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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박사하기 (강수영 외, 스리체어스,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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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박사하기 (강수영 외, 스리체어스, 2022.)

Dog君 2023. 1. 29. 19:56

 

  고백하자면, (지인인 공저자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책을 처음 받았을 때는 책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 대학원생의 열악한 처우 이야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별달리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일이기도 하고(석사과정 때 한달 수입이 572,000원이었다.), 대학원생들이 모여 늘어놓는 '내가 더 좆됐어요' 류의 푸념은 이제는 진부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제목을 하필 '한국에서 박사하기'로 짓는 바람에 이 책은 누가 봐도 한국 대학원생의 열악한 처우를 논하는 걸로 보이게 됐다.)

 

  연구자가 처한 곤경을 말하자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라다. 경제적인 면도 그렇지만 고용안정성이 지극히 떨어지는 탓에 그로부터 비롯하는 불안감과 우울을 신체의 일부분처럼 달고 사는 연구자들의 정신위생까지 생각하면, 하아, 정말 한숨만 나오지. 게다가 그나마의 고용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연구실적을 쌓아야 하니 연구자 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이중삼중이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라는 제목이 마뜩찮은 또다른 이유가 이것이다. 외국에서 박사를 하고 온 사람이라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작금의 인문·사회계열 학문을 둘러싼 조건부터가 녹록치 않다. 본디 인문·사회 계열 학문의 사명이란 사회공동체가 고민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어야 하지만 작금의 학문이 그런 기능을 상실한지는 한참 됐다. 대중적 파급력은 스타강사와 SNS에 추월당한지 오래이고, 전문화와 세분화의 극에 달한 논증과정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학령·독서 인구의 감소까지 겹치니 인문·사회 계열 학문의 미래는 절대로 더 밝아질 수 없다. 이런 배경을 생략하고 대학원생의 처우 개선만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효용도 설명하지 못하는데 거기에 대고 세금을 갖다 부으라는 건 너무 무책임한 말 아닌가. (내가 그래서 "무쓸모의 쓸모" 같은 말장난을 싫어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런 소리 하시는 분들은 대개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는 분들이시고.) 나 역시도 모든 대학원생들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지만, 인문·사회 계열 학문이 처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푸념 이상이 될 수 없다.

 

  고용의 불안정과 미래의 불투명은 대부분의 노동자가 겪는 일상적 문제이니 이를 연구자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대학원생의 노동이 다른 노동에 비해 특별히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할 당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연구자의 것으로만 한정한다면, 이는 연구자를 특권화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간 수없이 쏟아졌던 '대학원생 담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느 이상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에는 그것이 바깥에서 보기에 어느 정도는 '특권 의식'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은 기획에서도 지적받을 부분이 있다. 이 책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대부분 서울 소재 대학 소속이기에 이 책이 커버할 수 있는 '대학원생 담론'은 공간적으로 한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달리 볼 여지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만한 두께를 설마 천하제일하소연대회로만 채웠을까 하는 (희망적인) 의구심이 있었다. 이 책은 일단 두께가 남다른데 스리체어스의 북저널리즘 시리즈(최근에 가장 눈여겨볼만한 문고판 시리즈일 것이다.) 치고 꽤 두껍게 나왔다.(대부분 100쪽 내외인데 이 책은 250쪽이 넘는다.) 천하제일하소연대회에 대한 피로감은 이 책의 저자들 역시도 충분히 느끼고 있을테니 그런 이야기나 반복하려고 또 이런 책을 내지도 않았으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그런 돌림노래나 하는 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들이 뻔한 당위에 호소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인문·사회 계열 학문이야말로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당위만 겨우 반복하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체 어떤 점에서 필요하다는 건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따위의 이야기는 이 책에 없다. 도리어 저자들은 인문·사회 계열 학문이 사회적 수요를 창출하는데(혹은 자기 성과를 사회화하는데)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말하는 결론도 이전의 '대학원생 담론'들보다는 그래도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이다.

 

  이 책은 우선 거버넌스에 개입할 수 있도록 인문·사회 계열 학문의 사회적 효용을 납득시키기 위한 "담론 전략"을 주문한다.(93~94, 160, 194쪽.) "담론 전략"이라고 하니 되게 거창해보이는데, 그냥 '삶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학문의 본질적인 목적을 다시 환기하자는 정도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이걸 역사학 분야로 옮기자면, 실증주의로 과도하게 치우친 것에 대한 반성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런 경향은 역사학의 전문성과 과학성을 높이는 데는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독자와의 괴리를 점점 키운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렇다고 전문성과 과학성을 깡그리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학 연구가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도 함께 추구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그보다 더 힘주어 말하는 것은 양적 기준으로 획일화된 평가 체계와 '전임교원 되기'로 획일화된 생애진로를 다변화할 필요성이다.(107~108, 142~144, 159, 193쪽.) 나는 인문·사회 계열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글쓰기의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극소수의 연구자만 읽는 연구논문으로 글쓰기가 획일화된 것과 학문이 사회적 발언력을 상실한 것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여론 형성의 중심이 SNS로 옮겨간지 한참인데 아직도 역사학은 "인걸은 간데 없"는 오백년 도읍지만 맴돌고 있달까. 수용자에게 도달하는 전략, 그리고 수용자와 교감하기 위한 조건이 모두 필요한 시점이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매체 형식에 맞춰 글쓰기가 다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같은 북저널리즘 시리즈의 이성규,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2018.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다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대안 모색이 개별 연구자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144쪽.) 안 그래도 경제적·심리적 곤경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은 개별 연구자가 이런 부담까지 떠안아서야 되겠는가. 이 부담은, 인문·사회 계열의 담론 전략을 짜고 평가와 진로의 다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심리적 근거를 획득한 사람이 지는 것이 옳다. '전임이 된 연구자'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도 그들이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술판에서 그나마 한 발 먼저 탈출했다고 해서 이 타이타닉을 도외시하거나 고나리질이나 하고 자빠진다면, 결국 그 끝은 너나 할 것 없는 공멸이니까.

