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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산 (안치운, 한길사, 2022.) 본문

잡冊나부랭이

침묵하는 산 (안치운, 한길사, 2022.)

Dog君 2024. 4. 22. 10:05

 

  식민지기 한국 등반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산악인 김정태와 그의 기록을 주로 다룹니다. 등산을 잘 모르는 저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김정태는 한국 현대 등반의 역사에서 "태산준령"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는군요. 한반도의 여러 이름난 봉우리를 초등初登하며 일본 산악인들과 경쟁했다고 전하죠.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세간의 통설에 맞섭니다. 해방 이후에 김정태가 쓴 여러 기록을 분석하여, 식민지기 그의 활동에 대한 그의 모호한 서술에 오류와 왜곡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김정태는 본디 조선총독부에 충실히 부역했던 사람이지만 그러한 오류와 왜곡 덕분에 해방 이후에는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산악인으로 스스로를 분칠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렇게 정리하면 이 책이 왜곡되었던 기존의 서술을 꼼꼼한 사료 비판을 통해 바로잡는 역작...으로 보입니다만, 글쎄요, 저는 이 책에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습니다.

 

  김정태를 비판하는 기준이 당위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일단 마음에 걸립니다. 이 책이 김정태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한 논거는 그가 식민지를 살아가던 당시 조선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산에 오르는데만 열중했을 뿐 그의 글 어디에도 당대의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공감이 안 보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김정태와 그로 대표되는 한국 등반 역사의 문제는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설명하면 끝나는 걸까요. 저는 이런 식의 당위적인 주장은 효과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으며 설사 김정태가 당대 조선인들의 상황에 대해 엄청난 공감능력을 보여주었다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목표가 식민지기의 등반 역사를 보다 근본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있었다면 가장 중요하게 논증했어야 하는 것은 산악인 개개인의 인식이 얼마나 좁았느냐가 아니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왜 그렇게나 높은 산을 초등하는데 집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와 더불어 사람들을 산으로 보내려고 했던 이유를 식민지기의 관광정책의 문제 및 철도망의 확충이라는 면에서 다루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저자도 이런 점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거든요. 하지만 책 말미에 아주 잠깐만 등장할 뿐입니다. 당위적인 비판을 반복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분량을 채우다가, 정작 가장 먼저 전제했어야 할 내용들은 책 말미에서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 것은 너무 아쉽습니다.

 

  반면 김정태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내용이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중복되는 것은 된다는 느낌입니다.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후렴구까지 빠짐없이 다 부르는 느낌이랄까요. 노래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글쓰기에서까지 후렴구를 모두 반복할.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김정태에 대한 당위적인 비판과 서술 분석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중복과 반복을 거듭했는데, 그것의 절반 정도라도 식민주의와 권력이 고산의 초등初登에 집착하고 이를 통해 제국의 논리를 재생산했다는 문제에 할애했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를 앞으로 이동시켜서 모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짜임새가 좋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오탈자와 비문이 많고 모호한 서술도 많아서 내용 파악도 쉽지 않습니다. 책 전반적으로 만듦새가 썩 좋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등반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당시 한국의 지리와 인류학을 깊이 연구한 문화인류학자이자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된 산악인 이즈미 세이이치의 『머나먼 산』이 마침 최근에 번역되었으니 이 쪽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근대 등반의 역사에 드리운 국가주의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영화 《노스페이스》(2008)도 추천합니다.

 

  (...) 조선총독부는 (...) 1942년 2월 14일, 조선체육진흥회라는,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이후 조선 내 스포츠 부문을 통제하고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되는 황국 신민을 연성하기 위한" 관제 체육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국민총력연성을 내세워 도·부·군·읍·면에 각 체육진흥회를 설립했고,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의 "모든 체육활동을 주도, 통괄 관리"했다.
  그 사이에 조선산악회는 조선총독부의 지속적인 지원 아래, 조용한 발전을 거듭했다. 김정태는 좃너산악회에 가입하고 활동한 바를 토대로 조선 산악인들 가운데서 우월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조선체육진흥회 경성부 체육진흥회는 백운대 등을 비롯해서 수차례 등행연성을 했고, 1943년 1월 24일 제7회 백운대 등행연성에서 김정태는 타츠미 야스오辰海泰夫라는 이름으로 지도와 강의를 맡았다. 100여 명이 참여한 이 등행연성의 목표는 "건민건병健民健兵이 속히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비록 총은 메지 않았을망정 북방수호의 용사에 지지 않는 연성"이었고, 이 등행단의 지도는 김정태 즉 '타츠미 야스오'가 담당했다. (55~56쪽.)

