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나는 독일인입니다 (노라 크루크, 엘리, 2020.) 본문
(책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책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다른 역사책에 비해서는 스토리가 중요한 책이므로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책을 읽으신 후에 이 글을 읽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요직을 지내신 한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80년대부터 진보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학생운동에도 시나브로 영향을 주었고, 학문적 성취도 대단한 분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강성보수로 돌아선 것은 그의 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그 분의 개인사를 알지는 못합니다만, 아마도 자기와 친밀한 관계였던 할아버지에게 '친일파'라는 이름이 씌워지는 것을 참기 어려웠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노라 크루크는 독일 출신의 미국인으로, 아주 우연한 기회에 큰삼촌과 외할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좇게 됩니다. 두툼한 문서 뭉치를 들춰가며 행적을 좇은 결과 그가 마주한 진실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큰삼촌은 사실 히틀러 유겐트였고 나치 군인으로 전사戰死했음을 알게 되죠. 외할아버지도 비슷합니다.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외할아버지의 말은 사실 거짓이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자발적인)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합니다.
여기까지는 노라 크루크와 아까의 그 역사학자가 같습니다. 하지만 노라 크루크는 그 역사학자와 달리 큰삼촌과 외할아버지의 과오를 기꺼이 인정하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오랫동안 절연絕緣하고 살았던 고모와 다시 만나 가족 간의 사랑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외할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던 어떤 이를 만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연대감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탕수육은 노라 크루크가 큰삼촌과 외할아버지의 진실을 직면하고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큰삼촌과 외할아버지 역시 어느 정도는 비겁하고 어느 정도는 소심한, 보통의 인간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큰삼촌과 외할아버지 역시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실패를 인정하고 속죄할 때, 비로소 노라 크루크는 외할아버지를 변호해주었던 이의 후손을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다시금 이해받고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노라 크루크의 태도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물타기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임지현의 『기억 전쟁』이나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라 크루크는 온화하고 자상했지만 동시에 비겁하고 소심한 큰삼촌과 외할아버지가 나치의 폭력 앞에서 '실패'한 것을 곱씹음으로써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생각의 단초를 얻어낸 것입니다.
저희 방송을 들으신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곧 조형근의 『우리 안의 친일』을 떠올리실겁니다. 한국의 사회학자 조형근의 통찰을 지구 반대편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인 노라 크루크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그것도 참 묘한 독서경험입니다. 하긴, 과거사의 아픔에 맞서는 진정한 치유적therapeutic 과제 앞에 국경이 따로 있을리가 없죠.
덧.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추천사는 조형근이 썼다면 훨씬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지금 추천사는 두루뭉술하기만 해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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