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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나인호, 역사비평사,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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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나인호, 역사비평사, 2019.)

Dog君 2023. 1. 7. 11:36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인종주의의 근대성과 체계성입니다. 인종주의가 단지 비합리적이고 일탈적인 증오심에만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래로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온 서구적 근대의 기반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서구가 달성한 근대성과 인종주의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는 지적이죠.

 

  물론 우리와 다른 인종, 예컨대 유대인이나 동아시아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나 편견이야 한참 오래 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는 거기에 온갖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덧붙으면서 타 인종에 대한 차별과 증오를 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2022년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이성과 합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종주의의 위험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닌 셈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회 도처에서 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인종주의가 꽤 다양한 수원水源으로부터 발원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인종주의는 흔히 비서구에 대한 서구인의 우월감이나 문명화 사명white man's burden 정도로 설명되곤 하지만 인종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종주의의 밑바탕에는 비서구의 우월성에 대한 인정과 두려움이 깔려 있기도 합니다. 황화론 같은 것이 대표적이지요. 이 때문에 인종주의는 무척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침투하곤 합니다. 혈통이나 가문이 아니라 재능과 지성을 중시한 프랜시스 골턴의 인종주의에서는 능력주의의 모습이 보이고, 인종주의가 평화주의 운동과 결합하기도 한다는 언급에서는 인종주의의 변화무쌍함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놀랍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모두 읽고 나면 독자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인종주의가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체계적인 (...) 이데올로기"(9쪽.)라고 부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타 인종에 대한 혐오라는 세계관이 이미 확립된 상태에서 그것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되는 것이 '인종주의적 XX학'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인종주의가 잘 정립된 학문적 기반을 가진 이데올로기라면 그 학문적 근거를 반박하는 것만으로도 인종주의는 힘을 잃어야 마땅하겠죠. 하지만 인종주의에 반박할 수 있는 '과학적', '합리적' 근거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음에도 여전히 타 인종에 대한 증오가 세계 도처에서 창궐하는 것을 보면, 인종주의의 기반에는 단지 근대적인 학문체계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자의 입장, 좀 더 정확히는 탕수육의 입장에서 느끼는 또 하나의 아쉬움은 이 책의 범위입니다. 인종주의의 계보를 말할 때, 탕수육 개인적으로는 홀로코스트 이전보다는 이후에 좀 더 흥미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반유대주의'와 '아시아(를 비롯한 트리컨티넨탈에 대한 일련의)담론'을 '인종주의'라는 범주로 모두 포괄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양자를 동일한 인종주의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유럽 사회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반성을 거듭하지만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해서는 그만한 반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독일을 과거사 반성의 이상형으로 꼽곤 하지만, 독일이 유대인이 아닌 아프리카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그만한 반성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혹자는 이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식민지배에 대해 전후 유럽이 보여준 반성의 차이는 그것이 유럽 내부(같은 유럽인)를 향했는가, 유럽 외부(아시아·아프리카)를 향했는가의 차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걸 어디서 읽었는지 누가 한 말인지 도통 기억이 안 나네요;;) 작금의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인종주의는 홀로코스트를 반성한 이후에조차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바로 그 인종주의이기에, 그에 대한 분석과 대답도 꼭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만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 어쩐지 좀 비겁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독자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가 작금의 인종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직접적인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역사 속에서 그 가능성이라도 모색하고 싶은 것이 독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쩌면 인종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종주의의 계보를 훑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인종주의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비합리적이고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진 대표적인 근대사상 혹은 체계적인 근대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모스(George Mosse)가 적절하게 지적했다시피 인종주의는 광기의 우발적인 표출이나 편견의 산발적인 표현, 혹은 단순히 억압의 메타포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독특한 구조와 담론 양식을 지닌 완전히 발달된 근대적 사상체계이다. 인종주의는 과학에 대한 믿음, 근대적 철학과 종교사상, 시민계급의 도덕, 민족주의 등 서양의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주류 사조와 결합되어 있으며, 근대 서양인들의 경험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지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중심적 현상이다. (...)

 

  사상사적으로 볼 때 인종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중심에 고유의 역사관, 즉 인종사관 및 인종의 역사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인종주의자들은 '인종' 이념으로써 현실을 설명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공포를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인종주의자들의 담론과 행위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한 역사진행 과정에 대한 설명과 해석에 준거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진행 과정에 대한 해석을 역사관이라 부르며, 그중 특별히 체계적인 것을 역사철학이라 한다. (...) 인종주의자는 역사로부터 주장의 전거를, 도덕적 정당성을, 나아가 행동의 지침을 얻는다. (9~10쪽.)

