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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리뷰오브북스 13호 (알렙, 2024.) 본문

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13호 (알렙, 2024.)

Dog君 2024. 4. 23. 17:14

 

  이번 호는 '민주주의와 선거'를 주제로 한 특집호입니다. 기획의도에 맞추려면 총선 이전에 읽었어야겠지만 제 특유의 게으름 때문에 이제서야 읽었네요;;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들 합니다만 정말로 선거가 민주주의적 정치를 완벽히 구현하는 수단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문자 그대로 유권자[民]가 주인[主]이 되는 체제라면 유권자의 생각이 고르게 반영되어야 옳겠지만 선거는 그 많은 생각들을 단 몇 개의 선택가능항으로 좁혀버리기 때문이죠. 특히 이번 총선은 워낙에 강고한 구도 하에 치러지다보니 사실상 선택가능항이 두 개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싶고, 정작 선거 과정에서 논했어야 할 정책이나 전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기 어려웠죠. 물론 당면한 시대적 과제(정권심판...)와 양분화된 권력구조를 앉은 자리에서 멀쩡히 초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만, 그런 사정을 다 인정하더라도 마음 한켠이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하나 확실한 것은 선거만으로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를 모두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선거의 틀에만 갇힐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고가 기표용지의 기호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리북의 서평은 하나 같이 묵직합니다. 선거 제도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포퓰리즘의 문제, 추첨제 민주주의, 정체성 정치, '1962년 체제'가 규정한 한국의 정당 질서 등 쉬이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고급스러운 화두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화두들을 잠시라도 머리 속에서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유권자인 우리 하나하나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한층 더 올라갈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계승범의 『모후의 반역』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으로 촉발된 일련의 논쟁입니다. 『모후의 반역』은 저희도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이 책에 대한 오수창의 비판과 계승범의 반비판이 이어지면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약간 논쟁이 과열된다고 판단했는지, 급기야는 계간 『역사비평』의 편집진이 개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는데, 역사학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 연구자들끼리는 꽤나 웅성웅성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논쟁의 당사자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야 논쟁이 뜨거울 수록 재미있는 법이니(...) 이 기회에 광해군와 '인조반정'을 둘러싼 (박터지는) 싸움을 관전해보시는 것도 핵꿀잼이겠습니다.

 

  자유와 평등 원칙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운영되는 나라에서는 '차별 없는 차이의 인정(recognition of differences without discrimination)'이 구현되는 사회를 지향점으로 삼는다. 정부가 특정 집단을 다른 집단에 비해 우대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의견이 묵살되어서는 안 되고,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 보수 정당을 지지하건 진보 정당을 지지하건 그냥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약속은 우리 모두가 뜻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것이 아니다."(65쪽)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 평등하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는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다' 혹은 '너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등 국민이 아니라) 이등 국민이다'라는 뉘앙스의 담론이 정치권에 확산된다면 민주주의는 이미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망가져 가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양태를 띤다.
  (...)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정의하기가 어렵듯, 포퓰리즘 개념 역시 정의하기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은 오용 및 남용의 위험성이 높은 개념인데, 특히 한국에서는 정치인 및 정당의 선심성 공약을 포퓰리즘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어서 정치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포퓰리즘은 선심성 정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왜곡된 형식인 포퓰리즘은 특정 정책들의 총합으로 간주하기 어려운 고유의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포퓰리즘은 일부 국민들이 자신이 품고 있는 정치적 불만을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그 불만 해소를 공약으로 내세운 신예 정치인을 지지하는 운동 혹은 이념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정책을 만들다 보면, 일부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입법 과정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불만을 품는 국민들이 존재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갈라지는 부분은 바로 이 불만이 모든 국민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착각부터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자신의 불만을 공유하지 않는 일부 국민들을 '진정한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행동을 낳게 되어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계 이민자들의 유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그 불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동등한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행위, 여성에 비해 남성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동등한 국민으로 존중하지 않는 행위 등이 포퓰리즘의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된다.
  포퓰리즘이 발아하면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정치권에서 자리잡게 된다. 일부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선출된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지지자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정책을 펴려고 한다. 이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배척 대상이 된다. 혹시라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지지율이 낮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사의 신뢰도에 의구심을 제시한다. 혹시라도 국회의원 선거 혹은 지방 선거에서 패배하면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한다. (...)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자신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한다. 포퓰리즘이 진영 논리와 맞물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불문율인 다양성 존중은 폐기된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고 평등 원칙 역시 훼손된다.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함께하는 '일등 국민'과 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등 국민'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하상응, 「차별 없는 차이의 인정: 민주주의에 정답은 없다 - 『민주주의 공부』」, 4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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