 문제만은 아니었다. 인목대비의 역모 가담 사실 여부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였다. (...) 그렇지만 폐위 논쟁 기간에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계축옥사의 전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역적을 비호하고 왕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계축옥사와 대비 폐위 논쟁이라는 장막 뒤의 총감독이 바로 국왕 광해군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비록 인목대비의 혐의 내용이 날조라고 믿을지라도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피력하기는 어려웠다. (...)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논쟁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 대비에 대한 공소 사실 자체에 의문의 여지가 많으니 대비를 섣불리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세우는 대신에,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이 어머니를 벌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예법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유교의 양대 가치인 충과 효가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의 논쟁으로 비화하였다. (...) (246~247쪽.)

 

  (...) 인목대비의 죄목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또는 과장된 것 같다는) 의심이 당시에 편만하였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었으며, 필연적으로 논쟁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논쟁은 극단으로 치달렸다. (...) 인목대비의 경우에는 역모에 직접 가담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의심을 공개적으로 피력할 수는 없었다. 의심을 발설하는 순간, 계축옥사의 처리 과정을 진두지휘한 국왕 광해군에게 도전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었다. (...) 따라서 이 논쟁은 인목대비의 반역 사실 여부를 가리는 본질적 문제에서 벗어나 유교적 가치의 해석을 둘러 싼 논쟁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충·효의 상관관계를 해석하는 폭이 크게 좁아졌다. 범죄 사실이 불분명하므로 대비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지 못하고, 대비의 범죄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은 어머니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런 논리를 주희로 대표되는 중국 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매우 극단적인 해석이었다. (...) 결과적으로, 성리학 범주 안에서 얼마든지 서로 양립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처벌론(폐위론)과 은혜론(폐위불가론)이 폐위 논쟁을 거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인 논리로 심각하게 변질된 것이다. 이 점은 조선 성리학의 운신 폭이 그만큼 좁아지고 학풍 자체도 그만큼 경직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뿐 아니라 폐위 논쟁은 격렬한 권력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 때문에 논쟁을 처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전개하기는 힘들었다. (...) 반대 논리를 펴는 상대방을 역적으로 취급한다면, 더 이상의 토론과 절충은 불가능하였다. 자기 해석만이 정正이고 상대방의 해석은 사邪로 규정하여 불구대천을 거론하 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도통이니 학통이니 종통이니 하여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통을 따지는 성리학적 유교지상주의로 들어서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가 충忠과 역逆, 또는 정론正論과 사론邪論으로 갈렸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대화를 통해 절충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임을 뜻하였다.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을 계기로 폐위반대론자들이 폐위론자들을 대거 보복 숙청함으로써 이런 불구대천의 분위기는 더욱 심화하였다. 이 같은 극적인 반전이 토론을 통해 확보한 논리적 우위의 결과라기보다는 쿠데타를 통한 핏빛 숙청의 결과로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623년 이후 효의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충할 수 없다는 명제가 조선 유학의 한 규범으로 확실하게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적 테두리 안에서 사뭇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던 주제가 그 이후로 토론하자며 입에 올리기도 힘들 지경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변(반정) 발생 이후 불과 5년 만에 발생한 정묘호란 및 후금과의 불가피한 회맹을 계기로 더욱 심해졌다. (286~288쪽.)

 

  인목대비 거취 논쟁의 결말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시피 (역사가 스포) 광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아무리 모후라 하더라도 국가에 대한 반역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충과 효가 충돌할 때 충이 우선라고 판단됐다는 거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최소한의 합리성은 지켜지는 팩트체크 중심으로 처리되었을 반역사건이, 어쩌다가 프레임이 괴상하게 짜여졌고, 그 결과 '충'과 '효'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립항처럼 됐다는 거다.

