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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의 세계사 (박현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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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의 세계사 (박현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Dog君 2024. 4. 3. 15:48

 

  범상하게만 보았던 소주를 학술적으로 다룬 책입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소품이지만 그 범상한 쐬주 한 잔도 수천년의 역사가 누적되어 있으니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는 그 중에서도 (물론 방송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燒酒'와 '燒酎'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은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두 단어는 흔히 증류식과 희석식의 차이로 설명됩니다. 희석식은 근대에 개발된 연속증류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燒酎'라는 표기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들어온 것이죠. 그러니 '燒酒'와 '燒酎'의 구분에는, 지금 우리가 흔히 마시는 값싼 희석식 소주는 전통식으로 만들어진 증류식 소주와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셈입니다.

 

  어느 동네에 가건, 어느 메뉴를 찾건, '원조'와 '진짜 원조' 식당이 몇 집씩 난립하는 한국이라서 그럴까요, 우리는 유독 '전통'이나 '정통', '원조' 같은 것에 민감합니다. 거기에 식민지 경험이나 중국·일본 같은 주변국이 끼어들면 민감도는 훨씬 올라갑니다. '燒酒'와 '燒酎'를 애써 구분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식민지 잔재'를 언급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겠죠. 뭐, 그뿐인가요. 공원에 심어놓은 벚나무에도,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에도, 혹시라도 식민지의 흔적이라도 묻었을까봐 도끼눈을 뜨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리는 것처럼 문화란 본디 교류하고 현지화하는 역동적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구상 어느 한 지점에서 '원조'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일방적으로 전파되어 수용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몽골의 교역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된 증류주 전통이 한반도에서 소주로 태어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다시 조선시대의 가양주 문화를 통해 다양한 맛과 형태로 이어진 것처럼, 근대에 도입된 연속증류법 역시 지금 우리의 소주에 누적된 수천년의 역사 중 일부로 그냥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 소주의 역사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으며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던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와, 목 짧은 소주병에 심지를 박은 '꽃병'을 날리던 민주화운동과, 학교 앞 좌판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울고 웃었던 우리의 서툴렀던 기억까지 (ㅋㅋ;;) 그 모든 것이 소주 역사의 일부분이겠죠. 기억해야 하고 기념해야 하고 역사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애초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서툴렀고 심지어는 부끄러워서 지우고 싶은 것들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역사이고 그 역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ps. 꼭 역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법적으로도 증류식과 희석식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주세율 등이 동일하기 때문에 2013년 4월 5일 주세법 일부개정을 통해 구분이 사라지고 '소주'로 명칭이 통합됐거든요.

 

  이 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증류주와 관련된 특정 역사적 맥락 속에서 관련 사회의 구성원들이 문화 요소를 어떻게 만들고 소비하며 그로부터 혜택을 받았는지 살펴보고, 증류주와 함께 관련 문화적 아이디어와 기술이 아프로·유라시아의 다른 지역들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보고자 한다. 이러한 전근대 사회를 간의 연결과 교류는 궁극적으로 지금의 글로벌 사회가 형성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따라서 이 책은 '전파'와 '현지화'라는 두 가지 문제에 중점을 둔다. 증류주 전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전근대 유라시아 역사 전체에서 그 기원과 발전을 보면서 문화 교류와 관행, 기술의 전파 가능성이 새로워진 몽골 시대까지 추적해 봐야 한다. 특히 원나라와 고려에 동시에 퍼진 소주는 전근대에 문화 간 교류를 통해 유라시아에서 한반도로 전파된 물품의 대표적인 사례연구를 제공한다. 소주가 한국 사회에 정착한 후 증류주를 만드는 재료와 방법은 현지화되었다. 이는 소주가 독특한 한국적 특성을 가진 증류주로 발전하게 했고, 20세기와 21세기에 더 넓은 세계로 역전파되도록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요컨대, 한국 음식문화의 대표 주자인 소주는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문화와 기술의 교류가 번성하는 환경에서 처음 발전했고, 이러한 특성 덕분에 소주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관찰하기에 이상적인 문화적 품목이다. 궁극적으로 소주의 사례는 세계화 과정이 서구보다 아시아에서 더 일찍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소주 연구는 세계사 분야의 선구자 제리 벤틀리Jerry H. Bentley가 주장한 바, 즉 전근대시대에 커다란 역사적 동향에서 문화 간 만남이 다양한 사회의 문화적 패턴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해 재편된 새로운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사례연구가 된다. (...) (24~25쪽.)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료들과 고고학 발굴에 대한 새로운 비교조사는 증류 발전의 실제 상황이 단순한 선형 전파가 아니라 보다 역동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수 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교류와 무역 관계를 통해 아이디어와 무역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다양한 전통이 상호작용했다. 증류 발전에 참여한 모든 지역은 전근대 무역로를 통해 연결되었고 지중해 지역의 아락,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아락arak/arrack, 중국/한국/일본의 샤오죠우/소주/쇼츄(아락이라고도 함) 및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아르히 등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증류주 전통을 발전시켰다. (59쪽.)

