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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김주완, 피플파워,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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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김주완, 피플파워, 2023.)

Dog君 2023. 1. 30. 19:37

 

  연초 내 타임라인의 화제는 단연 '김장하'였다. 김장하 선생의 활동범위는 진주를 벗어나지 않지만 다양한 지역과 성향을 가진, 그래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여러 분들이 제 타임라인에서 김장하 선생을 이야기하며 존중과 존경을 표했다. 선생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은 꼰대질과 라떼만이 넘쳐날 뿐 정작 '어른'은 찾기 힘든 요즘 세태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인 세대 갈등은 어쩌면 존경할만한 윗세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도 '어른'이라고 할만한 분이 있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며 일갈했던 채현국 선생이다. 어딜 가서든 직설적인 말투를 굽히지 않았던 채현국 선생은 뭐랄까, 괄괄한 죽비 같았다고나 할까.

 

  김장하 선생은 그와는 정반대 의미에서 '어른'이라고 할만하다. 평생 번 돈을 아낌없이 기부했지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는 김장하 선생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언가를 말하기보다는 평생에 걸친 묵묵한 실천으로 본을 보이는 타입이니까. 그래서일까, 김장하 선생은 그 많은 선행을 하고도 어디 가서 자랑한답시고 현수막을 거니 사진을 찍니 내 이름 달린 건물을 짓니 하는 요란을 떨지 않았다. 오히려 혹여라도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늘 조심하고 경계했다.

 

  그러고보면 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보통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무엇 하나 속시원히 답해주는 일이 없는 무뚝뚝한 늙은이를 취재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었을까. 독자인 나야 결과물만 즐길 뿐이지만 취재 과정에서 저자가 느꼈을 답답함과 막막함이 어땠을지 좀체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김장하 선생도 형평운동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형평운동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그 정신을 기리는 일이라면 글을 쓰고 언론에 얼굴을 내비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이 왜 형평운동에 이처럼 주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형평운동에 대해 선생이 쓴 글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는 더듬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이른바 '백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신분과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면 구시대의 유물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에는 (...) 남자와 여자,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그리고 몸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등 사이의 차별과 몰이해가 사람답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방황하게 하고 있다. (...)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사'는 지금 없어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234~235쪽.)

 

  선생의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는 또 있다. 선생에게 감사를 표하러 남성당한약방을 찾은 한 장학생이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자 선행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118쪽.)는 것이라고 답했다. 위대한 몇몇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일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선생의 철학은 아마도 그것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선생이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성적은 전혀 따지지 않고 가정형편만을 살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책과 다큐를 보고 나면 누구나 선생의 선행에 아낌없는 존중과 존경을 보낼 것이다. 그래야 마땅하다만 다만 하나 조심할 것도 있다. 기백억에 달하는 기부액만 부각시킨다거나 혹은 '그런 좋은 분이 계시지'라는 생각에서만 그치고 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저 김장하라는 사람이 평생 쌓아온 가치를 '말 한 마디 보태기 좋은 이야깃거리' 정도로 소비하고 마는 것이겠다. (물론 그마저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라는 수필에서 박완서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는 많은 덕담이 쏟아지건만 정작 예수님처럼 살라는 말은 없더라고 탄식했다. 우리도 종종 비슷한 마음으로 탄식한다. 예수님을 칭송하는 이는 그렇게나 많은데 (도심지 야경 속의 그 많은 십자가들을 보라!) 정작 예수님처럼 박해받는 이의 편에 서고 옳은 일을 위해 고뇌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적은지 말이다. 김장하 선생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김장하 선생을 진정으로 존경하기 위해서는 그를 칭송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과 팍팍한 현실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활동가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선생이 장학금을 주며, '자네가 받은 것은 내가 아닌 사회에게 돌려주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서 받은 가르침도 그의 방식 그대로 사회에게 돌려주어야 옳겠다. 이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김장하 선생에게 가르침을 얻은 우리도 이제부터는 김장하 장학생이니까.

 

ps. 책 말미(356쪽.)에 김장하 선생을 강상호와 비교하는 말이 잠깐 나온다. 다큐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잠깐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지만, 나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라 꽤 공감이 갔다. 불평등에 맞섰다(형평운동)는 정도 외에 인격적으로도 두 사람은 꽤 닮은 구석이 있다. 자기가 가진 물질적 부를 주변과 아낌없이 나누면서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는 지극히 인색했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가 꼭 그러하다.

