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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엮음, 책과함께,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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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엮음, 책과함께, 2023.)

Dog君 2023. 7. 8. 20:08

 

  싸움구경이 재미있는 것은 독서도 마찬가지여서 하나의 쟁점을 두고 양측이 벌이는 논전만큼 읽기 즐거운 글도 드물죠. 하물며 그 대상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추천했던 책이라면야!!

 

  하지만 재미있게 책을 읽다가도 책을 덮을 즈음에는 약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재미있고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책 좀 읽었다는 셀럽들도 한결같이 추천했는데, 정작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정색을 하고 반론을 펼친다니요. 그럼 '선한 천사'를 재미있게 읽은 우리는 뭐가 되는 걸까요. 이런 것도 모르고 헤헤거리며 그 책 좋다고 읽었나, 우리는 왜 이렇게 비판정신이 부족한 걸까, 싶어서 괜히 혼자 민망하기도 듭니다.

 

  사실 비전공자 독자라면 누구나 그런 불안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거 참 재미는 있는데, 역사학계에서도 제대로 인정받는 이야기인가?'하는 불안감 말이죠. 그런 불안감이 이번에 드디어 제대로 적중한 것만 같습니다.

 

  나름 역사공부가 직업의 일부이고 역사책을 읽고 정리·소개하는 것을 오래 해온 제가 한말씀 드리자면, 그걸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는대로, 최종적이고 완결된 진리를 알려주는 단 하나의 책은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계속 책을 읽어 가면서 기존의 앎을 살찌우고 다듬어갈 뿐입니다.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겠다는 고집을 버리고 새로운 주장과 반론이 나올 때마다 그에 귀를 기울이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학자도 아닌데 당장 어디 가서 치열하게 논전을 펼칠 것도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는 황희 정승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열린 태도를 취하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제가 '선한 천사'를 읽고 나서 쓴 독후감의 일부를 가져와 볼까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20세기 이후의 폭력에 대한 역사적 성찰은 단지 많이 죽고 적게 죽고 하는, 양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물질문명과 합리성이,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돌아와서는 인간의 삶 자체를 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이니 '악의 평범성'이니 하는 '있어 보이는' 말들은, 어쩌다가 인간의 합리성이 도리어 인간 자체를 말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맥락을 빼버리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처럼 단지 통계적으로 사람이 적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성찰의 가능성을 닫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없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책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과거부터 우리가 해왔던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과 몇 십 년을 살지 못하고, 겨우 몇 주 전에 일어난 일도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는 필부에 불과하며, 지금 당장의 세상에는 납득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하지만, 분명 우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세상은 좀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러한 믿음과 신념과 낙관은,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촛불 하나 달랑 들고 묵묵히 광장으로 모인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악한 천사'가 '선한 천사'보다 훨씬 더 설득력있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이 입장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 글은 그 추운 겨울날에 손 호호 불어가며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던 나날의 와중에 썼습니다. '선한 천사'의 정치적 함의와 상관없이 저는 '선한 천사'를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는 동력으로 읽었고, 그게 아주 틀린 독법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가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어주느냐 아닐까요. 타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아집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힘을 주는 그런 독서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제시한 사례들은 폭력 연구 분야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핑커식 접근법의 근본적 문제점을 강조한다. 핑커는 폭력을 언제나 측정할 수 있는 정적인 것으로 본다. 반면, 학자들은 폭력을 사회적 태도가 변함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는 과정으로 본다. 한때는 용인되었던 것이 더는 용인되지 않게 됨에 따라, 도구로 쓰였던 폭력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에 조정·변모된다. 폭력의 형태와 관행이 변하고 새로운 기술이 종종 폭력의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근대 전쟁행위warfare의 역사에서도 너무나 잘 나타나고 있다.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스티븐 핑커와 역사에서 폭력의 본성」, 31쪽.)

