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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오래된 역사병 (김인희, 푸른역사,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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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오래된 역사병 (김인희, 푸른역사, 2017.)

Dog君 2022. 4. 20. 20:29

 

  고대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밑줄 그으며 사실관계부터 배운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이 책에 따르면 치우는 애초 역사적 실체라기보다는 중국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비롯한 것 같다. 또한 치우를 동이족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그 학문적 연원이 의심스러운 것이며, 치우의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먀오족을 포섭하려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관의 일환이라는 것도 배웠다.

 

  그렇다면 결국 치우를 상징으로 내세운 한국의 사이비 역사학은 기실 중국의 애국주의 역사관의 파생물이자 공생관계에 있는 셈이다.

 

  (...) 서주는 무기와 예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품인 청동 원료를 확보하고, 제후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초나라를 덕을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정벌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여형〉편에 황제가 치우를 정벌한 이야기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치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여형〉편은 주 소왕과 초나라의 대립을 모티브로 하여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소왕과 초나라의 전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화전설화하여 황제는 정의를 상징하고 치우는 사악함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춘추시기 문헌인 《상서·여형》편에 기록되었다. (...) (58쪽.)

 

  춘추시대에 먼저 패권을 장악한 것은 제나라였고 뒤를 이어 진나라가 장악했으며 이후 초나라도 패권을 장악했다. 초나라는 본래 중원의 화하와는 성격이 다른 남방의 만이였다. 초나라가 세력을 강화한 후에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하여 북벌에 나서자 중원의 여러 나라는 이를 막기 위해 연맹했다. 이러한 상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신화전설의 형태로 전승되었고 역사작가들에 의해 황제와 치우의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중원의 진나라와 남방의 초나라가 벌인 100년 전쟁은 기주대전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83~84쪽.)

 

  송나라 이전의 치우는 비록 악신으로 부정시 되었지만 전쟁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에는 전쟁신의 자리마저 관우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오롯이 악신 또는 악인으로만 남게 되었다.
  (...)
  송나라 이후 문학작품에서 치우는 송나라를 침략한 이민족, 정권에 대항하는 반란자, 악행을 저지르는 신하, 품성이 흉악한 사람으로 묘사되며 심지어는 천궁에서 견우와 전쟁을 하기도 하고, 색을 밝히는 질이 낮은 사람으로 표현된다. (...)
  이 시기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치우는 더이상 신화전설상의 인물이거나 역사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치우는 신화 속에서 황제와 전쟁을 하는 것을 벗어나 현실 세계의 이민족 침략자, 부패한 신하,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게 된다. 치우는 신화와 역사의 옷을 벗고 세속화되어 인간계의 진정한 악인이 되었다. (128~129쪽.)

 

  춘추시대 문헌인 《상서·여형》편 이래로 치우는 묘민 또는 삼묘의 수장이라고 인식되어왔다. 근대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치우가 묘민을 이끌고 한족과 대치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갑자기 쉬쉬셩徐旭生은 1943년 출판한 《중국 고사의 전설시대中國古史的傳說時代》에서 치우가 동이족이라고 주장한다. (...)
  쉬쉬셩은 치우가 묘민의 수장이라는 종래 학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치우가 동이족임을 주장하고 있다. 춘추시대 문헌인 《상서》부터 고문헌상에 치우는 묘민의 수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쉬쉬셩은 이를 무시한 채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149~150쪽.)

 