 

 

  호세(戶稅)를 대납(代納)해
  진주군 정촌면 가좌리(晉州郡 井村面 伽佐里) 강상호(姜相鎬)씨는 동리(洞里) 인민 중 극빈자(極貧者)가 다대수(多大數)가 되여 매양 호세 기타에 불소(不少)한 고통을 밧는데 동정하야 다이쇼 6년도부터 매년 60원씩 호세로 기부해오든 중 본년(本年) 3월에 다시 동리의 기본금으로 금 이백원을 기부하고 극빈민(極貧民)의 민폐(民弊)를 업게 하기를 계획함으로 동민 일동은 강씨 독지(篤志)를 감사하여 마지 안는다고. (진주) (동아일보 1925년 4월 14일자 3면 2단)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대납해주었다는 기사인데, 눈에 띄는 것은 기부를 시작한 시점이다. 다이쇼 6년, 즉 1917년부터 해오던 것이 1925년에야 세간에 알려진 것이다. 그것도 기부액을 늘리면서 알려진 것이다. 주변을 도우면서도 자기 자신을 최대한 덜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이 판박이처럼 닮았다. (이후에도 강상호는 사회운동에 계속 몸담았지만 자기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ps2.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은 크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그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선생이 후원했던 진주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처음 먹게 된 것이 진주환경운동연합에서였다.) 직접적으로 덕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책을 거의 읽어갈 즈음 아래 대목에서 숨이 턱 막혔다.

 

  (...) 한약방 내부를 추가로 촬영 중이었는데, 한 중년남성이 기웃거리며 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 이규섭(1969~ ) 진주시의원(더불어민주당)이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대학생이었던 그는 진주시 망경동에 있던 '한뜻 공부방'이라는 청소년 야학 교사를 했는데, 그 공부방 전세금을 김장하 선생이 주셨다며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250쪽.)

 

  나는 한뜻 공부방 학생이었다. "알고 보니 나도 그 돈을 받았"(209쪽.)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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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을에 있는 용남중학교를 졸업한 이인안 대표는 진주 연합고사를 거쳐 명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 입학 후 선생님들이 김장하 이사장의 학교 설립 취지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해주었고, 선생님들 스스로도 우수 교원으로 스카웃돼 왔다는 자부심과 이사장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명신고 2회 졸업생이 된 이 대표는 1988년 경상국립대에 진학,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된다.
  "대학시절에도 학교 동아리 중 이사장님 후원금을 안 받아 본 곳이 없을 걸요? (...) 행사 팸플릿이 나오면 다들 남성당한약방을 찾아갔죠. 그러면 좌우를 따지지 않고 10만 원씩 후원금을 주셨다더군요. 그 시절 10만 원이면 큰 돈이었죠."
  그는 졸업 후 《진주신문》에 취업했다. 가보니 김장하 선생이 그 신문의 최대주주이자 후원자로 있었다. (...)
  이 대표는 현재 마산YMCA 이사장을 맡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
  "이사장님은 늘 제 삶에 따라다니시는 분이죠. 저는 이사장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71~73쪽.)

 

  (...) 마지막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그렇게 지원한 학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앞서 남성당이 문 닫는 날 서울에서 찾아왔다던 그 장학생 김종명씨가 선생에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생이 이랬다고 한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117~118쪽.)

 

  (...) 취재과정에서 '김장하'라는 이름만 대면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협력자가 됐다. 대개 기자라며 불쑥 전화하거나 찾아가면 혹 안좋은 일로 뒤를 캐러 온 것은 아닌지 경계하거나 일단 거부하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이번 취재는 달랐다.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128쪽.)

 

  (...) 김장하 선생이 직접 회장을 맡아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시민운동에 나선 게 형평운동기념사업회였다. (...) 그는 형평운동 70주년을 앞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기념사업회 회장과 이사장을 맡아 평등사회, 차별 없는 세상을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1993년 70주년에는 《한겨레》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칼럼을 썼고, 형평운동 관련이라면 여러 방송과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가 형평운동에 그만큼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겨레》 칼럼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오늘날 이른바 '백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신분과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면 구시대의 유물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여러 모습의 다른 차별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그리고 몸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등 사이의 차별과 몰이해가 사람답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방황하게 하고 있다.
  (...)
  우리는 지금 개혁과 민주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사'는 지금 없어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233~235쪽.)

 

교정. 초판 1쇄

39쪽 6줄 :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

41쪽 11줄 : 남전 여씨향약 (39쪽과 41쪽의 띄어쓰기 다름)

166쪽 11줄 : 이이게 -> 이에게

205쪽 10줄 : 마직막에 -> 마지막에

222쪽 밑에서 5줄 : 선사(1786~1866)는 -> 초의선사(1786~1866)는 (이 부분은 김장하 선생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본래 글이 이러하고 본래 글을 존중해야 한다면 굳이 고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240쪽 사진캡션 : 김경현의-일제강점기 -> 김경현의 일제강점기

250쪽 6줄 : 선생 주셨다며 -> 선생이 주셨다며

265쪽 1줄 : 궁금하더라고요? -> 궁금하더라고요.

293 5 : 감시받았죠 -> 감시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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