 

  이와 같은 종류의 통찰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키고, 역사학자들이 당대 목격자들의 눈을 통해 폭력을 연구하는 경우 그들이 결국 매우 다른 일련의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폭력이란 실제로 무엇인가(《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어디에서도 제기되거나 답변되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폭력을 어떻게 인지하는가? 폭력의 목적과 기능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당대의 태도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감수성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가? 폭력은 언제나 "나쁜가"? 아니면 "좋은" 폭력, 다시 말해 회생적이고 창조적인 폭력도 있을 수 있나? 핑커가 이러한 질문 중 하나라도 진지하게 다뤘다면, 우리는 훨씬 더 신뢰할 수 있고, 정교하고, 흥미로운 책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
  독자들은 핑커와 [핑커에 대한] 갈수록 늘어나는 이구동성의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이 주로 각 학문 분야 사이 연구 방식의 차이냐, 발상 혹은 인간관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얼마간 일리 있는 관찰이다. 그러나 우리는 핑커에게 ―그의 물리적 데이터, 사실밖에 없다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의제가 있다고, 오늘날 강력한 의미를 함축하는 의제가 있다고 지금까지 힘들여 지적해왔다. 핑커의 책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를, 자유시장과 서구 문명의 압도적 유익을 옹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무역이 서구 세계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마찬가지로 그러한 이익이 나머지 세계의 희생으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착취로 달성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다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스티븐 핑커와 역사에서 폭력의 본성」, 39~42쪽.)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폭력violence"의 의미론적 축소는 핑커가 폭력의 대용물을 찾으면서 폭력적 행위와 (남성의) 유전적 성향을, 이 경우에는 분노회로 및 여타의 폭력기관器官을 통해 작동하는 성향을 결부시키기로 선택한 데서 비롯한다. 이렇게 했을 때의 문제는 명백하다. (...) 핑커의 정의는 형사사법제도로 처리할 수 있는 형태의 폭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편향성을 감안하면, 핑커는 공격자로부터 피해자를 향하는 벡터에 따라 폭력을 정의한다. 피해자는, 이 시나리오에서, 수동적이고 비非가시적이다.
  (...) [폭력의 해석에서] 피해자 중심의 관점을 취하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여러 소수집단이 오늘날을 폭력적으로 느끼게끔 하는 미시적·거시적 공격을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권한이 박탈된 사람을 상대로 작동하는 느린 폭력slow violence 혹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도 보이게 될 것이다. [인문학자] 롭 닉슨Rob Nixon이 말한 바처럼, 느린 폭력은 독성 화학물질, 해양 산성화, 해수면 상승과 같이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불균형적으로 고통받을 때 발생한다. 그것이 "느린" 이유는 폭력의 영향이 몇 분이 아니라 몇 년 혹은 몇십 년에 걸쳐 응결되고 그런 만큼 그것이 신문 1면을 장식하거나 범죄통계에 잡히지 않아서다. 결과적으로 느린 폭력은 강제이주와 공공연한 형태의 성적 강압, 지속적인 사회적 비하를 비롯한 더 광범위한 구조적 폭력을 구성하는 요소다. [의료인류학자] 폴 파머Paul Farmer가 지적하듯, "가난한 이들은 고통에 더 취약할뿐더러 그 고통에 대해 침묵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 가난한 사람이 사망하는 경우 그들의 죽음은 핑커의 표에서 사망자 수에 잡히지 않는다. 영양실조나 강제이주와 같이 그 죽음과 관련된 폭력은 전쟁과 범죄성criminality으로 임의적으로 한정된 폭력의 정의에 비가시적이어서다. [폭력의 해석에서] 피해자 중심의 관점을 취하면, 수많은 여성이 직장과 여러 공공 영역에서 비非치명적 폭력non-lethal violence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 [폭력에 의한] 외인사는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구조적 폭력에 의한 일상적 상해injury 및 모욕humiliation보다는 훨씬 낮은 비율로 경험된다.
  (...)
  그렇다면 이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살펴보자. 폭력이 감소했다는 것이 왜 중요해야 하나? (...) 핑커의 웅대한 사적 비전에서 폭력의 감소는 그 자체로 다른 것의 대용물, 말하자면 행복happiness의 대용물이다. [핑커에 따르기로] 폭력이 줄었으니 이제 사람들은 더 행복하다. 아니, 적어도 사람들은 더 행복해야만 하며, 저 망할 놈의 역사학자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하고 사람들한테 근대성modenity이 얼마나 나쁜 건지 설득하기를 중단한다면 그렇게 될 터다.
  (...)
  핑커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와는 반대로, 주관적 안녕은 폭력 같은 간헐적 체험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주관적 안녕은 특히 앞서 설명한 구조적 폭력을 포함한 수많은 구조적 요인의 영향을 영원히 받을 수 있지만, 주로 우리가 가족·친구·사물과 형성하는 애착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컨대 홍적세 때 살았던 남성 혹은 여성의 주관적 안녕은 따뜻하고 든든하고 보람 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는 경험에 의해서 결정되었지 집단의 객관적 상태인 빈곤에 의해서 혹은 밤, 간헐적 폭력, 축축한 땅 위에서의 수면 등의 위험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니얼 로드 스메일, 「《우리 본성의 선한천사》의 내면의 악마들」, 69~73쪽.)

