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조형근, 창비, 2022.) 본문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 이것을 직업으로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직업(공부)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며 앎을 키워간다는 것이 좀 고상하고 대단한 어떤 것(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더군요. 남들 앞에서는 대단한 것 배웠다고 으스대며 세상의 가치를 논하는 사람들이, 남들 안 보이는데서는 "홍진에 썩은 명리" 탐하는 것은 똑같습디다. 그 격차에 힘들어한 끝에 결국에는 내가 이걸 애초에 왜 시작했더라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구요. 물론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어딜 가든 사람 사는 세상은 결국 다 비슷하더라는 깨달음으로 귀결되었습니다만 ㅋ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읽고 쓰는 것과 제가 하는 것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보려는 노력만큼은 그만두지 않았거든요. 부족함 많은 중생인지라 읽고 쓰는 것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내 삶이 그로부터 꽤 많이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는 저보다 그런 고민을 좀 더 이르고 깊게 한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보통의 직업과 별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50~53쪽.),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사는 삶의 간극을 어떻게 하면 털끝만큼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책 내내 역력히 묻어납니다. 내가 처한 현실이 이분법적으로 권력이 나뉜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너머에 더 깊이 생각할 지점이 있지는 않은지 고민하는 '글 아는 사람 노릇'도 빠지지 않지요.(191~193쪽.) 당연하게도 그 밑바탕에는 자기 세대와 자기 직업(연구자)에 대한 냉정한 반성이 깔려있구요.(63~64쪽, 100쪽.)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제가 쓴 글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이 보통의 직업과 별 다르지 않다고 해놓고서는 또 한편으로는 자꾸 그 안에서 뭔가 대단한 윤리와 이상을 찾으려고 하니까요. 저는 우리가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직업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서도 이 일이 중단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믿구요.
그것조차 포기한다면 시간과 노력을 부러 들여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진짜 정말로 아무짝에 쓸모 없는 일이 되고야 말겠지요.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인문학의 미래』(박중서 옮김, 반비 2022)에서 1970년대 미국 대학의 인문학 위기를 인문학자 유형의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자에는 선견자, 현학자, 소크라테스형 비평가, 그리고 언론인이라는 네 유형이 존재한다. 선견vision을 제시하는 선견자는 원래 드문 존재고, 의식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순간의 시종인 언론인"이 거기 대비된다. "언론인은 당일치기로, 즉 즉각적 소비를 위해 글을 쓴다." 그가 높이 평가한 것은 소크라테스형 인문학자였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믿음과 도덕을 검토했고, 합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의존에 근거한 지식의 주장을 조롱했다." 반면 현학자는 엄밀성과 전문가주의에 자부심을 가지며 자기 학생들과 독자들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앴느다. 바야흐로 현학자의 시대였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에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스스로 '정신의 양심'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연구자를 등장시킨다. 그는 오직 거머리의 두뇌만 연구한다. 그에게는 거머리의 지혜가 하나의 세계다. "이 하나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으며 다른 모든 것에 무심해졌다. 그리하여 나의 앎 아주 가까이에 나의 캄캄한 무지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비판의 대상을 인문학자에서 지식인 일반으로 넓힌다면, 이 시기부터 현학자와 언론인 유형이 번성하는 시대가 시작됐다. 미래를 제시하는 선견자가 사라진 것은 물론, 자기 시대를 비판하는 소크라테스형 지식인도 드물어졌다. 드브레의 비판은 신랄하다. "효소가 기생충으로 변했고, 톨레랑스가 감시로 변했으며, 억견doxa의 방해자가 여론몰이꾼으로 바뀌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등장한 '최초의 지식인'들은 주변 상황에 순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대중에 영향을 주려 했던 반면, 오늘날 '최후의 지식인'들은 시대 상황과 타협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끌어가려 한다. 세상에 드러나고 싶어서 책을 무지막지하게 써대고, 정기간행물의 편집진과 밀착해서 기고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저오학한 글보다는 선전에 열을 올린다. 가슴이 뜨끔해진다. 지식인은 죽었다. 거머리의 두뇌 연구로 침잠한 현학자와 세상의 관심을 갈구하는 언론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40~42쪽.)
대학 안 공부의 확연한 특징은 무엇일까? 자정이 지나 현관문도 잠긴 연구동 건물에서 밤새 연구실 불을 밝히는 고독한 연구의 진실이 있다. 그걸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래봤다. 하지만 그 내밀한 고독은 대학 바깥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평가하기 어려운 내면의 진정성보다는 손쉽게 드러나는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역할과 규칙, 즉 롤과 룰이 꽤나 정연한 일종의 게임이나 의례 같다는 데 대학 안 공부의 특징이 있는 듯싶다.
