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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황정은, 창비, 2021.)

Dog君 2022. 5. 7. 20:31

 

  어디서 황정은을 두고 리얼리즘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 같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나도 모르는 나는 리얼리즘이란 대체로 세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real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리얼리즘에서 보여주는 세상이란 황폐하고 희망 없는 공간이기 마련이고, 책/화면/캔버스 속으로 최대한 비집고 들어가도 결국에는 지금 내가 속한 세상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세상이 또다시 펼쳐지는 것 같다. 평소에 느끼는 것을 그대로 또 느끼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다 읽고/보고 나면 어딘지 모를 불편함과 막막함만 남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현실(real)인 것을 어쩌겠나 싶다. 역사에서 보는 세상이 대체로 그러하다. 언제나 현실은 악독하고 냉정하다. 때로는 보통 사람조차도 다시 없을 악마가 되곤 한다. '악의 평범성'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런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예술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건 결국 현실부정 내지는 잠깐 동안의 현실도피에 불과하겠지.

 

  다만 나는 그게 우리 현실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이란 대저 황폐하고 희망 없는 곳이지만 세상이 오로지 그러한 곳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나 하나라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가면, 내가 사는 딱 그만큼의 공간만큼이라도 사람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바꾸고 말겠다는 20대 초반의 야심이 진작에 꺾인 이후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이 이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황정은의 글을 좋아한다. 황정은의 글을 읽으면 분명히 '선의 평범성'이라는 것도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백의 그림자'에 나오는 오무사 할아버지가 꼭 그랬던 것처럼, 그나마 세상이 이렇게라도 버텨갈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눈에 안 띄는 어딘가에서 행해지는 평범한 선 때문일 거라고 믿는다.

 

  황정은의 글을 읽으며 소설과와 역사학자의 임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설가나 역사학자나 모두 세상 사는 일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활자로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자들이다. 어떤 사실을 끄집어내어 어떻게 해석하여 어떤 활자로 표현할 것인가. (나는 활자화하는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에 그 소설가와 역사학자의 지향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줄곧 생각하면서 한 공간에 머무는 것은 불면과 걱정을 늘리는 일이기도 했다. 불면과 걱정으로 마음과 생각이 자꾸 졸아들 무렵, 황정아 선생이 쓴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 황정아 선생은 한국의 방역 사례를 분석하면서 "고양되고 응축된 민주주의의 경험이 방역에 필요한 유대와 책임을 낳았"다고 말한다. 그는 촛불시위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경험한 "고강도" 고양감을 "우애友愛"로 해석하고, 이 우애가 2020년 상반기 전염병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배려와 책임, 그리고 돌봄이라는 더 부드러운 형식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극 글을 읽으면서, 단념하지 않고 생각을 계속하는 일과 사랑을 계속할 수 있는 마음을 생각했다.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이 걱정의 바탕은 자기가 남에게 병을 옮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우애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조금 더 믿고 있다. 남이 고통을 겪을까 염려하는 마음. 그게 이미 있다고 믿는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각자의 외부에서 발생한 거대한 고통과 이미 접촉한 적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고도 경이로운 공동의 경험을 통해 이미 배운 적이 있다. 2014년과 2016년 사이에.
  그래도, 여전히. (37~38쪽.)

 

  소설을 쓰는 나는 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고 그들 각자의 노동 조건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이민사나 가족사, 그날을 전후로 그가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 등등을 생각해볼 테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소설을 쓰는 내가 아니니까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이유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그저 게으름을 생각할 뿐이다.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 (72쪽.)

 

  나는 화면으로 책을 보지 않는다. 태블릿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글자를 보는 일은 내게 책을 읽는 일이라기보다는 눈을 태우는 일에 가깝다. 빛을 반사하고 흡수한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고 빛 자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무래도 꺼림직하다. 터치스크린으로 보는 글자들은 종이책으로 읽는 글자들보다 눈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집중해서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난 뒤에는 시신경을 무언가로 꼭 졸라맨 것처럼 눈 속이 뜨겁고 뻑뻑해 잠을 설치곤 한다. 이런 경험을 몇번 한 뒤로는 스마트폰이든 태블릿 컴퓨터든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어차피 거의 매일 화면을 바라보며 원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여섯시간이 넘는 화면 응시다. 내 시세포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을 잘 관리하며 사용해야 한다. 언제고 시력을 잃는다면 전자책의 읽어주기 기능이 내게 매우 유용해질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화면으로 보는 전자책을 독서 경험에서 멀리 밀어두었다. (91~92쪽.)

 

교정. 초판 2쇄

143~146쪽 : 표4 -> 표사表辭 (4페이지에 걸쳐 '표4라'는 표현이 나온다. 영어 표현 중에 '표지'의 뜻으로 'fourth cover'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표지에 실린 추천사를 의미한다면 '표사表辭'가 맞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출판사가 창비니까 내가 틀렸을 확률이 더 높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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