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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을 향하여 (다나카 히로시·나카무라 일성, 생각의힘,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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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을 향하여 (다나카 히로시·나카무라 일성, 생각의힘, 2023.)

Dog君 2023. 5. 8. 19:22

 

  겉보기에는 두 사람의 공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널리스트인 나카무라 일성이 다나카 히로시를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다나카 히로시는 일본-아시아 관계, 일본의 전후 보상, 재일외국인 등을 연구한 일본의 경제학자로, 그는 이 책에서 자이니치在日 문제에 대해 그가 오랜 시간 관여하고 연대했던 경험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책은 형식은 인터뷰집이지만 실제로는 자이니치의 투쟁사鬪爭史를 정리한 역사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향후에 자이니치의 역사에 관해 공부할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볼 가치가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자이니치의 역사에 관해서 우토로 마을이나 조선학교, 지문날인 거부운동 정도만 조금 들어 알고 있을 뿐이지 이런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뒤 일본 정부에게 피폭 치료를 요구한 손진두, 일본 국적 확인을 요구한 송두회, 외국 국적자의 법조인 자격 취득을 위해 싸운 김경득 등은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알게된 이름들입니다.

 

  좀 놀라운 것은, 자이니치의 권리를 위해 견실하게 싸웠던 이들이 애초부터 무슨 대단한 자의식이 있다거나 확고한 이데올로기를 가졌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저 자기존재를 인정받고 자기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근대국가라면 응당 보장해야 할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주장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납세, 노동, 교육 등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자에게 그에 맞는 권리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다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타협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무척 대단한 일입니다. ^^)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 후에 재판소에 제출한 청원서를 읽고, '과연 그렇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유소년기부터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에 한을 품고, 조선과 관련된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본인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소심하게 새가슴으로 살아가는 참담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맛본 취업 차별을 계기로 차별을 해소하고,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 조선인 변호사가 되겠다는 것을 목표 삼아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최고재판소에서 국적 변경을 요구받는 이 시점에 가볍게 귀화 신청을 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내가 변호사가 되려 했던 입각점[초심] 그 자체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뒤에 조선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되고, 조선인을 위해 변호 활동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자신에게] 말해보았지만, 귀화한 내가 어떤 모양으로 조선인 차별을 해소하는 문제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조선인이라는 점을 원망하며, 티 없는 어린 마음에 상처받고 있는 동포 아이들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강하게 살아가거라'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게 귀화한 사람의 말이라면, 과연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라고요. (98쪽.)

 

  사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이니치의 권리를 위해 자이니치 스스로 싸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문제는 일본인인 다나카 히로시에게 자이니치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다나카 히로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식민 지배에 나서 이민족을 지배한 이상,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떤 모양으로 역사 안에서 소화해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생겨납니다. 문자 그대로 '불가역변화'[한번 이뤄지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식민지가 사라졌어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부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킬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 내 의견을 묻는다면 조선학교는 솔직히 말해 자이니치들에게 보물이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에도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한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정권 투쟁 때 봤던 문서인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버린 단일민족론과 순혈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고, 새로운 한국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요. (322~323쪽.)

 

  정리하자면, 자이니치의 법적 지위와 권리를 명확히 하는 것은 식민지배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직시하는 일인 동시에 일본 사회가 다양성을 갖추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역사의 그늘을 직시하고 다양함을 갖춘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일 것이고, 그 건강함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이니치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식민지배의 역사와 책임을 따져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궁극적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것[共生]에 대한 우리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생을 향하여'라는 책 제목이 그래서 의미심장하지요.) 다나카 히로시가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 책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고, 자기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자이니치와 연대하는 과정은, 별달리 따져묻지 않았던 자기 안의 차별과 냉대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다나카 히로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자이니치도 아니고, 일본에 사는 것도 아니며, 식민지배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닌 한국의 독자는 혹여나 우리 사회 안에도 차별과 냉대와 혹은 더 나아가 혐오가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됩니다. 메이저리티에 속한 우리는 마이너리티인 이들에게 적당히 타협하고 살라고 말하기 쉽지만, 우리 사회가 훨씬 더 다양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졌을 때 그 건강함의 결실을 누리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경득 씨는 우리는 한국에서도 투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계속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할 때 그는 일본의 외국인 정책 개선은 반드시 한국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무척 강조했어요. 그래서 그는 일본에서 지방 참정권을 실현할 수 있으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실현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의 처우 개선이나 지위 향상에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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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방학이라 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니, 그러겠다고 해서 오카야마의 시골로 데려갔습니다. 시골 마을에 인도인이 오는 일은 없잖아요. (...) 마을회관(공민관)에서 일고여덟 명을 모아 잡담을 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간담회처럼 되어 젊은 마을 사람들이 꽤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에 와서 가장 놀란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천황이 건재하고, 수도 도쿄 한가운데에 그렇게 큰 집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황이 퇴위했거나 어디 떨어진 작은 섬에 은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으로 그 전쟁으로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당신들도 천황의 전쟁으로 여러 고통을 받은 거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족 중에도 전사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임을 천황이 지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시골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잖아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곤혹스러워한다고 할까, 상상도 못 해본 답변이라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도쿄외대에서 중국어과에 있었지만, 천황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 그 사람 이름은 '메타'였는데, 이때의 만남이 아시아와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갭을 느끼게 된 계기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내 인생의] 하나의 '전조'였다고 생각합니다. (22~23쪽.)