 

  (현수진) 듣기로는 선생님들, 선배들은 박사 수료 후에 강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학위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아직까지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박사 과정 17학번이었던 제 세대 연구자들 중 저를 포함해서 박사 수료 후에 강의를 하는 분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학계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019년 8월에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됐습니다. 흔히 강사법이라고 부르죠. (...)
  그런데 강사법은 제정 당시부터 본래 취지와 다르게 대학의 인력 구조 조정을 계기로 활용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학들이 강사법 시행에 따른 재정 부담을 이유로 강사 자리를 대폭 없앴기 때문입니다. (...)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강의 자리를 찾기 힘든 마당에, 박사 수료생들이 강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 그 결과 수많은 인문계 석·박사 학생 개개인은 일을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업무가 전공과 관련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많은 경우는 전공과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늦어지는 졸업이 더 늦어지고, 그래서 전공 관련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그런 악순환 속에 있습니다.
  그런 대학원생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연구를 수행해서 좋은 연구자가 되기까지의 난관이 매우 큰 셈입니다. (...) 어쨌든 인문학 공부는 직접적인 재화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 재원에 기대야 한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고, 근본적으로 그 재원의 전체 파이가 매우 작다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이 작은 파이를 나누려니까 힘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원론적으로 재원의 파이를 늘리거나, 있는 재원을 최대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분배하거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86~89쪽.)

 

  (이송희) 사실 인문·사회계 대학원이 활력을 잃어가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투자와 재생산이라는 선순환이 끊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학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침해나 노동력 착취 같은 것은 윗세대에서 훨씬 더 심했잖아요.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대학의 팽창기와 구직 시기가 맞아 떨어져서 학위를 받으면 교수로 취직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성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 최근 학위를 받았거나 학위 과정 중에 있는 신진 연구자들은 자신이 교수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애초에 잘 믿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불안정한 미래를 감수하고서라도 연구자로서 살겠다는 결심을 한 귀중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이미 미래 소득을 포기하고 인문·사회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대학원에 오니 이런저런 그림자 노동은 기본에 심한 경우 인권 침해까지 경험한다면 여기 있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인문·사회계 대학원에 자원이 부족해진 것은 그만큼의 사회적 수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정부 R&D에서 인문·사회 분야의 예산 비중이 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는데요, 이는 인문·사회계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해야 할 분야로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에 잘 팔리지 않는 순수 학문 분야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통폐합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니 연구자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인문·사회학계와 대학의 거버넌스 능력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원래 가난한 것이니 대학에서 정원을 축소하면 어쩔 수 없다, 연구비를 안 주면 어쩔 수 없다 한탄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대학 내에서의 그리고 정부의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목소리를 모아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생산성을 대학과 정부, 사회에 설득하기 위한 담론 전략도 꼭 필요해 보입니다. (92~94쪽.)

 

  (전준하) 자연스럽게 연구자 양성이라는 대학원의 본질 이상의 요구를 도출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바로 대학원 안팎의 교류를 활성화해서 대학원생들에게 교수가 아닌 다양한 커리어와 롤 모델을 제시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교수를 만났다면 교수가 훌륭한 직업임에는 틀림없으니 롤 모델로 삼아 계속해서 학업에 정진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교수가 하는 강의를 듣고, 교수의 지도 아래 연구를 하고, 그 이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교수 옆에서 경험하는 대학원에서는 분명 교수로의 편향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모두가 교수가 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변화가 필요해요. 교수가 아닌 다양한 연구자들이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가며 참여해야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도 못하는 이 제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대학원생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고요. (107~108쪽.)

