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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지역사회 (박찬승,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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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지역사회 (박찬승,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3.)

Dog君 2023. 10. 2. 15:41

 

  매년 보는 한가위 보름달이 조금 지겹게 느껴진다면 망원경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망원경으로 보면 같은 보름달도 새삼스럽다. 보름달에 방아 찧는 토끼가 보였던 것이 실은 달 표면의 높낮이와 밝기 차이로 인한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자연이나 사물에서 익숙한 패턴을 찾아내는 심리 현상으로, 변상증이라고도 한다)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역사도 이와 비슷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도 새로운 렌즈를 들이대면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지역’이라는 렌즈가 있다. ‘한국사’의 범위를 ‘한국’ 대신 ‘지역’으로 좁혀보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에 끝난다. 하지만 당시 경남 하동 지역에 살았던 내 할머니의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은 좀 다르다. 할머니에게 한국전쟁은 1950년 7월 말쯤에 나타난 국군 패잔병으로 시작되어 약 두 달 뒤에 쫓기듯 도망가는 인민군으로 끝난다. 전라도에 살았던 사람의 한국전쟁은 이와 또 다를 것이고, 다른 동네 사람들의 한국전쟁은 또 그것대로 다를 것이다.

 

  〈혼돈의 지역사회〉는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역’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본 결과다. 한국 근현대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식민 지배의 질곡에도 치열하게 전개된 민족운동·사회운동의 결과로 간신히 해방을 맞았지만 극심한 좌우 대립 끝에 한국전쟁으로 동포끼리 죽고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무엇 하나 무심히 잊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근현대사에도 ‘지역’이라는 렌즈를 들이대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목포와 나주, 영광, 강진·능주(화순)의 근현대사가 빼곡히 담겨 있다. 이들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서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공간과 사람들이 훨씬 생동감 있게 설명되어 독자의 시야도 자연히 깊어진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목포의 시가지 구조가 전통과 근대, 조선인 거주지역과 일본인 거주지역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중 도시(dual city)라는 점을 쉬이 꿰뚫어볼 것이고,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재편성된 호남 지역사회와 그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조선인 자본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해 보이는 해방 직후의 좌우 갈등도 문중 간의 오랜 길항관계와 식민지 시기 사회운동의 연장선에서 훨씬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전쟁기 전남 지역 전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영광에 집중된 까닭을 알고 나면 도서(島嶼) 지역이라는 영광의 지리적 특성과 근대 시기 영광 지역 사회운동 세력의 동향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도 간파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촘촘히 설명된 이 책을 읽고 나면 근현대사에 흩어진 구슬 서 말이 하나의 보배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많은 인명과 지명이 등장하고 서술도 압축적이라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주눅 들지 말고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꼭 이 지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 책과 같은 방식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내 고향과 내 동네가 적잖이 달라 보일 것이다. 범상하게만 느껴졌던 내 주변의 풍경과 공동체가, 실은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

 

  (...) 목포에 와 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근대성을 과시함으로써 조선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근대성을 가지고 들어온 일본인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꺾어 놓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목포 시가지의 남북촌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차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식민지시기 목포의 도시 경관을 살펴보았다. 목포의 도시 경관은 일본인 거주의 남촌과 조선인 거주의 북촌이 여러 측면에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이중도시'(dual city)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중도시의 모습은 당시 목포만이 아니라 부산, 인천, 마산, 군산 등 과거 개항장이 있었던 곳에서는 대동소이했다. 또 경성이나 대구, 평양과 같은 전통도시에서도 개항장만큼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이중도시의 모습은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와 같은 이중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식민지 도시의 가장 두드러진 공간적 특성으로서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현상, 즉 '이중도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왔다. 식민지 도시는 토착집단에 대한 외래집단의 지배의 공간이었고, 양자의 문화적 이질성은 사회적, 공간적 '격리'(segregation)으로 나타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토착민들의 자생적 주거지는 전통적, 전근대적 성격을 띠었고, 식민권력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주거지는 근대적, 서구적 성격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식민지 권력은 외래 식민집단의 주거지를 토착민의 열악한 주거공간과 분리시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문명'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중도시는 일제 식민권력의 의도적인 정치적 기획의 산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개항장 목표의 남촌과 북촌이라는 이중도시도 앞서 본 것처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목포는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도시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권 108~109쪽.)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 「중앙토지행정처령」을 발동하여 귀속농지를 분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신한공사 목포지점은 귀속농지 관리국 목포지방국으로 바뀌었으며 분배한 토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사후 관리를 하고 있었다. 1949년 9월 현재 목포지방국의 현황을 보면, (...) 전남 일원 4개시 19개군 239개면을 통할하고 있으며, (...) 보성강발전소를 관리하여 년 1,400만kw를 발전하는 등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상권 205~206쪽.)