 

  역시 결정적 요인은 '국적 조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있었다면 졌을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국적 조항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피폭자 문제에만 국적 조항이 없는 이유도 살펴봤습니다. [국적조항은] 아동수당과 국민연금과 관련된 것에도 있고, 모두 후생노동성 소관이잖아요. 왜 피폭자만 없는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당시 피폭자는 공중위생국 기획과의 소관 업무였습니다. 전상병자戰傷病者는 인양원호국引揚援護局에서, 연금은 연금국에서, 아동수당은 아동가정국이 각각 담당합니다. 왜 (피폭자 문제는) 공중위생국인지 생각해봤습니다. (...) 정부 입장에서 피폭자는 전쟁 피해자가 아니라고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즉, 인양원호국이 소관하게 되면 국가의 책임 문제와 얽히게 됩니다. 여기에 공중위생국이 달라붙게 됩니다. 이 부분이 포인트입니다. 이 국은 결핵예방법이나 성병예방법 등 공중위생 전체를 개선하는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결핵예방법은 전염병인 결핵을 퇴치하기 위한 특별법입니다. [감염된 외국인을 치료하지 않으면 내국인도 위험해지니]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상대할 수는 없죠. 그래서 이곳이 소관하는 법률에는 국적 조항을 붙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전부를 커버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국적으로 배제를 하면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일의 성격과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공중위생국이 일을 가져가 처리했기 때문에 국적 요건을 부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7~49쪽.)

 

  (송두회 씨는―옮겨쓴이) 1910년 병합 이후에 태어난 것이죠. 그래서 편지를 읽어보니 취지는 이렇습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일본인이었는데 내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국적을 없애더니,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으로 만든 뒤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1947년에 일본으로 돌아왔으니, 전후에 입국한 셈입니다. 그러니 이른바 옛 식민지 출신자들에게 부여되는 재류 자격도 인정받지 못하고, 일반 외국인과 똑같이 정기적으로 재류 기간을 갱신하지 않으면 재류 자격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 비자를 연장한다는 둥 연장하지 않는다는 둥 지문을 찍으라는 둥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들어야 한다니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국을 상대로 내 일본 국적을 확인하는 소송을 하고 있다. 그러하니 여러 가지로 협력해줬으면 좋겠다"라고요.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와 논리였기 때문이죠.
  식민지 지배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삼고, 말과 이름도 빼앗고, 마지막에는 전쟁에까지 끌어냈으면서, 전후에는 표변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 국적을 상실시켰습니다. 일본의 국적법에는 본인의 의사 확인 없이 국적을 없앤다는 내용은 없는데도 국적 선택권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이니치 조선인은 지금도 일본 국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송 씨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성립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만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60~61쪽.)

 

  (...)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 후에 재판소에 제출한 청원서를 읽고, '과연 그렇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유소년기부터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에 한을 품고, 조선과 관련된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본인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소심하게 새가슴으로 살아가는 참담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맛본 취업 차별을 계기로 차별을 해소하고,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 조선인 변호사가 되겠다는 것을 목표 삼아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최고재판소에서 국적 변경을 요구받는 이 시점에 가볍게 귀화 신청을 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내가 변호사가 되려 했던 입각점[초심] 그 자체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뒤에 조선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되고, 조선인을 위해 변호 활동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자신에게] 말해보았지만, 귀화한 내가 어떤 모양으로 조선인 차별을 해소하는 문제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조선인이라는 점을 원망하며, 티 없는 어린 마음에 상처받고 있는 동포 아이들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강하게 살아가거라'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게 귀화한 사람의 말이라면, 과연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라고요. (98쪽.)

 

  거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대법정이니까 앞에 재판관 15명이 쭉 나란히 앉아 있잖아요. 그중 한 사람이 이즈미 도쿠지씨였습니다. 예전에 경득씨와 함께 최고재판소와 교섭했을 때 나왔던 임용과장이었던 그 사람이요. 그러니 이즈미 씨가 경득 씨의 최후의 의견 진술을 들을 수 있었던 거죠. 다음 해 1월에 최고재판소가 원고 역전 패소 판결을 내놓게 됩니다. 13 대 2였습니다. 헌법 판단을 피한 한심스런 판결이었지만, 원고 승소라는 '반대 의견'을 쓴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즈미씨였습니다.