 

  김정태는 태어날 때부터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등반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그는 피식민지 조선인으로 살명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변형하면서 산악인으로서의 삶의 연대기를 쌓았다. 그는 인문과 윤리의 가치를 먼저 세워 삶을 그 안에 예속시킨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삶을 살면서 영민하게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나갔다. 김정태는 산에 오르면서 산을 생각하지 못했다. 산은 그가 좋아하는 바깥 이상이었다. 산이 삶의 한구석이 아니라 광장이 될수록 김정태는 삶의 본연을 잃어버렸다. 김정태, 그는 경쟁이라는 등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잃고, 그것이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 끄트머리에 허위의 덮개를 씌웠다. 그는 시대를 역행할 삶의 의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반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산으로 나아갔지만 산의 메아리는 듣지 못했다. 산에 오르는 일이 언어를 면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김정태는 말하고, 글 쓰고, 책을 출간하면서 자신을 구제하려고 했다. 근대 산악인이라는 명예를 얻고, 지위를 누리고자 했던 그는 늘 불안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글로 쓴 것보다 쓰지 못한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조직한 단체들을 사회에 통합하고 싶었다. 김정태의 삶에 공식이 있다면 산 앞으로 걸어가고, 산을 올라 산을 통과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 흔적을 초등이라는 기록으로 남겼고 자랑스러워했다. 일상적 삶을 제외한 언어, 그것이 그에게는 등반이었다. 하여, 김정태의 삶과 등반은 서로 외면했다. (...) (113~114쪽.)

 

  1899년에 개통한 경인선을 비롯해서 1905년 경부선, 1910년 경원선과 호남선 등 조선의 철도는 일본 "제국의 욕망이었고 야심을 실현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제국의 욕망을 확장하고 전시하는 것과 같았다.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가 맨 먼저 파견한 것은 측량사를 비롯한 철도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의 발과 손은 식민지 조선을 떡 주무르듯 했다. 그들은 조선의 산하를 ㄱ여계 없이 다닐 수 있었고, 제국주의 행로를 확장하기 위하여 철도를 설계했고, 뱀처럼 기차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철도 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실험한 것이며, 제국주의 횡포의 시작이었고, 뒤엉킨 식민지의 모순이었다.
  (...)
  1930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총독부가 황국 신민화를 위한 체력증진 등을 내세워 등행·등산을 적극 장려하기 시작했다. (...)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일본 철도성 소속이면서 알피니스트였던 가와카미 마에다河上壽雄, 카가미 요시유키各務良幸를 초청해서 금강산 암벽등반 홍보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일신보』 부사장이었던 박석윤과 함께 금강산 집선봉과 비로봉에 올랐다. 대표적인 친일파 박석윤은 1927년 7월, 조선인 최초로 몽블랑에 오른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조선산악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침탈을 위한 철도를 따라 밟으며 조선의 산하를 추적했다. 이이야마 다츠오를 비롯해서 당시 조선산악회를 만든 재조 일본인 회원들 대부분이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재조 일본인 기업에 근무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철도는 근대 도시의 설계자였고, 식민지 지배의 대표적인 실체였고, 상징이었다. (...) (122~125쪽.)

 

  1970년대 산악계 중심에서 조금씩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김정태의 민족주의 등반이라는 수식어는 날로 팽배해나갔다. 특히 김정태는 1970년대 해외 원정 등반의 실패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때 그의 민족주의 등반론은 근거 없이 확장된다. (...)
  김정태는 이런 사고가 "독점적인 영웅주의, 서구적인 장비를 사용하고 서구식 등산을 하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기분만의 서구식 등산 즉 주체성 없는 외래 등산의 모방" 탓이라고 했다. (...) 김정태는 이러한 민족적 주체성을 내세우는 등반이 "거족적이고 국가적인 배경으로까지 확대된다"고는 했지만, 그것이 그가 경험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통치와 덜불어 제국주의 등반 이념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184~185쪽.)

 

  김정태는 이날(1940년 11월 3일―옮겨적은 이), 등반을 마치고 내려와 주형렬이 운영하던 충무로의 다방 '미나토'로 갔다. 종로 쪽에 살았던 김정태는 11월 3일 등반을 한 다음, 현란하고 번화한 일본인 거리 진고개(本町, 충무로)에서 놀았다. (...) (250쪽.)

