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1945년 해방 직후사 (정병준, 돌베개, 2023.) 본문
농담 반으로 말씀드리자면, 정병준 선생님은 책 길게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시죠. ㅎㅎㅎ 분야가 현대사이다보니 시간적 범위도 불과 몇 년 정도에 불과한데 아니 그걸 이렇게까지 촘촘하게 써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분량을 만드시나 싶습니다. 최근에 내시는 책들은 그나마 '정상적인' 분량으로 나오나 싶었는데, 이 책이 당초 『김규식 평전』의 4부로 기획되었다는 언급 부분에서는 저도 순간 휘청-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ㅋㅋㅋ
하지만 이어 진담 반을 보태자면, 엄청난 분량은 정병준이라는 역사학자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비교적 일찍 미국(특히 미국국립기록관리청NARA) 소재 한국사 자료에 주목한 이래로 방대한 사료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활용해 온 저자의 태도는 역사학자로서의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관점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다음 세대 연구자로서 정병준 선생님의 성실함에 무한한 존경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성실함만큼 이 책에 가득한 것은 저자의 짙은 울분과 탄식입니다. 해방 직후 몇 달 간 이어진 역사적 우연과 편견들, 그리고 몇몇 기회주의자들의 준동에 대한 저자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내내 진하게 묻어납니다. 차분하고 성실한 역사학자의 마음 속에서 끓고 있는 거대한 용암 덩어리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현대 한국의 원형'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는 이 때의 경험이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모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저자에게 현대사 연구는 현실적 모순의 원인을 찾고, 결국에는 그 해법을 찾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현실에 대한 의분이 저자에게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겠지요.
저는 여기서 218회에서 읽은 『청명상하도』와 이 책을 견줘보게 되었습니다. 『청명상하도』에서는 연구대상에 대한 순수한 몰입이 연구의 자양분이었다면, 이번에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꼭 어느 쪽을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병준 선생님의 책은 역사학자로서의 성실함과 시민으로서의 문제의식이 만났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결과물이라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이런 미덕은 요즘 같은 어지러운 시국에 유독 더 돋보입니다.
여운형은 총독부와 협의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8월 15일 친일 협력적인 치안유지회의 성격을 건국준비위원회로 완전히 전환한 것이므로, 건준은 짧게는 8월 10일부터 8월 15일까지 여운형-총독부 간 협의의 귀결이었으며, 길게는 1943년 8월 이래 여운형의 건국 준비 활동의 종착점이었다. 바꿔 말하면 여운형은 이미 구상하고 있던 '건국 준비' 작업을 시기와 기회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총독부의 친일적 치안유지 협력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여운형의 장점이자 특기였지만, 정적들에게는 유연함을 넘어 기회주의적이고 친일적인 태도로 공격받는 빌미가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제 일제의 통치와 해방의 공간이 연결되었으며, 총독부와 여운형 양쪽이 타협한 결과 건국준비위원회가 탄생했다.
건준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한 결과 탄생했지만, 『데미안』의 유명한 문구처럼 조선총독부의 체제와 식민 통치의 공간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태어난 것이다. 새로 태어난 건준이 어디로 가게 될지는 시대와 조건에 달려 있었다. (69쪽.)
이상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이 알려진 후 총독부는 종전 대책에 분망했다. 총독부는 조선인 고위 관리, 친일파 등을 동원해 여운형과 접촉하며 치안유지회 등의 타협적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송진우 그룹과도 협력을 모색했으나, 거절당했다. 8월 15일 일제 패망이 현실화되고, 소련군의 38선 이남 진주 가능성이라는 위기가 팽배하자,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5개 조는 사실상 주요 행정권의 이양 혹은 포기를 위미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희망하거나 계획하지도 않았고, 평소라면 절대 동의하지도 않았을 여운형의 5개 조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5개 조건은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논의·타협 과정의 산물이었는데, 총독부가 구상하고 있던 치안유지 협력책과 정치범·경제범 석방 계획에 여운형이 적극 찬성하고 식량 사정 확인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자 실질적으로 주요 행정권을 이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합법적으로 간판을 걸고, 안재홍이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을 하는 순간 전국에서 일본의 경찰치안과 행정력은 마비되었고, 한국인 관리 및 경찰은 잠적했다. 그 공간을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보안대가 장악했다. 실질적인 권력의 이양이었다.