 

  일단 프레임이 이상하게 짜이니까 다음 스텝도 계속 엉킨다. (여기서 레이코프 선생의 혜안에 일단 한번 무릎을 치고.) 인조반정(계해반정)으로 등장한 서인 세력은 'anything but 광해군'을 내세우며 '충'과 '효'의 관계에서 다시금 '효'를 전면에 내세우게 됐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아니 저기요, 그 두 개가 딱히 충돌하는게 아니고요, 우리 다같이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니까요, 같은 말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됐다. 저자의 말마따나 "명실공히 충·효를 강조하던 유교국가 조선에서 (…) 충의 깃대는 꺾인 데 비해 효라는 깃발만 힘차게 나부끼는 '이상한' 유교국가로 변했"다는 거다.

 

  어,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독립운동하다가도 아버지 돌아가시면 만사 제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경직된 성리학의 사회가 바로 요 때부터 시작됐다는 거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멸망의 롤러코스터...

 

  이렇듯 정묘호란은 정변을 통해 탄생한 인조 정권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으며, 그 결과 통치력에도 위기를 맞았다. 빗발치는 척화 상소에 대하여 인조는 강화가 전쟁을 완화하기 위한 임시 계책일 뿐 화친이 아니라고 누차 변명하였다. (...) 광해군보다 더 심하게 의리를 저버렸다는 인식은 조정 내부에도 팽배하였기 때문이다.
  반정의 양대 명분은 광해군의 배명背明과 폐모廢母 행위에 대한 응징이었는데, 전자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끼고 후자에 대해서는 더욱 목청을 높여 강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후금과의 강화로 야기된 정당성 문제를 폐모라는 다른 명분으로 상쇄시켜서 반정의 정당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앞서 확인하였듯이, 인조의 행장을 비롯하여 호란 이후에 편찬된 거의 모든 책에서 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 행위에 맞추고, 광해군의 배명 행위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이런 변화를 알려주는 좋은 지표이다. (...)
  명분의 전환은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인조 정권의 이념적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반정의 양대 명분 중에서 한쪽 날개를 잃고 다른 한쪽만 가지고 정상적으로 비행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직 붙어 있는 한쪽 날개를 더욱 소중히 여겨 강조하는 한편, 이미 없어진 다른 쪽 날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주지하듯이, 조선왕조는 청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새 국제질서를 부정하면서 스스로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하여 고립의 길을 걷고,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여전히 군부로 받들며 북벌론·대명의리론·조선중화론·중화계승의식 등을 장기간에 걸쳐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이념적으로나마 되찾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320~322쪽.)

 

  충과 효가 충돌할 때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는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토론이 가능한 주제였다. 하지만 17세기 초·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유교적 논쟁을 표방한 정치적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조선의 성리학은 점점 더 유연성을 잃어갔다. (...) (348쪽.)

 

  이 책을 읽고 나니 전에 읽었던 책에서 가졌던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예컨대 『26일동안의 광복』에서 저자(길윤형)과 독자가 가지는 아쉬움, 즉 이념과 파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일한 조직을 구성해서 공동을 목소리를 내는 것은 왜 불가능했을까, 하는 아쉬움에 대해 이 책이 실마리를 알려주는 듯하다.

 

  물론 이런 접근은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주장한 당파성론처럼 들리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 역시 그런 비판을 꽤 받으시지 않을까 싶은데, 그에 관한 저자의 답변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나는 여기에 대해, 2022년 지금까지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겠나 싶은 정도의 아주 느슨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국어國語』에 처음 등장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전통적 유교 가치체계에서도 이제는 충의 대상으로서의 '보편적·절대적 군君'이 점차 형해화의 길을 걸었다. (...)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을 때 이제 개인이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은 국왕이 아니라 붕당의 우두머리였다. 자신은 비록 죽임을 당할지라도 대를 이어가며 사후의 자기를 기억하고 추모할 주체는 후대의 평가도 아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춘추필법의 준엄한 역사서도 아니며, 누가 왕위를 이을지 불분명한 미래의 국왕도 아니고, 결국은 자신의 붕당 구성원들뿐이었다. (...)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면, 조선 후기에는 군사부일체에서 '군'은 점차 탈락하고 '사'와 '부'에 대해서만 의리를 실천하면 충분한, 그래서 '이상한' 유교국가로 진화한 것이다. (...) (357쪽.)