 

  핑커의 주요 주장은 폭력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장기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이며 핑커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제시하는 정량적 증거quantitative evidence는 근본적으로 살인과 전쟁행위에 관한 것이다. 핑커는 아이스너를 인용하면서 살인이 신뢰할 만한 폭력 지표힘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이스너는 자신의 "분석은, 살인은 심각한 대對인간 폭력의 지표로만 조심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라고 분명히 밝힌다. 살인과 폭력 범죄 전반 사이 상관관계를 가정하는 것은 분명 타당해 보인다. 이와 같은 상관관계가 특정한 사회 내에서 매우 안정적일 것으로 예상하는 것 역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 사이 비교와 장기적 분석에서 그렇나 가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핑커가 범죄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류 역사를 망라하는 폭력 전반에 대해 전 지구적 차원의 주장을 펼친다. 핑커가 반드시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살인은 폭력 범죄에 대한, 더하게는 폭력 전반에 대한 훌륭한 대용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그런지] 우리는 알지 못하며, 그것이 이異문화 간 비교와 장기적 분석에 유효한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그 린드스트룀, 「스티븐 핑커와 폭력의 역사 기술에서 통계의 사용과 오용」, 82~83쪽.)

 

  많은 전근대의 살인율 계산이 실제로 얼마나 불확실한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잘 알려져 있고 더 자주 인용되는 중세 사례의 하나는 칼 I. 해머Carl I. Hammer의 14세기 옥스퍼드에 관한 연구로, 거기서는 살인율을 10만 명당 100명 이상으로 산출했다. 몽코넨은 당시의 [옥스퍼드의] 추정 인구수가 6000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는 곧 1~2건의 추가 살인사건이 살인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몇 년의 이례적인 해가 전체 결과를 쉽게 왜곡할 수 있음을 뜻한다. 더욱이 해머의 계산은 단지 4년치 기록을 기반으로 한다. 해머가 분석한 것은 6년치 기록이었지만 그는 그중 2년은 살인율이 상당히 더 낮아서 십중팔구 불완전할 수 있다고 결론내고 [그 2년의 살인율을] 빼기로 결정했다. 더 긴 기간에 대해 후속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몽코넨은 연대적으로 제한된 소규모 도시 인구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계산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또 그 계산이 얼마나 쉽게 높은 살인율로 과대추정되는지를 명백하게 실증해준다. (97쪽.)