이로써 치안유지회 혹은 치안유지협력회라는 타협적조직을 구상했던 총독부와 여운형의 논의는 도연 여운형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 출범으로 대변신하게 된다. 즉 여운형은 합리적으로 총독부에 대처하면서, 한국인들을 해방의 공간으로 아내했다. 반면 이러한 과정은 해방이라는 공간이 일제의 통치와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자적이고 단절적인 공간이 아니라 일제 통치가 변형·변용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동시에 한국인들의 해방·독립·건국의 열망 속에 위치하고 있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공간이었음을 의미했다. (83~84쪽.)
"성난 파도와 같은 조선 민중의 정권획득 움직임", 이것이 바로 여운형과 건준이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현대 한국이 기억하는 해방의 공간은 한국인들이 전찻길에 운집해서 만세를 부르는 유명한 장면으로 대표된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8월 15일이 아니라 8월 16일에 촬영된 것이다.
8월 15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회견을 마치고 곧바로 건준 수립에 착수했지만, 서울 시내는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12시에 천황의 옥음(玉音)방송이 있었다. 전파 잡음이 심했고, 히로히토가 궁중에서 쓰는 용어로 연설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일본의 패망이 한국의 해방과 독립의 길로 연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도 땅에 엎드려 울었다. '일본제국이 패전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5년 전쟁으로 일본과 자신을 일체화했던 한국의 청년들도 '모국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이 비통해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서울은 물론 부산, 평양, 만주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5시에는 히로시마에서 폭사한 의친왕의 아들 이우(李鍝)의 장례식이 경성운동장에서 조선 주둔군 주관 육군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아베 노부유키 총독,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등이 참석했다. 평온하고 일상적인 하루였다. (87~88쪽.)
하지는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 수뇌부가 여러 차례 전시 회담과 협상을 통해 미국·영국·소련·중국이 다자간 국제 신탁통치를 전후 대한정책으로 합의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스탈린·장제스가 합의한 신탁통치라는 큰 틀에서의 결정이 어떻게 구현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을 대체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고위급 결정과 합의는 없었다. 하지는 점령지역인 남한의 평화와 안전 확보, 주둔군의 조속한 철수,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결합된 인종주의적 편견, 반소·바공적인 태도 속에서 상황 대응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다양한 우연적 요소가 결합되었고, 임기응변적 판단은 곧 정책적 판단과 장기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205쪽.)
미군은 9월 8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9월 9일 일본군 항복식이 개최되었다. 상륙 사흘째인 9월 10일 오후 5시 30분 연합군 기자단 환영회가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 하지 중장을 비롯한 24군단 고위 장교들과 연합군 기자, 특파원, 통신원, 군사실 요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묘묵은 『코리아 타임스』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해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그 유명한 악의적 연설을 했다. 『주한미군사』(HUSAFIK)는 이묘묵 박사가 "훌륭한 영어로 연설"을 했다고 기록했다. 이묘묵은 8쪽 분량의 연설 원고를 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 이묘묵은 한국 정부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된 자인데, 누구나 다 인정하는 항일혁명가였던 여운형을 친일파·공산주의자로 무고한 것이다. 총독부의 돈을 받아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주장과 소련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묘묵은 여운형과 안재홍에게 욕설이란 욕설은 죄다 퍼부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프레임과 선입견을 뒤집어씌우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218~219쪽.)
윌리엄스의 발언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불러일으킨다. 일개 군의관이었던 윌리엄스 소령이 한국의 정부 수립, 장군들의 행정부 운영 능력 등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 직후 미군정 수뇌부의 행정적 무능과 정책적 판단 능력 부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하지 등 주한미군 고위 장교들이 모두 행정 업무에 무능했으며, 사실상 멍청이였다는 평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는 시기와 방법은 주한미군과 미군정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워싱턴이 연합국과 전시 외교를 통해 합의한 방침에 따라야 할 사안이었다. 또한 하지가 1946년 3월까지 정부 수립을 약속했다는 점도 진주 초기 미군정 내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우극(愚劇)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는 그런 약속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그런 권한도 없는 상태였으며, 미군 지휘체계상 고위급 정책을 실행하는 말단의 집행자였을 뿐인데도 최고위급 정책 결정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미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SWNCC 등이 제시한 점령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특정 정치 세력을 육성·지원하거나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하지는 진주 초기부터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239~240쪽.)
