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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정찬, 창비,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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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정찬, 창비, 2022.)

Dog君 2023. 7. 8. 20:10

 

  죄의식과 역사적 책임감에 줄곧 천착한 정찬이 이번에 선택한 소재는 2차 대전기 일본군의 전쟁범죄입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어떻게든 역사의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저자의 마음이 느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되겠나, 하는 식의 체념도 느껴집니다. ('광야' 같은 데서 느껴지던 분노와 절규와 결기가, 솔직히 말해 제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훨씬 더 편합니다.)

 

  사실 정찬의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힘듭니다. 자고로 소설이란 이야기고, 이야기란 흐름에 따라 술술 넘어가야건만, 늘 고뇌하고 자책하는 정찬의 글에는 그런 무난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덮고 나면 꼭 무슨 장거리달리기를 한 것마냥 체력을 소모한 느낌도 듭니다. 더욱이 이번 소설에서는 방법은 제시하되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는 체념 같은 것이 느껴지다보니 책장 넘기기가 유달리 더 힘든 것 같네요.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 마음이 가장 무거운 소설이기도 하구요. (그럴거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꼬박꼬박 사서 읽는 저도 참... ㅋ)

 

  두 사람의 삶은 그들이 원한 삶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권력에 짓밟혀 종이 인형처럼 구겨지고 찢겨지는 것이다. 그들의 실존적 저항은 권력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저항할수록 그만큼 더 짓밟힌다. 권력은 개인의 실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인의 실존을 끊임없이 삼킴으로써 생명력을 증대하는 것이 권력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권력의 실존만 확인될 뿐이다. 「패왕별희」는 그런 불가능성을 역류하려고 만든 영화처럼 비친다. 여기서 「패왕별희」가 취한 서사 구조의 목적이 드러난다. 첸카이거는 뎨이와 샤오러우의 생애를 예술의 시선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래야만 권력에 삼켜진 개인의 실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존은 우희로 분장한 뎨이가 패왕의 칼로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꽃러럼 피어오른다. 첸카이거가 원작 소설에 없는 뎨이의 자살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한 것은 권력의 위력 앞에서 아버지를 부정해야 했던 자신의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65~66쪽.)

 

  "어느 봄날 아편에 취해 있던 할아버지가 장자 이야기를 했소. 자신이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소. 난 외할아버지가 아는 이들 가운데 드물게 깨끗한 사람의 이름이 장자이구나, 생각했소. 그런데 갑자기 물고기와 새 이야기를 해서 어리둥절했소. 그냥 물고기와 새가 아니었소. 둘레의 치수가 몇천리인지 모를 정도로 큰 물고기였고, 등이 몇천리인지 모를 정도로 큰 새였소. 그렇게 큰 물고기가 새로 변해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가면 파도가 삼천리 밖까지 퍼진다고 했소. 그 새는 여섯달 동안 구만리를 날고서야 비로소 내려와 쉰다고 외할아버지가 말했을 때 그분의 얼굴은 황홀에 젖어 있었소. (...)" (78쪽.)

 

  "위의 진술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피의 이미지는 야스쿠니의 존재성과 내밀히 연결되오. 천황주의자에게 국가는 곧 신이며, 국체를 대표하는 천황은 신인(神人)이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죽는 것, 그 피 흘림은 성스러운 행위라는 믿음이 야스쿠니 신아으이 본질이오. 그냥 믿으라고 하는게 아니오. 죽음에 엄청난 보상을 마련해두었소. 죽은 자의 영혼을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거룩한 공간인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는 것이오. 비참하고 덧없는 죽음을 성스러운 황홀의 죽음으로 변신시키는 마술이야말로 야스쿠니 신앙의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오. 삶과 죽음의 보편적 의미까지 해체하여 천황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킴으로써 일본의 침략 전쟁을 천황을 위한 성스러운 전재응로 변화시켰던 것이오. 미시마가 죽음을 통해 얻고자 했던 성스러운 황홀은 결국은 야스쿠니 마술이 불러일으킨 현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소. (...)" (159~160쪽.)

 

  언젠가부터 나는 장자의 몽상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까, 생각해왔소.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소. 장자가 나비일 수도 있고, 나비가 장자일 수도 있으니 말이오. 장자와 나비의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내 몽상의 실체요. 예를 들면 이렇소. '난징학살 심포지엄'에서 악몽의 경험을 증언했던 73세의 노인과, 그녀의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군을 장자와 나비의 관계로 만드는 것이오. 그녀가 일본군일 수도 있고, 일본군이 그녀 혹은 살해당한 그녀의 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와 살해당한 그녀 가족의 영혼 속에 일본군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가능성이 있지 않겠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소. 장자가 나비를 보듯이, 나비가 장자를 보듯이,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하오. 내 몽상의 괴로움은 희생자는 보이는데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소. 몽상이 실현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오.
  당신에게는 내가 희생자로 보이오, 가해자로 보이오? 오랫동안 나는 희생자라고 생각했소.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가 충분했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 존재 자체가 어머니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니. 그 고통의 절정이 어머니의 죽음이었소.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오. 그러니 가해자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겠소.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요. 내 몽상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당신은 눈치챘을 것이오. (240~241쪽.)

 

교정. 초판 1쇄
22쪽 밑에서 10줄 : 장궈룽이가 -> 장궈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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