 

  19세기 중반, 이른바 근대의 문턱에서 조선이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 리더십의 구축이 필요했다. 그런데 철저한 유교 사회이던 조선은 양반층의 사적 영역을 아우르고 국왕을 정점으로 강력한 통치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근거인 충忠 이데올로기를 이미 꽤 상실한 상태였다. 19세기 조선에 필요했던 것은 신분을 초월한 동류의식과 그것에 기초한 내셔널리즘 움직임과 국민국가 건설이었다. (...) 그런데도 독립협회(1896~1898) 이전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감지하기 어렵다. 식민지 경험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3·1운동을 제외하고는 참다운 민족주의를 찾기 힘들고 진정한 의미의 국가주의 역시도 약했다. 좌우합작은커녕 분열과 분단으로 치달린 한국 현대사는 좌우 이념을 초월한 민족주의가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역으로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특히 이른바 배웠다는 지식인층에서 더 심했다. 그 이유는 한 국가(왕조)의 인간관계를 설정해줄 거의 유일한 전통 사상이 충과 효인데, 그 충의 실천적 개념이 이미 오래전에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충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던 효가 충을 물리치고 중앙의 정치무대를 접수하면서 발생한 필연적 산물이었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인목대비 폐위 논쟁 및 정변(반정)을 통한 극적인 반전은 조선 사회에서 충과 효의 관계가 자리바꿈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유교국가 조선에서 그 유교적 근간인 충의 가치가 현실에서 사실상 실종된 역설적인 상황은 이렇게 가능하였다. (...) (361~362쪽.)

 

  다만 독자 입장에서 약간 아쉬운 것은 '효치국가'라는 개념에 관한 것. '효치국가'는 책의 부제에도 들어갈 정도로 핵심적인 개념으로, 저자는 광해군 이후의 조선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주요 키워드로 이 단어를 뽑는데 정작 그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아서 독자로서는 자연스럽게 '떡밥 회수 왜 안 함???' 같은 반응이 나오게 된다.

 

  이 책에서는 후기 조선왕조의 성격 가운데 하나로 '효치국가의 탄생'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충·효를 강조함은 조선 후기에도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정치무대의 현실에서는 둘 사이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현상이 조선식 주자학의 교조화와 함께 등장하여 편만하였다. 이 같은 의미로 효치국가라 칭한 것인데, 바로 그런 국가의 탄생 시점이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이었다. 환언하면 명실공히 충·효를 강조하던 유교국가 조선에서 계해정변을 기점으로 충의 깃대는 꺾인 데 비해 효라는 깃발만 힘차게 나부끼는 '이상한' 유교국가로 변했다는 의미다. (...) (350쪽.)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효치국가' 개념을 이 책에서 전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는 하다. 왜냐면 이 책은 어디까지나 광해군 대에 대한 분석인데, '효치국가'는 광해군 이후의 조선사회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치국가' 개념의 제안은 이 책의 논증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 때문에 '효치국가' 개념을 너무 섣부르게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다. 물론 광해군 대 이후의 조선을 '효치국가'로 보는게 맞냐 틀리냐 하는 문제는 학계에 계신 분들끼리 알아서들 해결하실 일이지, 비전공자 독자로서는 그냥 그런 개념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아이템 하나를 획득한 느낌이긴 하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저자가 책의 논증 범위를 넘어서는 개념을 책 말미에 휙 하고 던져 놓으면, 독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책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저자의 다음 책은 또 광해군 이후의 조선을 다룰 것이 확실하니, '효치국가'라고 일단 내질러놓은 것을 다음 책에서 어떻게 수습하는지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계승범 선생님이라면 다음 책도 틀림 없이 재미있게 쓰실 것이고!! 아주그냥 독자를 들었나 놨다 한다.

 

  지금 보니 이거 이거, 저자의 상업적 촉이 보통이 아니시구만!

 

교정. 초판 1쇄
249쪽 5줄 : 얻었곡다 -> 얻었다
290쪽 각주1번 : 1935; ->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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