 

  얼마나 많은 사회에서 증류 기술이 독자적으로 발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중요한 점은 소수가 특정 시점에서 증류의 개념을 발견했다가 널리 퍼지기 전에 잊혀진 경우에는 발명의 의미가 그만큼 축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서 술을 증류하는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을 개발하여 증류주를 널리 보급시켰는지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은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증류법이 중국 등 다른 곳으로 보급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지프 니덤과 그 동료들의 업적 덕분에 이제는 서양보다 중국에서 먼저 수은을 정제하는 데 증류 기술을 사용했고, 서로 독립적으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두 가지 일반적인 증류법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증류기들도 마찬가지였다. (...) 인도의 증류법도 중국식 또는 서양식 증류법과 기술적으로 다르며, 더 오래되었을 수 있다. 최근에 한 학자는 신대륙의 사람들이 도기로 된 증류기를 이용한 증류법을 독립적으로 개발했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독립적으로 처음 개발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근대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 아이디어 및 상품이 이동하고 전파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다양한 증류 기술이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증류의 기능과 이점 및 그 중요성이 의료, 사회적 의식의 메커니즘 그리고 취함의 수단으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술이 전통 기술에 지속적으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류의 범위가 확대된 특정 시기와 사회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혼합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증류 기술과 증류기를 만들어 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66~67쪽.)

 

  (...) 카르피니Giovanni de Plano Carpini와 윌리엄 루브룩을 비롯해 몽골제국 시대에 몽골인의 특성을 관찰한 이들은 몽골 생활 방식에서 술은 필수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몽골인들은 군사적으로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해 가면서 정복한 지역에 자신들의 음주 문화를 소개했다. 삶에서 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몽골인들은 제국 신민들의 삶에도 술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필연적이지 않았더라도, 몽골인들의 발효주가 다른 문화로 전파되도록 했을 것이다.
  (...)
  그러나 몽골인들은 군사 원정에 나설 때마다 쿠미스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쿠미스는 연중 젖이 풍부한 봄과 여름에만 얻을 수 있었고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맑게 걸러진 검은 쿠미스조차도 쉽게 상해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몽골인에게는 문제를 일으켰다. 평화로운 목축 기간과 쿠릴타이와 같은 행사 기간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원정 기간 동안 쿠미스가 부족해지는 것은 몽골 통치자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폴로는 몽골인들이 쿠미스를 일상적인 음료로 마셨으며, 그들의 자손, 동물, 농작물을 보호해 주는 지상의 신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올리는 종교 의식에서 쿠미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몽골인들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쿠미스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증류 기술을 이용해 쿠미스를 도수가 높은 증류주로 만들어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몽골 군주는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따르는 자들에게 나눠 줄 쿠미스와 같은 술을 증류했을 가능성이 크다.
  몽골인들이 증류 기술을 개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통치하에 있는 다양한 민족과 사회의 기술을 잘 활용하고 문화 교류를 촉진한 데 주목할 때 당시 중국에 존재한 증류 기술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인들은 증류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포로나 군인에게 맛이 강하고 보존하기 쉬운 쿠미스를 증류하도록 했을 수도 있다. (...) 뷰얼은 몽골인들이 개선된 중국 전통 증류기에 익숙해지면서 주로 암말과 낙타의 젖으로 만든 발효유를 증류하기 위해 점차 솥 또는 관을 활용해 증류액을 모아 새로운 쿠미스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 주장한다. (99~102쪽.)

 

  (...) 이시진은 증류의 기원이 원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증류주인 샤오죠우를 만드는 것은 고대의 기술이 아니라 원대에 처음 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국에서의 샤오죠우 및 증류주의 기원에 대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송대의 『국본초』와 기타 사료들에서는 증류주가 동남아시아로부터 원 이전, 대체로 송대에 중국에 소개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을 잇는 명왕조 때 사람인 이시진은 아마도 몽골 시대에 증류주가 급속히 퍼졌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몽골-원 시대의 주류 발전과 관련하여 중국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주요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양조 및 증류 문화를 통합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몽골인들은 군사 원정에 가져갈 휴대용 증류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증류주 제조소를 활성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음주 문화를 보급하는 데 기여했는데, 여기에는 많은 중국인과 외국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던 칸의 궁정에서 거행된 전통 의식도 일조했다.
  이러한 문화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원나라의 황제들은 다양한 증류법을 보급했는데, (이 주장을 한 학자들을 신뢰한다면 한왕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중국의 증류 기술과 해상 접촉을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증류 기술을 모두 사용해서 샤오죠우와 아락을 생산한 중국 남부의 증류 문화를 아우른다. 이렇게 전통 증류법으로 만든 샤오죠우와 외국 증류법으로 만든 아락 간의 상호 기술 교환 과정 덕분에 원나라 때 증류주가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 (106~108쪽.)

