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문학동네, 2022.) 본문
2019년, 런던에서 머물던 나의 주요한 일요일 일정은 교회에 갔다가 H마트에 들러 일주일 먹을 식료품을 사오는 것이었다. 라면 두어개에 계란, 그리고 밑반찬 몇 가지를 사오곤 했고, 가끔 내키면 데우기만 하면 되는 닭강정이나 탕수육도 사왔던 것 같다. 하지만 체류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한국 음식에 대해 대단히 특별한 애착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익숙한 것을 계속 하고 싶었던 내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평일에는 하루 세끼 중 두끼는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때웠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음식을 통해 특별한 애착을 표현하곤 한다. 한국전쟁 통에 강제징집당한 후 영영 만나지 못한 자식에 대한 한의 표현은 종종 '따시게 밥이라도 한 그릇 먹여 보낼걸'이고 가족을 뜻하는 말 중 하나는 '같이 밥 먹는 입들[식구]'인걸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 자우너도 비슷하다. 그에게 음식은 떠나간 어머니와 자신을 감정적으로 이어주는 물리적 실체이자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언어도 그렇고 생활습관도 그렇고, 더할 것 없는 미국인인 그가 오직 밥상 앞에서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두드러진다는 건 참 묘한 일이다.
뭐 사실 표지 앞뒤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추천사만큼이나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지만, 글쎄, 그래도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물론 둘러앉아봐야 결국 모든 대화는 '결혼…'으로 이어지겠지만) 한번쯤 들춰볼만한 책이었다.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나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서 한국 문화를 접했다. 엄마는 내게 직접 요리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한국인들은 똑 떨어지는 계량법 대신 "참기름은 엄마가 해주는 음식맛이 날 때까지 넣어라" 같은 아리송한 말로 설명하길 좋아한다) 내가 완벽한 한국인 식성을 갖도록 나를 키웠다. (...) 김치는 알맞게 익어서 적당히 새콤한 맛이 나야 했고, 삼겹살은 바짝 구운 것이어야 했으며, 찌개나 전골은 입안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 차라리 안 먹느니만 못했다. 한 주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만들어둔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었고, 우리는 그날그날 당기는 음식을 바로바로 만들어 먹었다. 만약 3주 동안 김치찌개 말고는 다른 음식이 생각나지 않으면, 딴 음식이 생각날 때까지 허구헌 날 김치찌개만 만들어 먹었다. 우리는 철철이 제철 음식을 해 먹었고, 꼬박꼬박 명절음식을 챙겨먹었다.
(...)
음식은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 내 입맛에 꼭 맞춰 점심 도시락을 싸주거나 밥상을 차려줄 때만큼은 엄마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모르지만, H마트에만 가면 어쩐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이런저런 농산물을 어루만지면서 참외니 단무지니 하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친숙한 만화 그림이 그려진 형형색색의 반짝이 봉지에 담긴 과자들로 쇼핑 카트를 채운다. 그러면서 엄마가 죠리퐁 봉지에 든 작은 플라스틱 카드로 숟가락을 만들어 캐러멜맛 뻥튀기 퍼먹는 법을 가르쳐주고, 나는 아니나다를까 그걸 셔츠 위로 왜그르르 쏟아버려 자동차를 온통 엉망으로 만들었던 때를 떠올린다. 엄마가 어릴 때 즐겨 먹었다던 과자들과, 그때의 나만큼 어렸을 적에 엄마는 어땠을지 상상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기억도. 그때 나는 엄마라는 사람을 온전히 그려내기 위해, 엄마가 한 일이라면 뭐든지 다 좋아하고 싶었더랬다. (10~12쪽.)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만의 방식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으로 만회했다. (...)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고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43~44쪽.)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랬다. (...)
비록 우리가 좋게 헤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큰 상자가 내게 날아와,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절대 멀리 떠나 있지 않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상자에는 달달한 쌀강정이며 스물네 팩으로 낱개 포장된 김과 즉석밥, 새우깡과 빼빼로, 지긋지긋한 구내식당에 가지 않고 몇 주는 버틸 수 있게 해줄 신라면컵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카우보이 부츠는 부모님이 멕시코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와 음식과 함께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그걸 신어보는데 웬일인지 가죽이 이미 부드럽게 길들여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그걸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신고 다녔다는 거다. 엄마는 양말을 두 겹 신은 발로 그걸 신고 매일 한 시간씩 걸어다니면서 뻣뻣한 신발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자기 발바닥으로 평평한 밑창까지 모양을 잡아놓았다. 행여 내가 처음 그걸 신을 때 불편할까봐 말이다. (120~121쪽.)
다음날 아침 아주머니는 아침식사로 삶은 계란을 준비했다. 아주머니는 계란 꼭대기 부분만 껍질을 벗기고 엄마가 숟가락으로 떠먹게 했다. (...) 거의 생계란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정말 그렇게 드셔도 괜찮을까요?" 내가 물었다.
(...)
아주머니는 (...)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에서는 다들 이렇게 먹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엄마는 꼭 말 잘 듣는 반려동물처럼 아주머니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가 나를 편드는 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뿌옇게 된 자기 계란만 양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184~185쪽.)
묽게 갈아놓은 액체는 고운 우윳빛이 났다. 나는 중불에서 그걸 나무 숟가락으로 저어가며 끓였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빨리 걸쭉해지지 않아 물을 너무 많이 부은 게 아닌가 하고 조바심이 났지만, 갈수록 점점 걸쭉해졌다. 묽기가 저지방 우유에서 땅콩 잼 수준으로 바뀌고부터는 또 물을 너무 적게 넣은게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됐다. 일단 불을 가장 약하게 하고 계속해서 저었다. 망치 여사의 잣죽과 비슷한 묽기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냄비가 치지직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불을 끄고 소금을 넣은 다음 죽을 작은 볼에 부었다.
작은 접시에는 총각김치를 썰어 담고 김칫국물을 한 국자 떠서 그 위에 부었다. 죽을 한입 떠서 목구멍으로 넘기는데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로 고소하고 부드러워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나는 몇 숟가락 더 떠먹고 나서 아삭하고 매콤새콤한 김치로 입가심을 했다. 아주머니가 요리법을 꽁꽁 숨겨 내겐 오묘해 보이기만 하던 음식을 정복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319쪽.)
ps. 하지만 나는 결국 Japanese Breakfast의 앨범을 사고야 말았다. 그나마도 신품은 죄다 품절이라 중고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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