  (나카무라 일성―옮겨쓴이) 재판관 출신인 최고재판소 판사가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전에 재판소의 직원으로 김 씨에게 귀화를 요청했던 이즈미 씨가 약 30년 뒤에 국적 조항에 따라 [관리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일률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외친 것이죠. 사람은 '만남'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그해가 저물 무렵인 12월 28일 김경득 씨는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추도집을 내게 되어 편집위원회를 발족해 내친김에 내가 편집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의 경위가 있으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하라고 씨에게 "선생님, 미안하지만 이즈미 씨에게 연락해 글을 한 편 써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려봐도 될까요"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직에 있는 최고재판소 판사가 일개 변호사의 추도집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해봐야 본전'이니까요. 그랬더니 이즈미 씨가 글을 써주었습니다. 놀랐습니다.
  (...) 처음 만났을 때 얘기도 적어주었습니다.
  "김 씨는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한 채로, '김경득'으로서 사법수습생이 되도록 채용을 신청합니다'라고 말했다. 강경한 어투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주먹을 쥐는 일도 없었다. 미소를 띠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나 씨름판에서 두 선수가 맞잡고 온 힘을 다해 겨루듯,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신념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다뤄온 경위나 이유를 설명하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가 벗어나게 되어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두 번 설득하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도 김 씨가 제기한 문제에 온 힘을 다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그 자리에서 각오를 정했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즈미 씨는 내면적으로 그런 태도를 취한 게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때 경득 씨와의 대화를 통해 이즈미 씨의 인생이 바뀐 것은 아니었을까요.(123~124쪽.)

 

  (...) 도쿄 고토구에 가톨릭 시오미潮見 교회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물려받은 프랑스인 콘스탄 루이 신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지문을 거부해서 여러 집회에 왔었죠. (...)
  (...) 법무성 직원이 루이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30년이나 일본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지문을 찍어왔잖아요. 왜 이번엔 찍지 않습니까?"라고요. 그랬더니 루이 신부가 말했습니다. "지금 찍으면 자이니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게 된다. 나는 가령 법률을 어기게 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찍어왔지만, 이번에는 찍지 않는 것이다"라고요. (...)

  (나카무라 일성―옮겨쓴이) 루이 신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한국·조선인, 중국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진 자로서 이미 많은 아이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는 지문날인제도를 인정해선 안 된다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별생각 없이 구청에서 지문을 찍는다면, 나는 그들을 차별하는 쪽에 서는 것이 됩니다"[루이 신부를 지원하는 모임 편 『기류하는 타국인으로서寄留の他国人として』(주오출판사, 1988)]. 차별을 앞에 둔 상황에서 사람에게 중립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차별이 있는 사회에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엄에도 상처를 준다는 선언입니다. 루이 신부도 기소되어 피고인이 되지만, 담당 검사가 루이 신부의 인격에 감동해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143~144쪽.)

 

  에다가와 재판 때 지역에 가서 함께 밥을 먹고 있으면, "왜 일본 분이 여기에"라며 진지하게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조선학교를 핵으로 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져 있잖아요. 거기에 [재판을 통해] 다양한 일본인이 관여하게 되면서, 전과 비교해보면 일본인과의 관계가 상당히 바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응답해나갈 것인가, 일본인들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식민 지배에 나서 이민족을 지배한 이상,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떤 모양으로 역사 안에서 소화해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생겨납니다. 문자 그대로 '불가역변화'[한번 이뤄지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식민지가 사라졌어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부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킬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또 예전에 이민족을 지배했던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할 때, 조선학교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일본 사회에 귀중한 자산입니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조선학교는 솔직히 말해 자이니치들에게 보물이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에도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한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정권 투쟁 때 봤던 문서인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버린 단일민족론과 순혈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고, 새로운 한국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것이 한국의 외국인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321~323쪽.)

 

  (...) '청구권'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인 피폭자나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소송이 있었을 때 일본 정부는 미국과 소련에 대한 청구권은 포기했지만, 이는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일 뿐 개인 청구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해왔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나왔을 때도 그 연장선상에서 당연한 문제라면서, 야나이 슌지柳井俊二 조약국장도 "일한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던 외교보호권을 상호 간에 포기한 것으로 ...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닙니다"(1991년 8월 2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라고 답했습니다. 이를 전제로 한국의 재판소가 판결한 것인데, 아베 총리는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봐도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웃음). 한국이 골대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일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지불한 무상 3억 달러입니다. 국회에서 이 돈의 성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외무상이 '독립축하금'(1969년 11월 19일 참의원 본회의)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래 놓고 3억 달러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하는데 이 또한 골대를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죠. (326쪽.)

 

교정. 1판 1쇄

23쪽 7줄 : 천왕이 -> 천황이

33쪽 각주14번 2줄 : 여려 명이 -> 여러 명이

213쪽 각주4번 2줄 : 상근 강사라는 -> 상근강사라는 (다른 부분과 띄어쓰기 통일)

291쪽 4줄 : 제2차 아베 정권

318쪽 밑에서 4줄 : 제2 아베 정권 (291쪽과 318쪽 표기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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