 

  제국주의 역사에서 가장 거칠고도 무자비했던 일본 앞에서 조선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땅을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허락 없이 산하를 오를 수도 없었다. 산 아래 조선 민중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시절, 빼어난 등반을 구가할 수 있었던 김정태는 어떤 생각으로 산에 오르려 했는가? 일본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일본인들 중심인 조선산악회에 가입해서 백두산·금강산에 오른 연성 등반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조선산악회가 일본 제국주의 엘리트 알피니스트들의 모임이라고만 단정하기 어렵다. 백두산 연성 등반에 참여했던 김정태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인들이 앞장서서 오르고, 그는 등반에 필요했던 안내인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조선산악회가 조선의 산하를 순수하게 음미하기 위해서 연성 등반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즈음 교토제국대학, 와세다대학 산악부가 히말라야 등반을 연습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와 백두산·금강산에 등반한 것도 다른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52쪽.)

 

  (...) '연성'練成이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 총동원 체제에서 가장 크게 필요했던, 전쟁에 나가는 이들의 체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용어였다. "연성이란 연마육성의 의미로, 체력뿐만 아니라 사상, 감정, 의지 등에 이르기까지 천황에 충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전쟁에 동원되는 병력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일본 제국주의, 황국 신민화를 위하여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 일본 제국주의의 연마는 단련성과 철저성을, 육성은 자발성과 발전성을 내세워 일제강점기 동안 학교와 사회 곳곳에서 강제됐다. 그리고 개인 단위가 아니라 집단 체조나 교련, 운동회 등 집단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산행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한 연성 도구의 하나였다. 그렇게 해서 일차적으로는 동원을 위한 체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했던 바고, 연성을 통하여 식민지 체제에 저항할 수 없도록 하는 정신적 순치로 이어졌다.
  연성으로서 산행은 "식민지 지배권력이 인간을 자원으로 간주하고, 모든 개인을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노동력 및 군사력으로서 파악하고자" 한 도구였다. 그런 산행의 총체를 일컬어 등행登行이라고 했다. 연성을 위한 등행, 이러한 식민지 총동원 체제를 위한 산행의 실체는 오늘날까지 한국 산악계가 중시하는 집단규율화와 같은 전통으로 이곳저곳에 깊게 남아 있다. 1970년대 대학 산악부는 규율과 선후배 관계를 중시하면서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했다. (279~280쪽.)

 

  알피니스트들은 개인의 등반 기록을 수집하고, 제국주의는 그것들을 제국의 힘으로 전시하고 이용했다. 그 결과, "정복이 성공할 때마다 국가적 자긍심은 배가되었다. 기업가들은 정복 시도가 있을 때마다 긴밀히 협조했으며, 등반 탐험은 각 국가가 개발한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수단이 되었다. ... 그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엄청난 규모의 원정팀, 수많은 산소통, 긴 고정로프, 엄청나게 많은 고지 짐꾼들이 도우언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오스트리아-독일의 낭가파르바트, 이탈리아의 K2 정복에는 중추신경 각성제인 암페타민도 사용되었다. 모든 나라가 '8,000미터급' 고봉을 최초 정복하고자 했다." 이처럼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고산을 정복한 제국주의 알피니스트와 제국은 힘없는 나라들에 접근해서 산에 깃발을 꽂아 소유하고 정복한 선택된 나라, 존재들이었다. (372쪽.)

 

교정. 제1판 제1쇄

114쪽 6줄 : 김정태 삶에 -> 김정태의 삶에

122쪽 밑에서 5줄 : 조선총감부 -> 통감부

136쪽 5줄 : 노구치 재벌財口財閥 -> 노구치 재벌野口財閥

144쪽 밑에서 8줄 : 덴노 헤이카 반자아 -> 덴노 헤이카 반자이

146쪽 밑에서 2줄 : 오가오 -> 오가와

181쪽 5줄 : 와다나베 -> 와타나베

279쪽 14줄 : 강제했다 -> 강제됐다

281쪽 밑에서 3줄 : 당시를 -> 당시의

293쪽 밑에서 1줄 : 193년 -> 1937년

311쪽 밑에서 1줄 : 상연된 -> 상영된

342쪽 밑에서 6줄 : 다쓰오 -> 다츠오

363쪽 7줄 : 산익인들과 -> 산악인들과

397쪽 6줄 : 아니였으며 -> 아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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