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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 (김중섭 외, 북코리아, 2020.) 본문

잡冊나부랭이

진주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 (김중섭 외, 북코리아, 2020.)

Dog君 2023. 1. 29. 20:01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는 가끔 고향과 관련된 책을 읽곤 한다. 몇 년 전에는 오쿠다 히데오의 『무코다 이발소』를 읽었는데, 읽을 때는 낄낄대며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출신의 비장함 같은게 새삼스럽게 밀려왔던 기억이 난다. 형평사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23년에는 그보다 더 비장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 이 책을 집어들고 설날 귀향버스에 탑승.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3.1운동을 전후로 한 진주의 사회운동을 충실하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연구논문 모음집치고는 각 글이 꽤 긴데, 그 많은 분량에 진주 지역의 사회운동 전반이 충실히 정리되어 있다. 3.1운동의 전개양상을 다룬 논문만 해도 시위상황을 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만약 그랬다면 시사市史와 뭐가 다르겠나...) 관련 사료를 정리하고 사료비판까지 하고 있다. 이런 정도면 일단 진주 3.1운동의 전후 맥락을 정리하는 책으로는 결정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1900년대 초까지 진주의 사회운동은 근대학교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성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는 일찍부터 신학문이 유입되어 학교설립운동이 비교적 활발했다. 1910년에 이미 여학생만을 위한 반이 만들어진 것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김재영의 박사학위논문 『일제 강점기 衡平運動의 지역적 전개』는 진주가 전통적으로 경상우도 학맥의 중심이었다는 것과 축산업과 면포업 등이 발달하여 상업자본이 비교적 이르게 성숙했음을 지적했다. 형평운동을 염두에 두면 매우 의미심장한 지적이다.) 호주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가 오랜 시간 영향력을 유지한 것을 비롯해 천도교 등도 새로운 사회운동세력의 요람이 되었던 것 같고. (강달영이 천도교단체에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191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학교설립운동의 열기도 시들해지고 (개신교를 제외한) 종교단체의 활동력도 예전만 못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벌어진 3.1운동은 진주 지역의 사회운동에 활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진주의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3.1운동 당시 다종다양한 사회계층이 각자의 목소리를 냈던 것이 계기였을 것이다.

 

  3.1운동으로 지역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강달영, 강상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곧장 4년 뒤의 형평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이후 형평운동이 전국화하면서 이들도 분화되었다. 가장 급진적이었던 강달영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활동가로 성장했고, 형평운동 역시 장지필 등의 급진파와 강상호 등의 온건파(혹은 서울파와 진주파)로 분화했다. 온건파 역시 내부적으로 다시 분화하며 친일로 빠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대동사...) 강상호처럼 식민권력과 끝까지 긴장했던 이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진주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근대 지향' 정도로 정리한 이 책의 결론은 약간 아쉽다. 이건 전국 어디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아주 사알짝 밍숭맹숭하다고나 할까. 이보다 더 과감하게 내질러도 괜찮았을 거 같다. 이 책에 실린 충실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대중운동이 지역사회에 어떤 충격을 던졌고, 지역사회 변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까지 더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신학문과 종교를 구심으로 형성된 진주의 사회운동이 1910년대 후반에 살짝 침체했다가 3.1운동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정리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많은 연구자들이 3.1운동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하곤 하는데, (오월광주와 촛불시위처럼!) 이를 진주라는 시험관 속에서 확인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3.1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청년들이 어떤 경로를 밟아 성장해왔고, 이후 이들이 어떻게 분화했는지 계보를 그려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고.

 

  마침 올해 2023년 4월이면 형평사가 창립된지 꼭 100년이 된다. 내 알기로 4월에 이미 학술대회가 예정되어 있고 그 외에 여러 행사와 글들도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그 때 나올 여러 말과 글들은 또 내 호기심을 어떻게 채워줄까. 이야기 듣는 것이 즐거운 한 사람의 독자로서, 역사에 관심 많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기대가 크다.

 

  (...) 1909년 들어서면서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투쟁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투쟁 양상도 공세적 성격에서 방어적인 성격으로 바뀌어갔다. 경남 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이 강화될 수 없었던 내적 원인도 있었겠으나, 무엇보다 일본군 측의 집요하고 계속적인 토벌 작전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관찰부가 진주에 두어진 이후 여기에 관심을 쏟고 총력 대응하는 일본 세력의 움직임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 특히 진주를 비롯한 인근 요소에 수비대를 조밀하게 배치하여 대응한 것이 의병운도으이 활성화에 장애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준형, 「진주지역 3·1운동의 배경」, 77쪽.)

