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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권내현, 너머북스, 2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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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권내현, 너머북스, 2021.)

Dog君 2022. 4. 20. 19:07

 

  흡사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떠올리게 하는 유유의 가출 사건을 두고 2021년 여름을 전후하여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나왔다. 고려대 역사교육과의 권내현과 부산대 한문학과의 강명관. (권내현은 2021년 6월 23일, 강명관은 2021년 8월 29일) 두 저자 모두 일단 이름만으로도 신뢰감을 준다. 그런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글을 썼다는 건데, 소속된 분과학문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연구상황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나 알았겠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니 독자 입장에서는 둘을 비교하면서 읽는 맛이 쏠쏠할 것이 분명하잖은가! (물론 서로 카운터를 내지르는 맛은 덜하지만...) 이런 꿀잼조합을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두 책을 모두 읽었다. 두번째는 권내현이 쓴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강명관과 권내현의 접근법은 차이가 있다. 권내현은 강명관과 달리 사건 그 자체의 재구성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고 그 대신 이 사건의 배경과 맥락을 드러내는데 집중했다. 권내현은 유유의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 특히 16세기의 상속 관행에 관해 이야기한다.

 

  조선의 양반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장남에게 집중시키는 대신 분할 상속을 선택하였다. 분할 상속을 통해 가계의 영속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여러 가계와 공유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결혼으로 서로 얽힌 가계들은 가깝게는 친족 의식을 멀게는 혈연적 유대감을 공유하였다. 한 개인은 부계, 모계 친족은 물론 배우자의 부계, 모계 친족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결합을 가능하게 했던 물질적 토대는 균분 상속이었다. 균분 상속은 한편으로 자녀들에게 분할된 재산이 결혼을 통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기도 했다.
  (...)
  양반 남성의 경우 자신들도 처가에서 온 상속분을 통해 재산이 늘어난 이상, 자신의 딸에게 상속을 차별할 명분이 없었다. 이러한 균분 상속의 관행에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져야 했다. 딸보다는 아들, 아들 가운데에서는 장남을 가계 계승자와 제사 주관자로 확고하게 인정하는 이념의 확산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부계 혈통의 영속을 염원했던 종법의 보편화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균분 상속으로 인한 모순의 심화였다. 그것은 균분 상속이 더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닌 재산의 감소를 초래하는 문제였다. 균분 상속은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바뀌어 나갔다. 줄어드는 경제력을 보전하고 부계를 중심으로 가계를 존속시키기 위한 새로운 상속 방식을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
  유유와 유연이 살았던 16세기 역시 대다수 양반의 재산 축소가 본격화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균분 상속의 관행 덕택에 오히려 결혼은 재산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별급을 통해 장남을 우대하기도 하였으나 종법은 아직 보편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유유 남매는 아버지에게 공평한 재산 분배를 기대했을 것이며, 그들의 배우자가 상속받는 재산에 관심을 가지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51~53쪽.)

 

  권내현에 따르면 유유의 가출과 귀향, 유연과 이지(이제)의 죽음 등 일련의 사건들은 장자상속 관행이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은 16세기 중후반에나 가능한 사건이었다. 이후의 조선 사회에서는 더이상 균분상속의 원칙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유연과 이지(이제)가 이 사건에서 그토록 쉽게 용의자로 몰릴 수 있었던 것은 차자와 사위(더 정확하게는 딸) 역시 상속권한을 가질 수 있었던 당대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권내현에게 이 사건은 균분상속 관행이 유지된 16세기 이전에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고 17세기나 혹은 그 이후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시대적 배경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다. 일단 여기서 강명관과 차이가 난다.