 

  (...) 나는 핑커와 통계의 전장에서 싸우기보다 그의 책에서 개념적 결정 두 가지에 기초해 비판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결점에는 계몽주의를 철학 운동으로 보는 꿀 발린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의 인권은 분명 계몽주의에 의한 자유 및 개인권의 증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를 옹호했던 동일한 계몽사상가들은 인종과 젠더의 위계를 기준으로 인류를 분류하려는 충동을 통해 자유의 범위도 제한했다. (...) 그 주장들은 인류라는 종種의 본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탐구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 인간을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분리하는 것은 계몽사상의 중심에 있었고, 합리적[이성적]이고 진보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와 노골적인 폭력을 방조했다. 이 장에서 요점은 계몽주의가 완전히 틀렸다고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계몽사상의 핵심에 놓여 있는 복잡성과 모순을 인식하는 것인바, 이 모든 것을 핑커는 너무나 태평스럽게 무시한다. 우리가 인권이 더, 덜이 아니라 고취된 세상에 좀 더 가까이 도달하고자 한다면 계몽주의의 이면을 인식하고 그에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전 지구적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과 전 세계 이주민 및 난민의 엄청난 수를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두 번째 비판은 첫 번째 비판과 관련이 있다. 핑커는 자신의 두 책에서 특히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이행, 합리적[이성적]rational 사고의 중요성 부각, "문명화과정the civilizing process[Prozeß der Zivilisation]", 19세기 유럽의 긴 평화long peace와 같은 폭력의 감소를 나타내는 듯한 추세들을 모아 제시한다. (...)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핑커는 흑인 노예, 여성, 한국인, 그리고 여타 수많은 이가 현실 세계에서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영역을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던 힘겨운 정치적 투쟁 위로 날아오른다. 그러한 투쟁들에서는 종종 폭력의 발생 빈도와 강도가 엄청났어도 그 사건들은 살인율이나 현대에 벌어진 전쟁의 횟수에 관한 [핑커의] 통계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 이 사건들은 핑커의 세계관에는 아무데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우리의 관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바, 결코 인간의 조건이 ―핑커가 가정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개선되리라고 단순히 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에릭 D. 웨이츠, 「진보와 진보의 모순: 인권, 불평등, 폭력」, 111~112쪽.)

 

  마침내 1888년 5월 13일, 의회는 노예 해방법을 통과시켰는바 간단명료했다. (...)
  그러나 노예제 이후는 어땠을까? 많은 이의 희망에도 브라질의 전前 노예들은 미국의 해방된 노예들이 약속받은 땅 40에이커[약 0.16제곱킬로미터]와 노새 한 마리 정도의 가능성조차 보당받지 못했다. 브라질의 노예들은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했고,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엄밀하게 보면 자유롭지만 가난에 시달리는 개인으로서 다시 농장에 돌아가 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유산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
  브라질의 사회 불평등은 대체로 인종과 맞아떨어진다. 최상위측은 불균형할 정도로 백인이고―극단적으로 그렇다― 최하위층은 대부분 흑인이다. (...)
  이 모든 것은,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는 달리 공식적·법적 인종차별 및 분리segregation가 없었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도 부라질에는 강한 인종의식race consciousness이 만연해 있다. (...)
  역사는 스티븐 핑커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순적이고 복잡하다. 계몽주의와 인권의 영역에 개선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단히 중요하고 옹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성과들은 결코 한결같거나 꾸준하지 않았고, 아울러 선형적線形的, linear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더욱 평화롭고, 평등하며, 인도적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복잡성을 이해해야 하고, 삶이 항상 상승궤도상에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에릭 D. 웨이츠, 「진보와 진보의 모순: 인권, 불평등, 폭력」, 128~131쪽.)

