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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박광홍, 오월의봄,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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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박광홍, 오월의봄, 2022.)

Dog君 2022. 11. 6. 15:02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 군인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당대 일본 사회의 군사주의를 더듬어 본 책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본디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지만, 2차 대전(특히 말기)의 일본군은 지금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베니어 합판으로 만든 조악한 보트 '신요'나 내구도가 종이비행기 수준의 전투기 '제로센'으로 벌인 가미카제 같은 것 말이죠. 우리는 흔히 가미카제가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쉽게 정리하고 넘어가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식민지를 포함해서 당시 일본 인구가 1억은 족히 되었을텐데, 그 정도 규모의 사회공동체에서 어째서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관철된 것일까요. 동아시아에서 그나마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했다고 하는 일본 사회가 속절없이 그런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세상의 그 어떤 사회도 그런 광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뜻인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광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이유를 꼭 알아야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80년 가까이 된 지금 이 책을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겠지요. (그에 관해서는 방송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으니 여기서는 일단 각설하고.)

 

  이 책에서 탕수육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3명 중 히로토 아키라와 기시 우이치가 자신의 전쟁 경험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전쟁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시에도 전쟁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히로토 아키라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는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도 보통의 일본군과 별 다를 것 없는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멋쩍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전쟁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고 지금도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호의적이지만 한국인인 저자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기시 우이치는, 자신의 적극적인 전쟁경험을 지금 와서 굳이 들춰내는 것이 꽤나 어색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 같습니다. 저는 일본인도 아니고 전쟁 세대도 아니지만, 그냥 감히 이유를 짐작하자면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이와 매우 비슷한 경험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도 소개했던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입니다. 포로감시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최영우 역시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저는 최영우의 마음이 무척 복잡했으리라고 썼습니다만 그가 그것을 정리하여 손자(최양현)에게 굳이 넘겨준 이유에 관해서는 혼란스럽다고 했죠. 이 글에 등장하는 히로토 아키라와 기시 우이치 역시,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을 왜 이제와서 낯선 이방인에게 들려준 것인지 쉬이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문을 갖고 책을 읽어나가다가 책 말미에서 아래 부분을 읽고 약간 힌트를 얻은 느낌입니다. 젊은 날에 겪었던 전쟁과 광기의 기억은 가족에게 직접 말하기는 멋쩍은 것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통해서는 꼭 후대에 전달되어야 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그 세 사람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로토 씨는 사별한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손자에게도 자신의 전쟁 체험에 대해 일절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전쟁 체험이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잘라 말했다. 히로토 씨는 어째서 자신의 전쟁 체험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이 살아냈던 제국 체제와 전쟁의 그림자가 가족들은 물론 후세 일본인들에게 공감받기 어렵다고 느낀 것일까. 실제로 한국인인 필자가 인터뷰 요청을 하기 전까지 그 어떤 일본인도 자신의 전쟁 체험을 듣기 위해 찾아온 적이 없었다고 했다. 시대의 망각과 무관심 아래서 히로토 씨는 입을 열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히로토 씨는 인터뷰 도중 총리대신의 명의로 받은 참전증서와 금장 회중시계를 꺼내 보여주었다.
  (...)
  가족들에게조차 말할 기회가 없었던 전쟁 체험, 그리고 국가에서 '선거 대책'으로 지급한 금시계. 떨떠름한 자세로 과거를 마주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국민에게 죽음을 강요했던 집합의식이 존재했다는 사실, 일본 사회는 여기에 대해 그 어떤 진지한 성찰도 없었다. 그러니 그 아래서 동요하고 괴로워하던 개인의 내면에 대한 문제는 더더욱 주목받을 수 없었다. 국가는 선거철을 맞아 이들의 참전을 '애국'과 '보훈'으로, '나라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선전하며 자신들의 선거에 이용했다. 전쟁을 체험했던 개인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전쟁 담론은 결국 정치적이고 정략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100세가 넘은 히로토 씨는 전우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했다. 곧 그의 기억도 기록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쟁 체험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면 결국 그 뒤에는 특정한 의도에 따른 미사여구만이 남게 될 것이다. (214~216쪽.)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곧 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란 무엇인지, 평화의 가치가 어째서 소중한 것인지를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요? 풍화되고 잊혀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미래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작업입니다." (219~220쪽, 코타니 히로히코와 함께 비행장 복원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우에타니 우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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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군대문화가 한국군에 스며들어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감정적인 반일과 혐일이 한국 대중들 사이에 유행하곤 하는 현실이 무색하게, 일본군의 정신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은 부족해 보인다. 간단히 '정신주의'라는 네 글자로 제국 일본으로부터 유래한 의식 영역의 그림자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본의 군대문화를 정신주의라고 부른다면, 그 정신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며, 일본군 조직에 속했던 개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집합의식을 수용하기에 이른 것일까. 우리는 그때의 일본인들에 대해, 일본의 정신사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일부 양질의 번역서가 출판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서 거들의 생애를 관통하는 제대로 된 질적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던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는 한국군의 정신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군의 정신론이 어떻게 빚어진 것이며 그것이 실제 일본군 장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현지에서 직접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19~20쪽.)