전문적 직업 활동으로서 대학 안 공부는 대개 학술대회 발표, 논문과 학술서의 작성과 출판 같은 정형화된 틀을 통해 진행된다. 청중과 독자는 대개 비슷한 경로를 따라 훈련받은, 자격증 갖춘 동업자들이다. 이들 또한 듣고 읽음으로써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공부는 '함께하는' 것이 된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 동업자들 사이에 역할이 필요하다. 굳이 사회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역할, 다시 말해 '특정한 지위에 부수되어 마땅히 기대되는 행동들의 묶음'을 숙지하고 이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지 역할을 실행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역할 수행에 따르는 규칙들도 있다. 학문을 수련하는 과정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 게임의 법칙을 몸에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룰의 요체를 요약하자면, '겸손과 자랑의 절묘한 줄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나'는 선학들이 쌓아놓은 찬란한 학문의 전당―업계 용어로 '기존연구'라고 부른다―앞에서 아득한 현기증을 느낀다.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난다. 단행본이라면 서문에 '천학비재'淺學菲才 같은 고답적인 수사를 넣어도 좋은데, 분위기를 봐서 과공過恭이다 싶으면 절제할 줄 아는 균형감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윽고 그 찬연한 전당에 내 몫의 한줌 기여분도 있음을 겸손히, 하지만 분명하게 밝힌다. 가장 낮은 자 되어 더불어 높아지는 전략이다.
읽고 듣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롤과 룰이 있다. 학술저널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자 노릇을 맡았다면 우선은 어떠게든 그 논문에서 무언가 학문적 의미를 찾아내고 적시해주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상찬의 췌사들을 끝내고 나면 드디어 냉철한 비판과 엄정한 수정 보완의 요구를 덧붙여야 한다. 그래야 편집진 보기에 좋은 심사서가 된다. 달랑 몇줄의 심사평읠 단 무성의한 '적극 추천'도, 파란을 일으킬 '탈락' 판정도 자제하는 편이 좋다. 저널 평가에 대비한 탈락률 제고가 필요할 때는 저널 측에서 암시를 주기도 한다. 대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엄정한 심사를 기대한다" 정도의 표현이 오간다. 그런 걸 해독할 줄 알아야 한다.
학술회의의 토론자 몫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의바른 칭찬과 촌철살인의 코멘트가 적절하게 조합되는 것이 중요하다. 대중 앞의 의례라는 측면이 두드러지는 자리이기에 각별히 요청되는 매너도 있다. 빛나는 건 좋지만 발표자보다 더 빛나서는 안 된다. 아니 더 빛나려고 애쓰는게 보여선 안 된다. 가끔 이걸 잊어서 뒤에서 분노를 사는 이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자주 그랬다. 떠나고 난 다음 깨닫는다. 아뿔싸!
나와 동업자들이 서로 롤을 바꿔가며 이 게임을 진행한다. 가끔 룰을 어기는 이들이 있어서 파란이 일곤 하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이 모든 게임 진행을 위한 비용은 학부모들의 계좌에서,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임금에서, 혹은 공공의 세금이나 기업의 이윤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밥값을 해야 한다.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못 내더라도, 어떻게든 쓰임새가 있음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공계 학문이나 데이터에 기반을 둔 실용적인 사회과학 쪽은 다르지만, 대다수 인문학, 사회과학이라도 실용성 떨어지는 쪽은 밥값의 압박이 심하다. 그렇게 쓰임새 입증을 위해 애쓰다가 어떨 때는 분노하고 허탈해지고, 또 탈진한다. 나는 계속 그럴 자신이 없었다. 대학을 떠난 이유 중 하나다. (50~53쪽.)
대학에 있을 때도 느끼던 바지만, 이른바 '인문학 위기론'은 지극히 대학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인문학의 위기이며, 그 근원에는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반면 대학 밖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문학 수요가 만개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을 지나며 지구 위의 상당한 지역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대학교육이 대중화되었다. 또한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엄청나게 다양해진 매체들을 통해서 대중은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고 있다. 이들은 교양서 수준의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고민할 수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대중이자 지식인이다. 양자의 경계는 오늘날 무척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63~64쪽.)