 

  핑커는 1960년대의 미국이 비문명화되었다고 서슴없이 단언하면서도 그 개념에 영감을 준 사례인 나치 독일에 대해서 똑같이 하는 데에는 이상하리만치 저항한다. 실제로 핑커는 20세기 역사학자들에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확하며 엘리아스 본인에게도 평생 고통의 원인이었던 것―1933년에서 1945년까지 나치가 자행한 종류를 비롯한 국가 주도 폭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문명화과정이 끼친 영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엘리아스는 평생의 이력 동안 이 "독일 문제German question"를 해결하려 고심했다. 말년에 그는 《문명화과정》을 쓴 동기가 부분적으로는 나치의 부상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 이 주제에 관한 엘리아스의 가장 최종적인 진술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9년에 나온 에세이 모음집 《독일인에 대한 연구Studuen über die Deutschen》에 나와 있다. 이 글들에서 엘리아스는 나치즘Nazism과 홀로코스트를 독일 사회의 "퇴행regression" 또는 "재再야만화rebarbarization"로 규정했다―이후 논평가들은 이것을 일종의 "비문명화의 분출spurt"(독일어로는 Schub) 또는 반전反轉, reversal으로 해석했다. (...)
  엘리아스가 《독일인에 대한 연구》에서 제시하는 설명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수 세기 동안의 아비투스habitus[특정한 시간·공간·환경에서 사회적 문맥에 따라 형성된 사고, 인지, 판단, 행동 체계]가 그렇게 빨리 전복된다면 애초부터 그게 얼마나 실재하는 것이었을까?―그는 이론을 세우면서 《문명화과정》 자체에서 기술된 메커니즘을 통해 나치즘이라는 재앙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적어도 인정했다. (...) 반면, 핑커는 문명화과정을 마치 그것이 의도적으로 살인율에만 적용하도록, 달리 말해, 지금 돌아보았을 때 그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딱 한 가지 종류의 폭력에만 적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취급한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이론을 이용해 살인의 역사를 설명한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감소라는 추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핑커도 국민국가[민족국가]nation-state 범위 내에서 벌어진 이 "일대일 살인one-to-one homicide"을 (흔히 단일 국민국가[민족국가]가 "타인들others"에게 자행했으며 그래서 범죄통계에 잡히지 않은) 제노사이드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
  (...) 많은 역사학자가 주장해오길, 근대경제, 근대국가, 근대예절, 근대과학이 인류의 폭력 성향에 장기적 영향을 조금이라도 끼쳤다는 경험적 증거는 없다. 외려 학자들은 집합적 잔혹성collective brutality의 규모가 근대 사회조직들의 부상과 함께 극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 대對인간 폭력의 규모와 특성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해왔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함에 따라 그리고 일부 형태의 폭력이 감소함에 따라 어떤 형태들은 훨씬 덜 공개적이고 훨씬 더 사적인 것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폭력은 단순히 정량적으로뿐 아니라 정성적으로도 진화하고 변화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적 폭력의 형태들―특히 가정폭력domestic violence, 아동학대child abuse, 성폭행sexual assault 및 강간rape―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추정하기란 불가능한바, 사적 폭력들은 보고되지 않거나 상당한 정도로 축소된 채로 보고되기 때문이다. (...)
  (...) 오늘날의 유럽인은 예나 마찬가지로 대對인간 폭력을 불사하며 특정한 상황에서는, 지난 세기 많은 전쟁과 내전에서 본 것처럼, 자신들의 선조들만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문해력[리터러시]literacy, 세련된 매너, 국내·국제 경제시장 참여 등이 확산되었지만 지난 200년 동안의 살인율에는, 핑커는 반대로 주장했음에도, 별로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 (...) 엘리아스가 생각하는 문명화과정은 조건부적contingent이고 가역적reversible이다. 반면, 핑커는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개념을 실제로는 결코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용한다―자신이 추정하는 폭력의 장기적 감소를 설명하고 그것을 미래로 투사한다. 이것이 엘리아스를 노골적으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핑커는 엘리아스의 이론을 특별히 심사숙고해 이용하거나 지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다. (...) (필립 드와이어·엘리자베스 로버츠-피더슨, 「스티븐 핑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183~189쪽.)