 

  보수 유림이 무기력화되어가는 중에 1919년 고종이 서거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보수 유림은 이 운동을 주도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원래 3·1운동 방식을 반대하고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진주지역에서는 이런 유림의 분위기로 인해 유림 세력이  3·1운동을 주도하는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
  3·1만세운동 때 진주에서도 3월 18일 최초 시위에 천도교인들이 일부 가담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진주 및 인근 군 단위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의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사자료집』에 의하면, 일제는 경상남도 내에 천도교가 미미하기 때문에 일반 민중은 거의 도내에 천도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경상남도의 소요에서도 어떤 연계를 가진 점을 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관내 천도교도로서 소요에 대중의 이목을 끌 만한 행동을 감행한 자는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
  (...) 어쨌든 불교는 전국적 차원에서나 진주지역에서나 민족운동을 이끌어나갈 세력이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
  이런 조건 속에서 개신교는 진주에서의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제 당국이 "본도에 있어서의 소요의 도화선이 호주 장로파 기독교도의 사주에 의했다"라고 단정하면서 (...) 진주교회의 역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
  이에 반해 천주교에 대해서는 관내에서 선교사 및 교도 중 이번의 소요에 관계한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이는 선교사가 소요 발발에 즈음하여 교도에 대해 "종교와 정치와는 구별이 있다. 우리 교도는 이번의 소요와 같은 정사(政事)에 관한 행동에는 일체 관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훈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진주지역에서도 천주교가 3·1운동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김준형, 「진주지역 3·1운동의 배경」, 112~126쪽.)

 

  (...) 진주지역의 초기 사회운동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선진성이다. 사조의 유입, 단체의 결성, 운동의 추진과정에서 낙후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1920년대 후반에 오면 확장성과 대중성에 한계를 보인다. 활동가 그룹이 고정되어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검속이 반복되는 상황이 제약으로 작용한 것이다. 인근 삼천포와 함안에서 성공했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준비단계에 좌절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진주지역 주민이 꿈꾸었던 세상은 개조된 사회였다. 실력을 양성하여 정의와 인도,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근대문명사회를 만들어보자는 열의가 폭발했다. (...) (김희주, 「진주 3·1운동과 지역사회운동: 청년, 농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214쪽.)

 

  요컨대, 3·1운동 이후 생겨난 직업적 사회운동가들은 여러 영역에서 사회운동단체를 만들어내는 기폭집단이었으며, 사회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주도했으며, 사회운동단체들을 이어주는 매개 집단이었다. 그들은 지역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사회적 의사 결정에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면서 사회운동가 집단은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주민의 열망을 조직하는 전위 집단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운동단체의 활동 영역은 '사회운동계' 또는 '사회운동권'으로 일컬어졌다. 사회운동 세력을 형성하면서 기득권 세력이나 지배층이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도 증대되었다.
  세력을 구축하여 전체 사회나 지역사회 차원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사회운동계의 활동가들은 일제나 지배 세력을 경제하며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지키고 대변해주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주민은 지역사회의 현안문제에 독자적인 의사를 개진하는 주체적 행위자로 발전했다. 곧,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민은 주체적인 행위자인 '시민'으로 발전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것은 '시민 집단'의 성장, '시민사회'의 도래 같은 역사적 전개까지 기대할 만한 수준이었다. (...) (김중섭, 「진주지역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 303쪽.)

 

  요컨대, 3·1운동 이후 진주에서 일어난 사회운동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바람의 소산이었다. 신분제의 잔재를 없애고, 유교 폐습을 버리고, 농업 사회의 불공정한 소작 관행을 고치고,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회운동의 과제였다. 그것은 백정, 여성, 어린이, 농민, 노동자, 배우지 못한 사람 등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부당한 관행을 바꾸려는 활동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평등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세시위를 벌이며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고자 한 3·1운동의 유산이었다. 3·1운동은 평등하고 정의로운 근대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주민은 사회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조짐을 보였다. (김중섭, 「진주지역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 320쪽.)

 

교정. 초판

112쪽 밑에서 5줄 : 3.1운동 -> 3·1운동

113쪽 7줄 : 3.1운동 ->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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