 

  이지의 처가 재산에 대한 욕심은 종법이 보편화하지 않았고 균분 상속의 관행이 유지되었던 16세기라는 시대 상황과 연관되어 었었다. 17세기 혹은 늦어도 18세기였다면 유연의 집안 역시 장남으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었을 것이다. 그 경우 유연 집안도 다른 가문들처럼 장남 유치를 이을 양자를 들이고 딸은 상속에서 차별하거나 아예 배제할 것이다. 가계 계승과 제사 주관 권한을 두고 백씨와 유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여지는 없게 되며, 모든 권한은 유치의 양자에게 넘어간다. 재산도 장남 유치와 그의 양자에게 많은 양이 상속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지의 부인 유씨는 아버지 유예원으로부터 소규모의 재산을 상속받거나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지는 자신의 부모로부터만 상속을 받을 것이며, 처가의 상속 향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구 처가의 제사에 참여할 일도 그다지 없다. 똑같은 일이 후대에 발생하였다면 이지는 아마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 (270~271쪽.)

 

  이러한 입장을 사건 그 자체의 재구성이라는 점을 기준으로 해서 보자면, 권내현은 사건의 배후에 관해서 당대의 인식에 비해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결론을 제시한다. 즉, 이지(이제)를 최종적인 배후로 보았단 당대의 결론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강명관이 당대에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했던 「이생송원록」의 입장을 상당히 수용하여 백씨 부인에게 혐의를 둔 것에 반해 권내현은 당대의 지배적인 결론을 받아들이고 「이생송원록」에 대해서는 다소 거리를 둔다.

 

  (...) 중요한 것은 흔개가 실제 이지의 노비였고, 춘수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춘수는 이 집안의 노비 이름을 알 정도로 이지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이생송원록」은 춘수의 자백이 허위임을 강변하지만 오히려 곳곳에서 이지와 채응규, 그리고 춘수가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 「이생송원록」은 서울과 대구에 유유의 친척과 친구, 노비가 많은데 이지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채응규가 이지와 같은 인물의 도움 없이 그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홀로 사건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이지가 유연에게 채응규의 존재를 알린 편지를 보낸 일과 채응규가 대구 유유의 본가로 바로 향하지 않고 서울 이지의 집을 먼저 방문한 사실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해 볼 수 있다. (183쪽.)

 

  김시양은 이항복이 이언관의 보복이 두려워 후서를 지었다고 했지만 그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 그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보탰다. 이언관이 보여 준 재판 기록에서 김귀영과 이산해를 대신에, 박홍구와 조인득을 대간으로 적시하였는데, 김귀영과 이산해는 당시 대신의 반열에 들지 못했고 박홍구와 조인득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이언관의 문서가 허위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시양은 후일 다른 사람이 이언관의 문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지적한 내용이 모두 수정되었다고 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문서가 소실된 것이 많자 이언관이 아버지를 위해 기록을 조작하였다고 보았다. 김시양은 이언관을 직접 만났고 해당 문서도 살펴보았다. 그가 이러한 내용을 남긴 이상 「이생송원록」의 내용 역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218~219쪽.)

 

  「이생송원록」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강명관과 달리) 백씨 부인에 대해서도 강하게 혐의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예컨대 강명관이 1차 사건 당시 백씨 부인의 행동에 대해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에 반해 권내현은 백씨 부인의 행동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는 듯 하다.

 

  그녀는 주로 유연의 말을 믿고 유유를 투옥했다가 행방불명되도록 만든 대구 부사의 조처를 신뢰하지 않았다. 백씨는 대구부의 상급 기관인 경상감영에 이 사건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 (109쪽.)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이지가 채응규를 내세워 진짜 유유에게 돌아갈 몫을 차지하게 하고 이를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질 계획을 세웠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채응규는 반드시 유유여야 하며 부인 백씨도 여기에 동조해야 한다. 백씨는 채응규가 나타났을 때 그의 진위를 적극적으로 가리지 않았고 그를 진짜로 받아들인 듯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더구나 채응규가 사라지자 시동생 유연이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고 고발하기까지 하였다.
  백씨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지만 그녀는 결과적으로 이지의 의도에 동조한 셈이었다. (...)
  이지가 욕심을 낸 재산은 가출한 처남 유유의 상속분으로 보인다. 유유는 다른 형제, 누이와 함께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며, 아버지의 특별한 유언이 없다면 승중자로서의 몫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유는 집을 나간 지 8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에 아버지가 죽었지만 상장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지는 유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 (206~208쪽.)