86세대가 지배체제의 일부가 되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이미 기득권자가 되었음에도 좀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보수정권에 맞서 촛불을 들었다고 '체제'에 저항한 것일까요? 아니오, 우리가 이끄는 조직에서 촛불을 든 약자에게 취하는 태도가 사실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100쪽.)
한국에서 우파혁신 내지 합리적 보수주의 정립이라는 목적의식 아래 진행된 '전통'의 발견·발명의 사례로 유교자본주의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을 꼽고 싶다. 두 접근 모두 애당초 한국이 아니라 서구 학계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그 연구 관심 자체는 한국 보수의 이데올로기 투쟁과 직접 관련된 것도 아니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1979년 미국의 미래학자 허먼 칸Herman Kahn이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유교와 연관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교육 중시, 근면성, 공동체주의, 조화로운 인간관계 등 이 지역의 특징들이 유교문화의 산물이며, 형평성과 효율성이라는 근대사회의 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능가하는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논의는 이후 하버드 대학의 중국계 연구자 투 웨이밍Tu Weiming과 존 웡John Wong 등에 의해 유교자본주의론으로 확장됐다. 물론 유교자본주의론 자체도 '순수한' 학술적 논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1950~60년대 이래 동아시아의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언론인, 기업가, 정책 전문가 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투 웨이밍은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李光耀의 자문으로서 서구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둘러싼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도 깊숙이 연루되었다.
한국에서는 유석춘, 함재봉 등 보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유교자본주의론이 수용되었다. 이들은 유교적 유산 덕분에 동아시아의 발전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봉건적 병폐로 비판받아온 가족중심주의, 연고주의,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심, 연공서열주의, 교육열 등은 물론, 성취의욕, 근면절검과 같은 성향과 태도 들을 유교문화의 유산으로 해석하면서, 이들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런 항목들은 대체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및 실질적 평등의 진전과 대립하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권위주의 통치와 사회구조, 재벌의 가족경영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들이 목소리를 낸 잡지의 이름이 『전통과 현대』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한국 보수가 결여한 것으로 평가되어온 '전통'을 발명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유교자본주의론을 통한 한국 보수의 정당화 프로젝트는 1997년 말에 닥친 IMF 사태와 아시아 지역의 경제위기를 거치며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아시아적 가치는 서구 학계와 정계의 비판거리가 되었고, 박정희 유신체제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멸사봉공론과 친화적인 유교자본주의론은, 사장의 자유와 개인의 경쟁력이라는 동력에 기반한 한국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보면 시대착오로 간주되었다. (133~135쪽.)
박근혜 정권을 탄핵으로 몰고 간 '최순실 게이트'의 시초에는 2016년 여름의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사태'가 있었다. 교육부의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고졸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용교육을 실시하고, 학사학위를 수여한다는 사업이었다. 의견 수렴 미비 등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고졸 직장인들이 '편법'으로 이화여대생이 된다는 사실이 이들을 노엽게 했다. 재학생과 졸업생의 성명서가 절규하듯 그것은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이 갖는 명예와 의의를 무너트릴 것"이었다. 이화여대 역사상 최대의 학내 갈등이 빚어졌고, 그 과정에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부정입학 의혹이 불거졌다. 이들의 싸움은 형식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다. 학생들은 지도부 없이 수평적 토론으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외부 세력의 개입이나 지원도 엄격히 차단했다. 학생증 검사가 철저했다. 대변자 없는 '순수한' 직접행동으로 일관했다. 촛불과 탄핵은 이화여대생들의 저 싸움이 날갯짓이 되어 일어난 태풍 같은 것이었다.
이들의 싸움을 거치며 영광스런 보상을 누리려면 합당한 수고와 능력이라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공정성'이라는 논점이 부상했다. 공정한 자격에 대한 열망은 박근혜 정권을 붕괴시킨 힘이면서 동시에 문재인 정권의 정당성을 뿌리부터 뒤흔든 힘이기도 하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대학 및 대학원 입시부정 혐의를 둘러싼 갈등은 이화여대 사태와 근본적으로 동형적이다. 조국 전 장관의 자녀들이 입학한 고려대, 서울대, 그리고 부산대생 들이 벌인 규탄 시위의 근저에는 자신들이 노력과 능력으로 정당하게 얻은 '학벌'이라는 영광의 가치가 불공정한 권력에 의해 훼손됐다는 분노가 깔렸다. 이들도 외부 세력의 개입에 반대하면서 학생증을 검사했다. 당적이 있던학생들은 집행부에서 배제됐다. 이화여대생들과 같았다.