 

  분명한 바는 과거의 폭력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사망자 수는 폭력의 정도에 대한 주요 척도로는 꽤 무디고 다소 결함이 있는 수단이며, 폭력을 단순히 숫자나 백분율과 같이 보편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무언가로 축소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 폭력적 죽음이 분쟁의 중요한 측면들을 전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폭력의 정확한 정도, 잔혹성, 영향 등을 이해하려면 폭력이 반복해서 일어났는지 여부 같은 폭력의 여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습 부상자들 곧 반복적으로 부상을입은 사람들에게서는 폭력과 분쟁에 대한 일회성 노출 대비 지속적 노출일 두드러질 수 있고 반복적인 폭력적 상호작용에서는 젠더 및 연령 편향성이 드러날 수 있다. 사상자에게 제공된 돌봄과 치료의 면면을 탐고하면 사회적 지원과 [개인들 사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전체 그림의 균형을 맞춰 폭력을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고찰할 수 있다. (...) 최근 스웨덴의 사례 연구에서는 단기적인 간병뿐 아니라 장기적인 사회적 돌봄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있는, 외상성 두부 손상에 의한 인지적·기능적 영향을 조사했다. 저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개인은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일부였으며 그 사회에서는 개인을 돌보는 것이 사회가 퇴화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린다 피비거, 「스티븐 핑커의 "선사시대의 무정부 상태"」, 220~221쪽.)

 

  (...) 핑커는 계몽주의 역사의 특징과 계몽주의가 실제로 무엇을 대표하는지 잘못 규정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18세기의 사상가들로부터 아무 이의도 제기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정합적 철학"이 결코 아니었다. 핑커는 계몽주의를 "이성"과 휴머니즘의 시대로 소개함으로써 반反계몽주의[대항계몽주의] 역시 잘못 특징짓고 있어서 자코뱅주의Jacobinism, 나치즘Nazism, 볼셰비즘Bolshevism 같은 이데올로기를 이성의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곧 핑커의 주장이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이성=폭력의감소이고 그런 까닭에 반反계몽주의[대항계몽주의]=이성에 대한 거부=폭력의 증가임을 뜻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공식들에는 폭력과 근대성에 대한 논쟁을 비롯해 많은 중요한 역사서술적 문제들이 무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의 이성과 인과관계에 대한 핑커의 발상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발상이 역사를 추동한다는 개념은 증명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이견이 분분한 반면, 살인과 고문 같은 일부 형태의 폭력이 줄어든 이유는 대개 평범하고 실용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유럽 강대국들에서 살인homicide과 사법 [체계 내에서의] 고문의 이용은 18세기 후반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 계몽주의적 생각thinking이 통계에 어떤 영향도 주기 훨씬 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반면, 다른 형태의 폭력 예컨대 노예제, 공개처형, 성폭행 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지난 200년 동안 일부 형태의 폭력에 대해 감수성의 변화가 있기는 했어도, 감수성과 실제의 폭력률 사이에는 입증가능한 상관관계가 없다. 폭력은 나치가 세상에 입증한 바처럼 미신이나 무無이성[불합리]unreason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완벽히 "합리적인[이성적인]"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훨씬 복잡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인간의 동기부여motivation에서 합리적인[이성적인] 것과 비합리적인[비이성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 (필립 드와이어, 「역사, 폭력, 계몽주의」, 265~266쪽.)

 

  (...) 역사학자들은 심술궂은 무리일 수 있는 법이라, 핑커의 책을 읽고 나자 자는 더 많은 특수성specificity과 더 많은 차이difference를 알고 싶어졌고 너무나 길고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주장에 미심쩍은 마음이 생겼다. (...) (낸시 실즈 콜만, 「역사의 복잡성: 러시아와 스티븐 핑커의 논지」, 299쪽.)

