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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계는 안녕한가요 (류과 외, 틈새책방,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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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계는 안녕한가요 (류과 외, 틈새책방, 2023.)

Dog君 2023. 9. 25. 14:59

 

  이 책은 목차부터 독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영화에 대한 책이라면, 게다가 그것이 저자의 첫 책이라면, 으레 등장할 법한 유명한 영화들이 이 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다 권할만한 영화겠지만, 저 같은 영화 문외한으로서는 제목조차 처음 들어본 영화가 반절 이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하지만 본격적인 평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화를 소재로 하여 풀어놓은 자기 이야기가 더 많죠. 〈결혼 이야기〉를 보고 나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이야기하거나, 〈판타스틱 소녀 백서〉에 자신의 10~20대 시절 이야기를 보태는 식입니다.

 

  그러니 저도 자연스레, 저희에게 역사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때는 짐짓 아는 척하며 책의 장단점을 평하는 평론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결국 역사책 역시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인가보다 하며 우리 이야기를 슬쩍 얹기도 하는, 그런 중간 어디쯤에 저희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석원 선생님이 이 책을 저희에게 추천하시면서, 팟캐스트를 책으로 옮긴 결과물로 참고할만하다고 하셨죠. 읽어보니 과연 그러합니다. 저희가 언젠가 저희 방송을 글로 정리할 일이 생긴다면, 이 책을 많이 참고할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영화 〈결혼 이야기〉의 시작을 다시 떠올려 본다. 찰리와 니콜이 서로의 장점을 말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행복했던 결혼 생활이 차곡차곡 지나간다. 장점이 운명인 줄로만 알았던 이 두 사람은, 사실 이혼을 앞두고 있다. 니콜은 부부 상담 과제로 종이 한가득 써 낸 남편의 장점을 차마 입밖으로 읽지 못한다. 그토록 사랑한 이유가 많았던 두 사람의 마주치지 않는 눈빛이, 멀리 떨어져 앉은 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대변할 뿐이다. '결혼의 끝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넷플릭스에 적힌 한 줄의 영화 설명은 우리에게도 분명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
  영화의 끝에 찰리는 아들의 부탁으로 극 초반 니콜이 읽지 못한 찰리의 장점에 대한 글을 읽게 된다. 찰리와 2초 만에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고 했던 니콜은 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혼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해 나 역시 그의 괴로운 인생에 함께 담보 잡힌 가여운 인생이라고 여겼다. 혹은 그런 거라고 자기 합리화하며 수동적인 안정감을 갈망했던 것일지도. (로사, 「지속 가능한 부부_〈결혼 이야기〉」, 86~87쪽.)

 

  또래들로부터 멀어질수록 높은 점수를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들이 빅뱅의 노래를 들을 때 나는 스웨덴 록 밴드의 음악을 들었고, 〈거침없이 하이킥〉 본방송을 사수하는 대신 유명하지 않은 영국 드라마나 소위 '예술 영화'들을 하나씩 섭렵했다. (...)
  '남다른 취향'에 기댄 정체성으로 10대 시절을 연명하고나서 대학에 갔다. 고대하던 오리엔테이션 첫날, 나는 머리가 띵하는 충격을 받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개성 넘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남들과 다르고 싶어서 취향이라는 지푸라기를 꽉 붙들고 살았던 고집이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취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대신, 여러 경험에 부딪히며 나 자신을 천천히 찾아갔다. 고된 아르바이트를 할 때나 또래들과 함께 취업 준비를 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날 성장하게 한 건 그런 순간이었다.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가 아닌,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라고 느끼는 순간들 말이다. 그런 순간들을 버텨 내어 쌓인 자산은 취향보다 훨씬 견고하게 나를 지켜 주고, 표현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 「10대 시절에 건네는 작별 인사_〈판타스틱 소녀 백서〉」, 127~128쪽.)

 

  누군가에게는 미소라는 인물이 터무니없는 판타지처럼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도 집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소를 제외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의 지리멸렬한 일상은 기시감이 들 만큼 지극히 현실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대비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 밖의 우리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소공녀〉는 답하기 어려운 여러 질문들을 남기고 있지만 작고 확실한 희망을 전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미소에게서 발견되는 희귀한 미덕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현명합이다. 이러한 태도만 갖출 수 있다면 완주 지점이 없는 마라톤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도시에서의 삶도 견뎌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독립 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관객 수인 6만 명이 극장을 찾고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것 또한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 (소피, 「욕망 구분 짓기_〈소공녀〉」, 150~151쪽.)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 5대5로 들어 있는 선물 뽑기 세트를 매일 열어 보는 것과 비슷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짝사랑을 떠올려 보면 된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느끼는 고통은 좋음의 크기와 정비례하지 않던가. 진심으로 대하는 만큼 다치거나 상처받을 가능성이 큰 것은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실망감이 반복되어 결국 포기하거나 냉소적으로 변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일에 쓰는 마음과 에너지를 든든하게 보상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꿈을 쫓는 사람들은 일을 짝사랑하는 셈이다. '꿈과 희망'이란 건 단어로만 존재할 때 가장 완전하고, 현실에서의 꿈이란 '노동'이라는 건조한 개념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노동은 우리를 자주 지치게 만든다. (소피, 「'일'복 많은 사람들에게_〈찬실이는 복도 많지〉」, 155쪽.)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을 보며 사실 사랑은 이제껏 내가 하던 것과 완전 반대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은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니라, 타인을 그만의 우주에 놓아주며 통제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너무 좋아서 나의 세계로 끌고 오고 싶은 욕망이 생겨도, 그 욕망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것이었다. (...) (또아, 「문어와 문어의 사람 친구가 끼친 영향에 대하여_〈나의 문어 선생님〉」, 238쪽.)

 

  죽음은 그 과정만큼이나 항상 준비 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누군가가 2022년 10월 15일에 죽을 겁니다, 라고 전달받는 대신 핸드폰을 하다 지인의 부고를 듣고, 졸다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숨을 느끼기도 한다. (...) 어쩌면 죽음이 일상적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고 아득한 말이 아니라, 너무나 가깝고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철저한 준비 없이 일상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그 과정도, 그 순간도 늘 일상과 함께 있다.
  영화 〈아워 프렌드〉도 큰 통곡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흐르다 참 시시하게 끝난다. 하지만 난 그게 죽음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과 닮아 있는 얼굴임을 안다. (...)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한부 환자도 이렇게 일상을 바라는데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값싼 자위는 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 아빠가 그랬고, 이름 모를 동치미 할아버지와 꿀꽈배기 아저씨, 그리고 영화 속 니콜과 매튜, 데인이 그랬듯이 그저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만을 유지하기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또아, 「내일도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_〈아워 프렌드〉」,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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