즉 베닝호프와 윌리엄스는 기독교 선교사의 아들이라는 공통점, 미국 선교사들이 수십 년 동안 한국에 기여한 업적과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미군정하에서 더욱 확산·정착시켜야 한다는 믿음,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놓였던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및 정치 역량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불신과 저평가, 그리고 미군정 내에서 유례가 없는 그들의 결정적이고 중요한 위치 등을 종합한다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복음주의적 사명과 의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기독교 선교사의 아들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확고한 반소·반공의식을 한 축으로 하고,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식 제도에 대한 확신을 다른 축으로 한 이들의 신념체계는 미군정의 수뇌부가 이견을 가질 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미국적 사유체계였다. 게다가 이미 반세기 전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뿌려놓은 기독교 복음의 씨앗들이 교회·학교·병원·문화단체 등의 기관 및 관련자와 미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뿌리를 뻗은 상태였다. 선교사와 그들의 아들들을 활용하고, 선교사가 한국에 세운 교회·학교·병원·문화단체의 네트워크와 인맥을 활용한다는 기획은 미군정이 손쉽게 접근하고 동의할 수 있는 군정 정착의 방안이었다. 윌리엄스와 베닝호프는 미국 사회에서 전혀 기억되지 않는 평범하고 "아무도 아닌 자들"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미군정 경험은 기억되지 않을 정도의 단기간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되지 않는 "아무도 아닌 자들"이 미군정 진주 직후 자유재량적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경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닝호프는 하지와 윌리엄스를 중심으로 결정되고 추진된 미군정의 정책, 사실상 한민당과 연희전문, 기독교,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동조하거나 동화되었다. (...)
(...) 전반적으로 미군 진주 초기 상황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가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냈고, 이때 결정된 정책이 이후 3년간 미군정을 이끌어가는 관성과 동력을 만들어냈다. 표면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선의의 준비 부족론, 미군정에 대한 고위급 정책 결정의 부재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미 미군정의 정책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토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한 선교사들의 반세기 넘는 노력과 투자가 한국의 교회·학교·병원·문화단체에 확산되어 있었고, 이와 연관된 한국 내 네트워크와 인맥이 미군정에 협력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미군의 진주는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커밍스의 지적처럼 미국인 지도자들은 한국 점령에 있어서 악의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음모가들도 아니었고,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악인이나 위선자가 아니었으며, 진지하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확신했다. 문제는 이들의 인식이 미국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한국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52~255쪽.)
이미 건준·인공이 사실상의 정부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여운형은 민중의 지도자로 명성과 지지를 얻고 있는 반면, 한민당은 어떤 대중적 지지나 정당성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확실한 힘의 우열, 대중의 지지와 냉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민당의 전략은 여운형과 인공을 험담하고 근거 없는 모략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공 대신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임시정부와는 아무런 연계도 없었으며, 사실상 인공을 타도할 때까지만 임시정부를 활용하는 전략을 수립한 상태였다. 한민당은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워 친일·공산정권 인공과 여운형을 타도한 후, 임시정부가 들어오기 전에 미군정의 실권을 차지한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한민당의 송진우는 이승만 입국 후 인공 타도를 위해 임정 정통론을 적극 내세우되, 일단 임시정부가 귀국하고 정국이 정리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에 합의한 바 있다. (290쪽.)
(...) 하지와 윌리엄스 등은 한국인의 판단 능력은 미성숙하다는 불신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침투·전복활동에 대한 두려움을 결합하고 확신함으로써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어떠한 거리낌이나 의문도 품지 않았다. 하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동의 변두리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자신과 미24군단 병사들이 남한에서 조기 철군해야 한다고 확신했는데, 이를 위해선 경찰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육성하는 한편 보수주의적 정치 지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정무위원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민주의원 등으로 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는 이들을 훌륭한 보수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라고 불렀지만 하지가 실제로 육성한 것은 해방 후 남한의 정치 지형에서 극우파에 해당하는 세력이었다. (355쪽.)
종합하면 진주 1개월 만에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용도 폐기, 인민공화국 부정, 임시정부 지지·귀국·활용을 결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군정 예하에 통합고문회의, 전한국국민집행부, 정무위워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과도정부를 조직하기로 했다. 10월 중순 하지는 도쿄에 가서 맥아더, 앳치슨과 회동하며 신탁통치안 반대와 미군정 예하 과도정부안을 설득했고, 계획의 중심인물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다. 같은 시기에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과도정부안을 들고 국무부를 설득하기 위해 워싱턴행 여정에 올랐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10월 20일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신탁통치가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이라고 밝히자, 10월 3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이는 분명 거짓말이자, 그의 권한을 넘어선 발언이었다.