 

  (...) 많은 연구에서 몽골의 평화 시기(팍스 몽골리카)에 중국과 이란, 인도, 유럽 간에 이루어진 문화 교류에 대해 논의해 왔으나, 긴밀한 정치적 관계와 지리적 근접성을 고려할 때, 고려만큼 대원 울루스와 더 많이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었던 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 몽골의 문화 요소들이 고려 사회에 대규모로 활발히 전파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 유라시아 전역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문화 간 접촉의 결실은 고려 사회를 유라시아의 서부 지역과도 연결하여 문화적 전파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앞 장에서 증류주의 발전이 서부 지역의 증류 아이디어 및 기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또 몽골인들이 광범위한 유라시아 지역 사람들에게 증류주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을 가능성도 보았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 방면에서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종속적인 가신국이자 혈연관계를 통해 광범위한 국제 정치체계 속에서 여러 계층의 고려인들이 원나라 사람들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상호 간의 전례 없는 문화 교류를 끌어 냈다. (174~175쪽.)

 

  당시 몽골인과의 긴밀한 접촉은 고려의 식문화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서긍도 고려 중기(12세기)에 송나라의 외교사절 단원으로 고려에 다녀와서 쓴 견문록에서 고려 술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려 사람들은 불교 신앙 때문에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왕과 관료들을 제외하고는 양과 돼지 고기를 먹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도축 기술도 좋지 않다록 증언한다. 그러나 몽골인의 육식 문화가 고려로 전해져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면서 사냥 문화의 부흥과 축산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평민을 위한 육식 공급도 늘었다. 중국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현지 승려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고려 승려들조차도 이러한 문화적 변화의 영향을 받아 호화로운 삶을 즐기며 고기 요리를 먹었다. 이러한 식문화의 변화는 육류와 더 잘 어울리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의 소비를 증가시켰을 수 있다. (197~198쪽.)

 

  (...) 일본인들은 용어를 중극 증류주인 샤오죠우燒酒와 비슷하면서도 새롭게 바꿨는데, 여기서 '술'을 의미하는 '酒' 자를 도수 높은 술을 의미하는 '酎' 자로 대체했다. 한국 기업들도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소주'로 발음되는 '燒酎'라는 용어를 받아들여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발효제 누룩 대신 흑국이라는 일본 효모를 강제 도입한 것도 전통 한국 소주를 만드는 과정에 큰 변화를 끼쳤다. 비싸면서도 품질이 불안정한 누룩 대신 검은콩으로 만든 저렴하고 안정적인 흑국을 사용하게 된 것은 한국 전통적 증류법을 한층 더 쇠퇴시켰다. 1923년에 99퍼센트였던 누룩 사용률은 1932년에 5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일본 학자들이 쓴 『조선주조사』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를 한국의 소주 산업이 체계화되고 상업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보았지만, 이후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단순히 전통 소주의 쇠퇴를 촉발했다고 주장한다. (274~275쪽.)

 

  1960년대 이후 근대 산업식 소주 소비가 증가하게 된 암울한 사회적 배경도 살펴보아야 한다. 즉, 급격한 경제 발전 속 노동자들의 고된 삶과 박정희 독재정권하의 절망이 그것이다.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은 힘겨운 일상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주류 시장을 장악한 값싼 공장 생산 소주와 전통 탁주인 막걸리를 마셨다. 이 시기에 대규모의 산업식 소주 제조 공장이 많이 세워졌다. (280쪽.)

 

  과거와의 연관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안동소주'가 한국과 중국의 전통 소주와 샤오죠우의 한자인 '燒酒' 대신 '燒酎'를 사용하는 것은 의아하다. 독한 술을 의미하는 '酎' 자는 일본에서 쇼츄燒酎를 가리킬 때 사용되어 왔고, 20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근대 산업식 소주와 함께 한반도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酒'와 '酎'가 중국어에서는 각기 '죠우酒'와 '조우酎'로 달리 발음되지만, 한국어에서는 동일하게 '주'로 발음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철자 오류'는 1980년대 정부가 추진한 민속주 부흥의 한 형태로 안동소주가 급부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 때문일 것이다. (...) 다른 많은 무형문화재와 민속주도 실제 역사적 배경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추진의 결과로 급부상했다. (282~283쪽.)

 

교정. 초판 1쇄

98쪽 1줄 : 바트도르지 바트자르갈

293쪽 각주 60번 : 밧도르지 바쳐르갈 (98쪽과 293쪽 표기 다름)

145쪽 6줄 : 기원를 -> 기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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