 

  이러한 차이는 최종 결론에까지 이어진다. 이 사건에서 유연과 이지(이제)가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하고 고문 끝에 사망한 것을 두고 강명관은 조선 사법제도의 가혹함을 비판한 반면 권내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사법제도의 가혹함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에서는 삼복제, 즉 세 차례 심리하고 국왕에게 아뢰어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방식을 이미 채택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삼심제와 유사한 방식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권응인은 이러한 제도적 절차가 미비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용을 신중하게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 것이다. 제도 이상으로 그 제도에 깃든 형옥에 대한 신중한 처리라는 정신을 잘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형옥의 신중한 처리에 대한 강조는 좀 더 시간이 지나 유연을 언급한 이익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유연 사건에 대한 평가를 남긴 다수의 인물은 공정하고 신중한 판결의 중요성에 공감하였다. 이 사건은 16세기 당대의 상속과 가족 갈등에 얽힌 사회 현상, 정치 세력 변동에 따른 판결의 번복이라는 정치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유연전」을 읽는 이들의 독법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신중한 재판을 통해 억울한 처분을 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246쪽.)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이처럼 결론이 달라지는 것은 두 저자의 방법론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명관이 주어진 사료를 최대한 치밀하게 해석해서 사건 그 자체에 대해 깊숙하게 파고든 것에 비해 권내현은 최대한 많은 사료를 방대하게 섭렵해서 사건의 배경과 맥락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최종 결론 역시 강명관은 사건 그 자체의 성격을 평가하는 데 주안점이 있고, 권내현은 그 사건이 무엇의 영향을 받아 무엇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말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앞서 강명관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라면 권내현처럼 쓸 것 같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또 하나의 이유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사학 분과에서 훈련받은 내 입장에서는 강명관의 결론이 아무래도 너무 좀 현재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다. 보편적 인권과 과학적 사법이 상식이 된 지금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사법제도의 불완전함을 비판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지(이제)를 배후로 지목한 권내현의 서술에도 그의 범행동기에 관해서는 완전히 납득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지(이제)를 범행의 배후로 지목하기 위해서는 처가(유유의 집안)에서 유유가 사라졌을 때 상속의 비율이 크게 달라지는 동시에 딸(사위)에 대한 상속분이 유의미할 정도로 커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정도의 범행을 기획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지(이제)와 처가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친밀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당시의 상속관행에서 딸(사위) 역시 상속권에 대한 발언권이 있었다는 점이나 이지(이제)의 종친으로서의 지위가 자기 대에서 끝난다는 점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황증거이지 직접증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저작의 차이를 결코 우열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수백 년 전의 사건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누가 더 낫니 못하니를 두고 다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차이가 분과학문의 차이 때문인지 각자 문제의식의 차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그저 틀린그림찾기 하는 것처럼 양자의 차이를 발견하고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혹시라도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만약 내가 저자라면 어떤 입장으로 이 사건을 서술할지 생각을 해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두 저자가 달달한 과자랑 주스 앞에 놓고 가볍게 주고 받으며 대담 같은 것을 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미시사나 신문화사에 밝은 서양사 연구자가 사회를 맡으면 금상첨화.)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팩트 싸움이 아니라 두 사람의 차이가 왜 때문에 생겨난건지 호의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독자로서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아니 근데 정말, 이렇게 재미있는 짝이 있는데 책이 출간된지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서평이 안 보이는 걸까.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랑 묶으면 서평이 아주 그냥 달달한 꾸르잼일 거 같은데 말이다.


교정. 제1판 1쇄
103쪽 6줄 : 친구 들과의 -> 친구들과의
315쪽 밑에서 9줄 : 직면하기 싶다 -> 직면하기 쉽다
323쪽 밑에서 5줄 : 심륭 유의 -> 심륭 류의
제1판 1쇄는 202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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