 

  근대 초기 일본에 대해 통용되는 서사는 평화의 시대가 19세기 중에 끝났다는 것이다. 상호 연관된 일련의 사건이 일본 안팎에서 발생했다. 서구 국가는 미국을 적대국으로 하며 수 세기 동안 서구와의 접촉이 거의 없던 일본에 불평등 조약을 강제했고, 이 조약으로 인해 일어난 도쿠가와 쇼군을 향한 분노, 제국주의 제도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 도쿠가와 가문 내의 승계 논쟁, 자연재해 및 경제난 등 이 모든 것이 극으로 치닫다가 번의 내전 발발, 봉기, 암살과 함께 마을 내렸다. 도쿠가와막부[1603~1868]는 1868년에 붕괴했고, 어린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이름으로 싸운 군에 대한 저항은 1869년까지 계속되었다(보신전쟁戊辰戰爭[무진전쟁이라고도 한다. 1868년 무진년에 일어난 에도막부 세력과 교토의 천황에게 권력을 반환하라는 막부 타도 세력 사이의 내전(1868~1869)이다]). 이 메이지유신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는지는 불명확해도 대략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마이클 워트, 「사망한 천사들의 명부: 비판의 렌즈로서 일본 역사에서의 폭력」, 342쪽.)

 

  (...) 손꼽히는 아스테카 연구자 카밀라 타운센드Camila Townsend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아스테카 사람들은 우리가 만든 책과 영화에 등장하는 아스테카 세계의 묘사에서 자신들을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묘사는 아스테카인들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낸, 식민주의적 캐리처커다. 우리는 너무나 "아스테카인을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그들을 잔인한 폭력을 자행할 수 있지만 깊이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들로, 서로를 죽이는 방법을 방명했지만 멋진 도시와 찬란한 예술작품을 만든 사람들로, 싸웠지만 글도 쓴 사람들로, 서로에게 잔인하게 굴었지만 함께 음악을 연주한 사람들로, "우리와 똑같이 한바탕 웃음"을 즐긴 사람들로, 결함도 있지만 다른 모든 점도 갖고 있는 온전한 사람들로 보고 [아스케타인을] 우리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핑커가 사용한 아스테카 멕시코의 전쟁 사망자 수는 따라서 몹시 과장된 수치다. 그러나 더 고질적인 문제는, 아스테카인게게 극도로 폭력적인 야만인이라는 오명을 씌우려 그 수치를 날조하고 전개하는 것이 오래되고 해로운 식민주의적 전통이라는 것이다. 나는 핑커가 그 전통을 영속시키려 의도했다는 것을 조금도 믿지 않으며 또 핑커가 널리 재생산되는 경멸적 묘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화이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핑커가 따라간 정보-문헌의 경로는 시작점과 끝점이 명백하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매슈 레스톨, 「폭력의 역사와 토착성: 스티븐 핑커와 토착 아메리카」, 408~409쪽.)

 

  핑커는 콜럼버스 이전의 근대 초기(식민지대)의 토착 아메리카인 사회를 왜곡하고 근대 토착 아메리카인들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현지] 선주민의 과거에 대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뒷받침하는 신식민주의적 인식을 영속화한다. 사라 버틀러가 언급한 대로 "핑커의 메시지가 대중에게 가닿고 우리 것은 그렇지 않다면", 토착 아메리카인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대중"의 모든 편견은 교육과 계몽을 통해 없어지고 있지 않고 강화되고 있다.
  (...)
  오늘날 아메리카대륙의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폭력은 모든 지역에 해당되지도 않고 모든 지역이 그 혜택을 보고 있지도 않으며, 수백 년 단위의 시간에서 보면 영구적 변화라고 보기에 충분하지도 않다. (...)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에 대한 제노사이드적 성격을 띤 최근의 전쟁을 연구한 학자가 관찰한 것처럼, "그러한 폭력은 극복된다기보다 잠시 잠복에 들어갈 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반反선주민 폭력이 전국적 수준에서는 주기적일지언정 국지적 수준에서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끊임없을 수 있다. (...) 토착 아메리카인 사회의 경우가 이렇게 덜 긍정적이고 덜 고무적이라면, 모든 인류 사회가 그런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의 승리, 핑커의 표현으로 단지 몇 세대밖에 안된 그 승리는 ―무섭게도― 일시적인 것이리라. (매슈 레스톨, 「폭력의 역사와 토착성: 스티븐 핑커와 토착 아메리카」, 417~419쪽.)