 

  (김보경) 또 연구자에게 실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등재지 게재 논문으로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도 생산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협소한지 알 수 있습니다. 연구자의 역량이 연구를 통해 증명돼야 하고, 그 연구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형식이 논문이라는 사실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등재지 논문 수가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그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활동이 유효한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번역이나 칼럼, 평론,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이 있겠죠.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도 자진해서 이러한 활동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 연구 성과를 측정하는 잣대가 획일화된다면 연구가 양적으로는 풍부해져도 질적인 다양성이 축소되는 것은 아닌지, 학계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비평 활동을 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 방외  이력을 쌓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저는 평론이 전문화된 연구와 대중 지향적인 저널리즘 사이쯤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등재지 논문만을 성과로 인정하는 현 학술제도하에서는 논문과 대중적 글쓰기 사이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기 쉬워요. 결국 이는 인문·사회계 학술장이 시민 사회와의 소통 능력을 잃고 게토화되는 것을 가속하지 않을까요. 사실 현 시스템에서 연구 역량의 평가 요소를 다양화하는 일은 오히려 연구자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한데요. 궁극적으로는 연구의 질적 다양성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대안을 모색한다면 연구자들이 스스로 학술장의 대중적 소통 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42~144쪽.)

 

  (유현미) (...) 인문·사회계열 지식이 가졌던 사회적 위상은 사회 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획득된 정치적 주도성과 담론적 영향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거리와 광장에서 생산된 지식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 운동이나 학생 운동과의 연계 고리가 역해지고, 각 운동들 역시 약화되면서 인문·사회 학술장의 어떤 총체적 지향이 없어졌다고 보입니다. 물론 사회 변화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은 필요한 때가 있지만 전문화된 학계에서 유일한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문가로서 어떤 역할 모델이나 훈련, 진로가 다양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지도 않아요.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인 거죠.
  신진 연구자들과 대학원생은 계속 뭔가는 해야 하고, 또 하고 있는데 정작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 상태로 학계의 속도에 휩쓸리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연구 분야의 동향을 따라가기 바쁘고, 자리 잡지 못하면 결국 튕겨 나갈 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닐까요. 흔히 신진 연구자들에게 기대하는 패기라든지, 총체적인 개념화의 시도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152~153쪽.)

 

  (현수진) (...) 연구자 집단은 이런 식으로 역사 콘텐츠를 제작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의 근간은 정해진 역사 서사가 없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구자 집단은 연구사의 맥락을 정리해서 역사적 사고력과 창의력 그 자체를 보여주는 형태로 대중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서사와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연구자 집단이 유명강사처럼 인기를 얻기는 어려움이 있죠. (...)
  또 다른 원인으로는 사회 활동에 대한 학계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들 있겠습니다. 학계 내에는 우선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대중화 활동은 제대로 된 공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
  (...)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학계와 연구자들은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적 효용에 대한 설득이 재원을 모으고 재원이 모여야 학생들이 오고, 학생들이 모여야 학문이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다음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도 있겠지만, 지금 공부 단계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있고 그 나름의 가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59~160쪽.)

 

  (이우창) (...) 거칠게 말해, 한국 사회에 아무런 유용성과 의미를 제공하지 않고, 또 그렇다고 이공계 지식처럼 즉각적인 실용성이 있지도 않은 분야에서 왜 연구자를 위해 시민 사회가 세금을 지원해야 하는지 납득시킬 수 없는 겁니다.
  단적인 예시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학계의 존재 이유를 설득할 수 있는 스타를 거의 생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적 지식인을 수행하는 학계의 대변인이 자라지 못하는 구조가 됐죠. 여기서 가장 비극적이고 황당한 지점은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계속해서 논문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실한 연구자들은 예전보다 크게 늘었는데, 학계의 사회적 지분이나 위상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연구의 가치는 하락하는, 그래서 예전의 명백히 덜 성실했던 선배들보다도 미미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된 겁니다. (...) 학문이 시시한 것이 돼버리면 정말 심각한 거예요. (...) (173~174쪽.)

 

  (이송희) 이제 학계에 나온 초짜 주제에 제가 언급할 수 있는 주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예 영역별로 트랙을 나눠 임용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학과에서 사업을 위주로 할 교수와 연구를 위주로 할 교수, 교육을 위주로 할 교수를 별도의 트랙으로 뽑고 그에 따라 별도의 실적 기준을 부과하면 안 될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대학원생이나 신진 연구자들도 자신의 강점을 적재적소에서 다양하게 발현할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더불어 학계 구성원으로서의 효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 (193쪽.)

 

  (조승희) 이공계 대학 내 인문대학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어요. 전 이게 꽤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속됐으면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공계 대학의 후속 세대에게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걸 총장과 교수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 같습니다.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이공계 학생들은 이공계 수업에서 접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나열된 역사적 사실을 익히기보단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고, 윤리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외우는 게 아니라 무엇이 윤리의 영역에 들어가야 하는지 논의하는 법을 배우고, 과학기술의 성과보단 과학기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깊이 관찰하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죠. (194~195쪽.)

 

  (이송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적 열망과 사명감을 가지고 분투하는 연구자가 많이 존재하고, 도 우리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사회 현상에 대한 탐구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 분들은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사회과학계는 과거의 문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연구자의 진로를 다각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긴 대학원 시절과 시간 강사 기간을 거쳐 전임 교수로 임용되는 진로는 더 이상 연구자의 보편적인 커리어 설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경로들을 마련하고 제시하지 못하는 한 후속 세대에게 연구자로서의 진로를 택하고 유지하라고 요청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 좌담회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왔지만, 연구자의 사회적 역할과 성과 평가 방식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시작일 듯합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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