나아가 하지는 10월 28일과 31일에 각각 이승만과 송진우를 불러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와의 면담 후 이승만은 신탁통치가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며 그 대안으로 민족통일을 완성해야 하고, 독촉중협이 민족통일의 구심체라고 발언했다. 송진우 역시 신탁통치는 빈센트의 개인 견해이며, 하지가 "조선 사람들이 결속하여 독립할 만한 힘을 보여주면 이제라도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했음을 밝혔다.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을 부정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겠다는 하지의 발언은 믿기 힘들 정도인데, 하지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릴 위치나 입장도 아니었고, 그런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결속해 독립할 만한 힘을 보여준다는 것은 독촉중협으로 정당을 통일하라는 의미였다. 독립을 승인하겠다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이 시점에 이르면 하지는 거짓말과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 부정, 권한을 넘어선 공약을 내세울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361~362쪽.)
사실 하지에게는 독자적인 정책 결정 권한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미군 내의 전설적 인물인 맥아더의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General Headquater, US Pacific Forces)의 예하에 있었으며, 맥아더의 상급자인 합동참모본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야 했다. 그는 육군원수 맥아더가 지휘하는 방대한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예하 여러 개의 군(Army) 중 10군 예하에 있던 24군단 사령관에 불과했다. 군사적 결정은 맥아더와 합동참모본부의 권한이었으며, 외교적 결정은 국무부와 3부 조정위원회의 권한이었다. 권위적이며 신적 존재였던 맥아더, 관료주의적 장벽이 높은 육·해군 엘리트들의 집합체인 합동참모본부, 국제적 합의와 절차를 중시하는 국무부, 외교·군사적 입장을 조율하는 3부 조정위원회라는 다중의 장벽을 건너뛰고 하지가 독자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대한정책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으로 추상적 대한정책이 결정되고, 1945년 8월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38선 분할 결정이 이뤄진 이후 대한정책의 방기와 방임, 무책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현지 주둔군 사령관인 하지의 독자적 재량과 현상 대응적 조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카이로 선언에 따라 해방국이 되어야 할 한국은 점령국으로 취급되었고, 적대적 점령지가 되어야 할 일본에는 간접통치하에 주권 정부가 기능하고 있었다. 한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유일하게 군정이 실시된 지역이며, 적대적 점령하에 주권 정부가 부인된 군사통치 지역이었다. 카이로선언이라는 국제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한국인이 어떠한 국제적 합의나 절차에 대한 존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과 소련의 대일 점령 참가 방지에 여력이 없었으며, 유일한 관심사는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와 일본 점령이라는 성공을 발판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문제 등을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국 국무부는 유럽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관심을 가졌다. 국무부 극동국에는 아직 한국 데스크나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정책과 정책 결정이 부재한 사이 하지의 판단과 조치가 정책을 대체하게 되었지만, 도쿄와 워싱턴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한반도 문제는 3성 장군의 자유재량에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또한 전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대소 봉쇄적이며 대결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하지의 대결적이고 현실주의적 조치들이 맥아더의 묵인과 워싱턴 매파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를 받게 되었다. (364~366쪽.)
반면 이승만은 한국에서는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OSS는 태평양전쟁기 사이판 등지에서 포로가 된 한인 노무자들을 심문했는데, 그들은 한국 지도자로 여운형, 엄항섭, 송진우, 조만식뿐만 아니라 친일파 윤치호, 이광수, 최린, 장덕수 등을 꼽았으나 이승만은 거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성가(聲價)를 올리던 때로부터 이미 20년 이상이 지났으므로, 이승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이었다. 그런데 1942~1943년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연설한 내용이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밀청한 경성방송국 및 홍익범, 송남헌, 양재현 등에 의해 유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 단파방송 청취 사건인데,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미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는 식으로 과정되어 서울 시내 여론 주도층에게 퍼져나갔다. 좌파의 허헌, 여운형, 한설야, 문석주, 우파의 이인, 김병로, 송진우 등이 사실보다는 듣고 싶고 퍼뜨리고 싶은 이 과장된 소식을 듣고 전했다.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서 이승만의 연설을 전해 들은 여론 주도층은 해방 후 미국에서의 이승만의 위상을 과대평가함으로써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즉 인민공화국의 여운형, 허헌 등과 국민대회준비회·한민당의 송진우, 김병로, 이인 등도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383~384쪽.)
교정. 초판 5쇄
251쪽 각주129번 : 1906~1941년 공주에 파송되어 근무, 내한 감리교 선교사로서는 한 지역에 가장 오래 머문 사례, 공주읍 교회 담임목사, -> 1906~1941년 공주에 파송되어 근무(내한 감리교 선교사로서는 한 지역에 가장 오래 머문 사례), 공주읍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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