 

  (...) 인종주의에는 시간적 긴장 속에서 타자를 자신에게 교화시키거나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 담론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유대인'은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다. 이러한 타자는 단지 배제와 근절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중세의 종교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게 아무리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어도 특별히 사악한 '이교도'인 유대인들의 개종과 동화 가능성만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나마 열어놓았다. (...)
  더 나아가 인종주의는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듯이 보이는 보편적 인류 개념의 맥락 속에서 타자를 인간 이하로 규정하는 새로운 타자 부정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
  이와 같이 인종주의에서 타자는 결코 교화와 문화적인 동화의 대상이 아니다. '우월함과 열등함'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타자란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인간다운 존재 대 인간 같지 않은 존재', 나아가 '신적인 존재 대 짐승 같은 존재'의 대립 관계 속에서 배제되거나 말살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 (15~16쪽.)

 

  앞서 뷔퐁이나 블루멘바흐가 유럽인 대 비유럽인, 혹은 넓은 의미의 백인종 대 유색인의 구도 속에서 유럽인의 미적 우월함을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마이너스는 이와는 달리 모든 유럽인이 희긴 하지만 전부 똑같이 희지는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랩족, 핀족 및 그 후예들, 도나우에서 러시아 서부의 드네프르강 사이 목초지에 거주하는 훈족의 후예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집시들은 "더러운 흰색" 피부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적·정신적 능력이 열등하고, 따라서 유럽인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가장 희고, 가장 혈색 좋고, 가장 우아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켈트 인종 가운데서도 게르만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북부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홀란드(네덜란드), 영국 및 인근 섬의 주민들"이 그들이며, 이들이 가장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66쪽.)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가? 서양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이미 그 연원을 로마제국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무엇보다 기독교적이고 미신적인 세계관에 입각해 행해진 종교적인 편견·차별·경멸혐오를 의미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본질적으로 유대인이 개종을 거부하는 '우리 안의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종교적 반유대주의와 함께 유대인을 '고리대금업자', '수전노', '신의 없고 사악한 자들'로 정형화한 경제적 반유대주의도 (...) 유대인의 외모를 비하하는 '매부리코', '안짱다리'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반복되었는데, 이는 인종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 완강한 이교도이자 풍속이 다른 이방인을 조롱하고 경멸하며, 때로는 혐오하기 위한 것이거나 기껏해야 오늘날 '외국인(타민족)혐오(Xenophobia)'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의 전근대적인 표현이었다.
  (...)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 존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
  이에 상응하여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논리적 근거와 도덕적 정당성을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찾았다. 역사는 빛의 세력인 '우리 민족공동체'와 어둠의 세력인 유대 인종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현재는 유대 인종의 최종적 승리와 '우리 민족공동체'의 멸망을 바로 목전에 둔 역사의 마지막 환란 단계라는 종말론적인 인종투쟁 사관이 그것이다. (168~169쪽.)

 

  세기말의 인종주의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악마화시키면서 타자에 대한 차별의 이데올로기에서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해갔다. 이제는 타자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공동체의 타락/쇠퇴/몰락에 대한 염세주의적 우려 또한 악마적 적대 인종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 이처럼 끊임없이 갓아의 적을 찾아 헤매던 폭력적 인종주의는 국가와 민족들 간의 무한투쟁이라는 제국주의의 문법 앞에서 민족주의와 결합되었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민족 및 국가 공동체를 타자의 위험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은, 벨기에가 자행한 콩고 대학살, 독일의 헤레로족 대학살 등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살육의 에피소드들을 제외한다면, 아직은 대부분의 경우 이민제한 혹은 이민금지, 추방, 나아가 (특히 유대인의 위험을 막기 위한) 정치·사회적인 배제 장치들의 요구 등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상상력의 지평이 더욱 넓어져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로 대표되는 적대 인종에 대한 제노사이드라는 극단적 조치로 발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50~251쪽.)

 

  인종과학자들이 내세운 국가인종주의의 양대 이론적 지주는 사회다윈주의라는 사회 및 역사 철학과 우생학이라는 인종 재생(개량) 프로젝트다. 이를 통해 서양의 인종주의는 고비노의 염세주의와 이별할 수 있었다. 제2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비노는 '열등 인종과의 혼혈 - 인종적 퇴화 - 도덕적 타락 - (문명, 사회, 민족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인종 퇴화론에 기반하여 염세적인 역사철학을 주장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 진화하는 길 위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국가인종주의는 고비노의 유산을 새롭게 전유하여, 인종 퇴화론은 수용하면서도 염세적 인종주의는 거부했다. 이제 사회다윈주의라는 복음과 우생학이라는 만병통치약을 통해 인종 퇴화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 과정의 전조가 아니라, 한 민족의 더 높은 단계로의 진보와 발전에 수반되는 극복 가능한 위기 현상으로 재해석되었다. 염세적 인종주의와의 결별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사회다윈주의에 근거한 진보낙관주의의 우세, 인종 퇴화론의 도전, 그리고 우생학을 통한 종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이 그것이다. (276쪽.)