 

  이들 지주들이 짧은 시간에 소유 토지를 크게 늘려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물론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계속 늘어나면서 쌀값이 지속적으로 올라가 지주경영을 하고 있던 이들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일인 지주들은 이윤의 대부분을 토지에 재투자하고 있었다. (...)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리대였다.
  일본인 지주들은 대부분 고리대를 통해 돈을 벌고, 이를 토지에 투자하여 점차 땅을 넓혀가고 있었다. 영산포의 일본인 상인과 지주들은 대부분 대금업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금업자는 부동산을 전당잡고 자금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말 일본인 대금업자들은 신용대부보다는 담보대부를 주로 하고 있었다. 저당물은 주로 토지, 가옥, 귀금속이었다. 그리고 대금업을 하는 일본인들은 이른바 '저당유질(抵當流質)'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는 변제기간을 넘길 때, 즉시 담보물을 차지할 수 있도록 매도증을 받은 뒤에 대부하는 방법이었다. (...) 이와 같은 금융방법은 일본 중세 이래 가장 많이 사용되던 방법이었으나, 그 방법이 영세한 채무자에게는 매우 불리하여 근대 이후에는 저당권 설정방식으로 바뀌어갔고, 일본 민법 제정 시에는 저당유질 계약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국에서 금지된 금융거래 방식을 통해 조선에서 토지를 대량으로 '점령'해가고 있었다. (상권 258~260쪽.)

 

  1930년대 이후 나주의 농민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을 보면, 해방 이후 나주의 농민들이 왜 그렇게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는지, 그리고 좌익의 폭넓은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나주의 경우 소작 내지 자소작농이 전체 농가의 9.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나주군 전체의 인구가 약 16만 명 가운데 세궁민이 전체의 40%를 넘게 차지하고 있었던 기본적 이유가 되었다. 소작 내지 자소작농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이 지역에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가 그만큼 많았던 것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1930년대 농가경제의 피폐화와 혁명적 농민조합의 고양이라는 상황에 대처하여 일제 지배당국은 자작농창정계획, 소작조정령과 조선농지령의 반포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주-소작관계라는 지배적 생ㅅ나관계와 고율소작료를 그대로 놓아둔 채 갈등만을 줄이고자 한 이러한 정책은 현상의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상권 435~436쪽.)

 

교정. 초판 1쇄

상권 136쪽 10줄 : 이응준 -> 이용준

상권 138쪽 밑에서 7줄 : 목상, 정명 두 학교 -> 정명, 목상 두 학교 (앞에 나왔던 표기 순서를 따름)

상권 139쪽 1줄 : 독립가와 만세를 외치면 -> 독립가와 만세를 외치고

상권 139쪽 7줄 : 강구자하는 -> 강구하자는

상권 139쪽 11줄 : 광주학생사건에서 관련된 조선인만 학생만 다수 검거, 수감하는 것은 민족차별이 편파 가혹한 처사라 하여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어색한 문장)

상권 139쪽 밑에서 2줄 : 전달하여 -> 전달하고

상권 142쪽 7줄 : 보안법위반 -> 보안법 위반

상권 183쪽 밑에서 1줄 : 순창출신으로 -> 순창 출신으로

상권 186쪽 밑에서 4줄 : (위원장 : 김문수) -> (위원장 김문수)

상권 193쪽 1줄 : 부숴졌다 -> 부서졌다

상권 259쪽 밑에서 1줄 : 부동산을 전당을 잡고 -> 부동산을 전당잡고

상권 263쪽 1줄 : 1985년 -> 1895년 혹은 1885년

상권 302쪽 밑에서 2줄 : 반남 소작인회 -> 반남소작인회

상권 404쪽 10줄 : 목포의 시위는 광주에서 경찰병력이 추가로 파견되어 군중을 시킴으로써 진정되었다. (어색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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