 

  (...) 조국의 위기 앞에서 소년 기시 우이치는 자신이 전장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위해 요카렌 지원을 선택한 기시 씨에게 국체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은 '죽음의 운명공동체'였다.
  '죽음의 운명공동체'는 역사사회학자 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內靖가 저서 《총력전 체제》(2015)에서 논한 개념이다. 야마노우치는 근대국가가 출범한 이후 전쟁 규모가 확대되었고 동시에 전쟁의 양상 역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총력전'으로 변화하게 된 사실을 강조한다. (...)
  총력전 시대의 도래에 따라, 전쟁은 "좁은 의미의 전선 전투"를 넘어 "국내 일상생활 전 영역의 동원"을 전제로 하게 되었다. 전쟁의 의미와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
  전쟁에 대한 전 국민 규모의 동원이 전제됨에 따라, 참정권이나 의무를 지닌 존재로 정의되던 국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고 야마노우치는 논한다. 야마노우치에 따르면, "국민이라는 명칭"은 "적국 및 적국에 속하는 모든 사람과 구별되며, 그들과는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자, 전쟁에서 죽음의 운명을 공유하는 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렇듯 "운명공동체"로서의 정념이 구축됨에 따라, 내부에서 그 정체성을 공유할 수 없는 자는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비국민"으로 배척되었다.
  야마노우치는 "죽음의 운명적 평등성을 전제로 하는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세속 생활까지 지배하는 "사실상의 종교"가 됐다고 본다. 이 종교는 "정치적 권리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요청을 훨씬 뛰어넘는 감정적 동원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 (72~73쪽.)

 

  특공 도입을 주장하던 쿠로시마를 향해 일부 상식적인 군령부 참모들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쿠로시마의 특공에 의문을 표했던 토리스 켄노스케鳥巢健之助 중좌는 전후의 해군반성회에서 당시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이 병기(인간어뢰)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 6함대로서 거절합니다'라고 했습니다만, 쿠로시마 씨가 열화와 같이 화를 내더군요. 이 비상시에 무엇을 못 할쏘냐고, 국적國賊(역적)이라고. 국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공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해군 군령부 내부의 자정 능력으느 마비됐고, 광기에 찬 특공 병기 투입안이 쇼와 천황에게 곧이곧대로 보고됐다.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특공대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이 계획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
  이렇듯 특공은 이제 전 국민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자 의무가 됐다. '일억총옥쇄' '일억총특공'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누군가가 '항복'을 입에 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공은 적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을 넘어 전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도구가 됐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은 그렇게 지탱됐고 무의미한 희생은 늘어만 갔다. (115~116쪽.)

 

  출격하는 특공대원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 크나큰 심적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 고뇌와 고통에도 많은 특공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집단의식을 개인의식이 거스를 수 없었던 현실을 드러낸다.
  기시 씨는 '일단 명령을 받게 되면 절대 싫다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일본 군인들의 심리를 '교육'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그 교육을 통해 세뇌된 그들은 결코 '옥쇄'나 '특공'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
  기시 씨는 특공의 지원이 형식적인 것이었다며 지원하기 위해 손을 들지 않는 것은 주변의 분위기에 비추어 '이상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특공대에 지원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기지로 돌아온 특공대원들은 자신의 생환을 기뻐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요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 국민으로서, 군인으로서 의무를 완수하는 데 실패한 개인일 뿐이었다. (136~137쪽.)

 

  기시 씨는 패전 후 일본의 부흥에 천황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시 씨는 극한 상황에까지 몰린 전쟁 체험 속에서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리적인 동요를 느꼈다. 그러한 비극적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 중 한 사람이 천황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기시 씨의 생각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다면 패전을 했음에도 천황에 대한 기시 씨의 평가가 변하지 않으느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제국 시대에 형성된 국체 관념의 영향이며, 다른 하나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부정하는 판단이다.
  (...)
  기시 씨는 자신의 비참한 전쟁 체험이 도조 히데키 등 육군세력의 독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폐하"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기시 씨와 그의 전우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이 천황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니 과거의 전쟁을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국 시대에 형성되었던 천황관을 변함없이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3~197쪽.)

 

  전범재판을 앞두고서, 제2복원성은 '천황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해군) 중앙부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현지 사령관 정도로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즉 천황의 전쟁책임이 연합군에 의해 문책당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과 바로 직결된 해군 지도부 인사들의 책임이 부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
  제37대 총리대신을 지낸 최후의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米內光政는 천황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할 필요성에 대해 맥아더 사령부에 적극적으로 타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이는 맥아더나 그의 참모들과 접촉할 때면 천황의 존재가 '일본에서의 점령 정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요나이의 설득에 수긍했고, 천황이 재판에 넘겨지면 일본을 통치하는 자신들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어제의 적들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
  전쟁을 향해 폭주하는 육군,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는 해군, 그리고 실권 없이 무력하며 또한 그렇기에 전쟁책임에서 무결해 보이는 천황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202~203쪽.)

 

교정. 초판 1쇄

17쪽 11줄 : 설명한 순 없다 -> 설명할 수 없다

28쪽 밑에서 3줄 : 타계할 -> 타개할

212쪽 각주 : 쇼와 순난자 -> 쇼와 수난자

229쪽 밑에서 5줄 : 사라지지는 ->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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