  (...) 20세기 90년대에 염황열이 시작된 것은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위기감을 느낀 중국공산당이 흩어진 민심을 규합하기 위한 방편으로 1994년 추진한 애국주의교육의 일환이었다. 중국 애국주의교육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민족분열과 국가분열에 반대하며 각 민족의 단결과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고 보호한다"는 것으로 황제와 염제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의 화인은 물론 중국 내 소수민족을 결집시켜 중화민족의 틀 속에서 포용하려 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상상과는 달리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앞에서 먀오족 장군 천징이 줘루현 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에게도 강한 불만을 표시했으며 줘루현에 중화삼조당이 건립된 것은 먀오족의 건의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
  (...) 중화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영토 안에 포함된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개념인데 반하여 염황 자손은 국가를 넘어 문화적 정통성을 지닌 한족 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1990년대 이후 염황열풍으로 등장한 줘루현의 황제사 건립은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결국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 삼조문화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삼조문화론은 염황 후예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중국 내 반공산당 세력을 제어하고 세계 각지의 화인을 규합하는 과정에 등장한 한족중심주의에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반기를 들자 이를 정합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218~219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먀오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선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동이족인 치우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삼묘가 되었으며 자신들은 치우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먀오족간사》에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었다는 것은 중국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 중국 내에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 학자들의 경우에도 대부분 현재 먀오족이 치우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필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1999년 베이징에 있는 한 대학에서 《한·먀오족韓·苗族 창세신화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를 비교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은 바로 중국 학계의 위와 같은 학설이었다. 당시 지도교수인 마쉐량馬學良 선생님은 논문의 내용을 듣고 대노하셨다. "만약 네 주장이 맞다면 동아시아사를 다시 써야 하는 중대한 일이야." 필자는 지도교수의 명령에 따라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스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논문발표회를 진행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네 논문을 보고 사람들이 널 비판할 것이고 다시는 너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학문의 발전이다." (...)
  이후에도 동이족과 치우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나 쉽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007년에는 중국 고문헌 중 동이족 관련 신화만을 골라 편역한 《동이신화 태양을 쏘다》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역시 치우를 동이족 신으로 보고 치우와 관련된 고문헌자료를 번역 소개했다. 같은 해 발표한 〈두개변형과 무의 통천의식〉이란 논문에서도 쉬쉬셩의 견해를 따라 치우를 동이족으로 보고 치우가 산둥성 동이족의 습속인 편두와 구함구 습속口含球習俗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학문의 길은 부끄러운 과거의 행적으로 발견하고 수정하는 고단한 수행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이 견고하던 치우 동이족설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이후이다. "먀오족이 산둥성 일대에서 활동한 동이족이었으며 이후 후베이성 일대에서 활동한 묘민"이라는 먀오족 학자들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필자는 창강 중류의 신석기부터 초나라에 이르는 문헌자료와 고고발굴보고서를 섭렵했다. 그러나 현재의 먀오족과 창강 중류 고대문화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산둥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동이적 관련 연구를 진행했고 결국 기존 중국 학계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 (259~261쪽.)

 

  (...) 니체의 말처럼 역사의 과잉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하고 단순화시킨다. 역사로부터 오는 피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역사의 과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야 한다.
  (...) 중국의 민족주의 강화는 먀오족과 한국의 민족주의 강화로 곧바로 이어졌다. 먀오족의 경우 일부 젊은 지식인을 제외하고 전체 먀오족 지식인 사회가 치우 조상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의 경우 주류학계에서는 치우는 재야의 무제라 하여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눈에 명확히 보이는 부조리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민족주의는 독버섯처럼 퍼져 동아시아의 갈등요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민족주의는 위험수위를 넘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정치가들이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저항적 성격의 근대 민족주의와 달리 최근 중국의 민족주의는 공산당이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였으며, 중화사상과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근대 민족주의와 구분하여 이를 신민족주의라 명명할 수 있다. 신민족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국, 각 민족의 지식인들이 먼저 자국 내의 역사 왜곡에 대해 지적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연구경향을 보면 타국의 논리상 허점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도 자국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침묵했다. 이제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상대방을 향해 비추던 '비판의 거울'을 자신을 향해 비춰야 할 때가 되었다. (285~286쪽.)

 

ps. 이덕일은 이런 망신을 당했다지만, 글쎄, 어쩌면 이덕일은 자기가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아닐까.

 

  (...) 이덕일은 기존의 역사학계 학자들에 대해 "엄밀한 사료 검증에 의한 역사학적 방법론은 사라지고 이미 내린 결론에 꿰어 맞추는 비학문적 희망사항만 나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나열한 문제점으로 보아 이제 위와 같은 날선 비판은 자신을 향해서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덕일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치우가 우리 민족의 조상임을 주장한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치우천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중국 치우학회 회원이라는 사람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왔는지 캐묻더니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다.' 우리는 툭하면 위서다 뭐다 해서 부인하려 애쓰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덕일은 중국 치우학회 회원이라고 했는데 중국에는 치우학회가 없다. 아마 '줘루 중화염황치삼조문화연구회涿鹿中華黃蚩三祖文化硏究會'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학회는 중화삼조당의 건립에 이론을 제공하고 염제, 황제, 치우 중심으로 중화주의를 선양하기 위해 구성한 학회이다. 이와 같은 학회의 사람이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치우가 만주족의 조상이라는 설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고, 치우를 먀오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중화삼조당에 치우를 모신 것으로 보아 '만주족'은 통역자가 먀오족을 잘못 말했거나 또는 이덕일의 희망이 과하여 잘못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위와 같이 말한 속내는 아마도 "당신들도 치우의 후손이니 당신들 역시 중화민족이오"였을 것이다. (247~248쪽.)

 

교정. 초판 1쇄

202쪽 2줄 : 중국 돈 20만 원 -> 중국 돈 20만 위안

244쪽 밑에서5줄 : 캐캐묻은 -> 케케묵은

260쪽 10줄 : 곧 바로 -> 곧바로

280쪽 8줄 : 한참 ->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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