 

  이러한 퇴화론을 배경으로 우생학이 탄생했다. 1883년 다윈의 조카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은 인종의 재생을 목표로 우생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탄생시켰다. 우생학의 밑바닥에는 '역선택'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이미  「유전적 재능과 형질」(1865)이라는 논문에서 골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개 상태에서는 생존경쟁에 의해 퇴화해야 할 허약한 개체가 문명사회에서는 살아남는다. (...)" 이처럼 문명화의 결과로서 '역선택'이 일어나고, 이는 곧 인종의 질적 하락을 가져온다는 것이 골턴의 비관적 진단이었다.
  골턴의 우생학은 고비노의 염세적 퇴화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골턴은 사회다윈주의의 틀 내에서 '역선택'을 막기 위한 새로운 처방을 제시했다. '우생(eugenic)'이라는 용어는 골턴에 의하면 "유전적으로 고귀한 질을 가진 좋은 혈통"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생학이란 "한 인종의 선천적 질을 개선하는 데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다루는 과학"이다. 한마디로 우생학은 국민을 '정상'과 '비정상' 혹은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구분하고, '비정상' 혹은 '부적격자'를 제거하며, '정상' 혹은 '적격자'의 결혼과 생식을 장려하는 인종 재생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
  (...) 골턴은 사회적 지위와 유전적 우열을 동일시했다. 그는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도덕적 능력을 종합한 개념, 다시 말해 개인이 생존경쟁을 견디며 활력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재능의 총체'인 '시민적 가치'를 강조하고, '시민적 가치'가 각 사회계급에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훌륭한 혈통이나 가문이 아니라 뛰어난 재능과 지성의 유전을 강조했다. 비록 하층계급 출신이라 할지라도 우수한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에 합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하며, 귀족이라 할지라도 무능한 자 역시 그에 걸맞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284~286쪽.)

 

  볼트만의 생물학적·인종적 토대와 문명적 상부구조 이론은 동물 상태의 인류의 진화 과정과 문명과 결합되어 진행된 생물학적·인종적 진화 과정, 즉 자연사적 진화와 역사적 진화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먼저 자연사적 진화는 이미 완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인종은 자연선택, 즉 자연사적 진화 과정의 산물이며, 따라서 "역사 관찰 속에서 이미 주어진 원인이자 힘들로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 따라서 우수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의 차이는 역사발전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영원한 상수常數다. 볼트만은 게르만 인종과 '니그로'의 차이를 말한다. 후자는 이미 기원전 4000년 무렵 이후 이집트 제국을 통해 지중해의 문명과 접촉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야만 상태 그대로 머물렀다는 것이다. 반면 게르만 인종은 원래 군사적·경제적으로 '인디언이나 니그로'와 같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로마의 문명과 접촉했을 때 단기간 내에 고대 문명의 여러 요소들과 기독교를 수용하여 내적으로 새로운 독창적이고 더 높은 정신적 구성물로 가공했다는 것이다. (...) (351~352쪽.)

 

  이상과 같이 볼트만이 제시하는 역사상은 매우 단순하다. 게르만 인종은 태곳적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세계 문명을 견인하고 세계사의 발전을 이끌어 온 초인적 인종, 초역사적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의 게르만 분파가 한 문명을 만들어내고 사멸한다면, 새로운 게르만 분파가 등장하여 다시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사라지는 스토리가 연속된다. 역사는 순환한다. 그러나 게르만 인종 자체는 역사 저편에서 끊임없이 이 순환고리에 개입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특별히 근대 유럽 문명 속에서 범게르만주의가 실현되었다. 유럽의 모든 민족과 국가 속에 게르만 인종은 지배세력으로서, 영웅과 천재로서 내재한다. 이렇듯 그의 역사관은 게르만범심론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역사상을 바탕으로 볼트만은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현재는 게르만 인종이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다. 이제 근대 유럽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킨 게르만 인종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인종적 퇴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도처에서 위기의 징후가 포착된다. (...) 열등한 단두인들의 우수한 장두인들에 대한 투쟁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363~364쪽.)

 

  이처럼 인종과학이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에서 인종주의의 비합리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인종 신비주의"(조지 모스)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생학, 사회인류학, 인종사회학 등 유물론적·실증주의적 인종과학은 인종 이념에 합리성과 객관성의 외피를 덧씌웠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과학적 인종주의 그 이상이었다. 인종 이념은 결국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고,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갖느냐 아니냐는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였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인종 신비주의는 인종의 신화적 기원과 인종의 고유한 성격을 만들어낸 정신적 혹은 영적인 실체를 내세웠다. 이를 신봉하는 자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실패했을 때에도 여전히 인종의 신화, 상징, 신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372쪽.)

 

교정. 초판 1쇄
96쪽 11줄 : ' 과정' -> '과정'
376쪽 밑에서 4줄 : 케사리즘Ceasrism -> 케사리즘Caesarism
413쪽 2줄 : '게르만 민족' -> '게르만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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