 

  핑커는 1945년 이후 "새로운 평화"의 시기에 전쟁이 감소했다고 강조하지만, 1965년 이후 도시 치안은 "도시 게릴라전urban guerrilla warfare"이라는 총력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
  핑커가 주장하는 이른바 "새로운 평화"와는 반대로, 1965년 이래 범죄, 마약, 테러와의 "새로운 전쟁new war"은 미국 국경에서 멈추지 않았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 정부는 치안 유지 활동을 전 지구적 대분란전 군사작전으로서 수출하고, 냉전시대의 군사전술과 전략이 미국으로 돌아와 도시 게릴라전에서 자국의 반란자로 인식되는 이들을 상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초국가적 계획을 수립했다.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자 스튜어트 슈레이더Stuart Schrader는 이 초국가적 연관성을 자신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했다. "전 세계에서는 대분란전이 치안이었던 반면, 국내에서는 치안이 대분란전이었다." 흑인 및 유색인 지역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식의 공격적 치안 활동은 사람들을 가두는 일이 수반되는 대량수감 및 수감폭력을 발생시켰다. (로버트 T. 체이스, 「천사들이 발 듣기 두려워하는 곳: 포스트 민권 시대 국가폭력으로서의 인종주의적 칭나, 대량수감, 처형」, 473~474쪽.)

 

  문학자 롭 닉슨Rob Nixon은 이 현상에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적절한 명칭은 인류가 직면한 다수의 환경 비상사태의, 닉슨의 표현에 따르면, "마멸적 치명성attritional lethality"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런 비상사태들이 지리적·시간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결과적 특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로 무시되고 있는지도 부각하난 딱 맞춤한 형용어구다. (...) 최근 몇 년 동안 학자들은 국가나 개인의 "개발development" 계획이 현지 지역사회의 보건·토지·물을 전 지구적 자본 혹은 중앙집권 정치 통제라는 더욱 광범위한 이해관계에 희생시킴으로써 환경 악화와 사회 불평등을 어떻게 주도해왔는지 거듭 강조해왔다. 그러한 계획이 그것의 영향을 받는 이들의 숙지 혹은 동의 없이 진행될 때마다, 그 계획들을 환경[에 대한] 폭력environmental violence("느린" 것이든 아니든)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 점점 더 일반적이 되었다. (코리 로스, 「어떤 자연의 선한 천사들인가?: 현대 세계의 폭력과 환경의 역사」, 497쪽.)

 

  (...) 핑커는 자신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자신의 논지를 약화시키는 것을 폭력의 범주에서 배제하면서 특히 자본주의, 인종주의, 국가, 과학과 관련된 현대의 구조적 형태를 축소한다. 갈수록 범위가 확대되는 환경파괴든, 독방감금solitary confinement의 대량고문mass torture을 비롯한 대량수감mass incarceration 체계든 상관없다. 핑커는 객관성―그 자체가 특정한 감정적 규범에 의해 단정된―이 냉철하고 과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고도로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투사한다. 확실한 것은, 핑커가 인지한 적들―핑커가 생태 및 사회정의의 전사들, 또 학문적 좌파the academic left라고 폄훼하는 이들이 이끄는―에 대한 그의 열정적 공격이 상당히 격렬한 감정의 암류暗流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수전 K. 모리시, 「냉철한 이성과 격정적 충동: 폭력 그리고 감정의 역사」, 552~5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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