순수한 자발성에 기반한 당사자들의 직접행동은 촛불시민들이 표방하고 자랑스러워한 이념형,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학생들이 벌인 싸움은 정당정치의 진영 논리를 넘어 어떤 맥락에서 촛불과 정신세계를 공유한다. 권리에 대한 요구나 사회경제적인 요구 같은 '외부적'이고 '정치적인' 요구와는 구별되는 목소리, 공정한 절차를 지키라는 목소리, 질서를 지키라는 목소리다. (191~193쪽.)
(...) 민중이 맑스주의적 계급 연합이자 인민의 대체어였다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민중이 사용된 맥락은 좀더 복잡하다. 본질적으로 민중은 사회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체현하고 잇음과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투쟁과 저항에 나서게 될 주체적 존재였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같은 하층계급, 기층민적 존재들에 더해 때로 진보적인 대학생, 양심적인 중산층, 그리고 여성이나 장애인같이 모든 힘 약한 존재들이 민중의 범주에 포괄될 수 있다. 그래서 민중은 객관적인 계급적 모순에 근거한 집단임과 동시에, 스스로 힘 약한 이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이들을 포함하는 주관적 범주이기도 했다. 즉 민중은 유동적인 범주, 운동 속에서 생성 중인 범주였다. 민중을 맑스주의적인 계급론의 어법에 가둘 수 없는 이유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어 민중이 영어로 번역될 때 곧잘 people이 아니라 minjung이라고 번역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민중이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희망의 주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단지 억압받는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중이야말로 지배체제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민중에 대한 믿음의 원천이 된다. 대학생, 중산층 같은 이들은 그 사회경제적 지위로 인해 곧잘 지배체제로 포섭되기 쉽다. 하지만 민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지배체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나아가 자신들만의 자율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서 저항의 원천이 되고,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민중처럼 약한 존재가 어떻게 막강한 지배체제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중이야말로 곧잘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순응하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민중은 일견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포획되는 중에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틀로 전복하는 역설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
민중의 저항의 원천이 지배체제, 그 이데올로기의 통속화·세속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중에 의한 전유에 있다는 주장이 매우 흥미롭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에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지적하듯, 지배 이데올로기는 피지배자가 액면 그대로 그것을 믿을 때는 오히려 지배에 위협이 될 수 있다. (...)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지배 이데올로기는 피지배자가 액면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피지배자가 이데올로기에 대해 동일시하되 조금은 거리를 두고 냉소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전략이 늘 성공하기는 어렵다. 믿으라고 요구하면서도 다 믿지는 말라고 한다면 뒤틀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박정희의 "잘 살아보세"를 진지하게 믿으며 위장폐업에 맞서 싸움에 나섰던 1979년의 YH무역 여공들이 유신체제의 사망선고를 앞당겼다.
인도의 탈식민주의 연구자 호미 바바Homi Bhabha는 『문화의 위치』(나병철 옮김, 소명출판 2012)에서 식민지배자의 문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식민지인의 흉내내기, 모방이 초래하는 식민지배자의 불안과 자기 균열이라는 주제를 집중 탐색한다. 식민지인이 식민지배자를 흉내내는 것은 것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자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지배를 받아들이는 행위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모방이 양자의 차이를 없앨 정도로 충실해질 때 불안해지는 이는 오히려 식민주의자 쪽이다. 예를 들어 시중을 드는 인도인 하인의 영어 발음이 영국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게 될 때 영국인 지배자 '나리'들은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구별은 차별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모방하되 구별될 정도로만 모방하라는 모순된 요구가 식민주의의 지배전략을 곳곳에서 뒤틀리게 한다. 그런 만큼 식민지인의 적극적인 모방은 지배자의 것을 전유하는 적극적 행위 전략으로 재평가된다. 식민지배자와 식민지인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바꾸면 제국-식민지 관계를 넘어 충분히 일반화될 수 있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제 민중이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민중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지배의 빈틈을 찾아내고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그럴듯한 낙관론이다.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걸 과연 민중의 '자율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자율성이나 독자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배의 자기모순이나 아이러니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강고해 보이는 지배권력에도 균열이 생기고 그 이데올로기가 민중에게 전유될 수 있다는 발견은 가치있지만, 그것을 민중의 자율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전유를 통해 지배를 비틀고 불안하게 하는 것 이상의 어떤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재일 역사학자인 조경달은 "통속적이고 전근대적인 도덕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역사적 단계에서는 새로운 '생산 능력'이 된다"는 야스마루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처음부터 통속도덕과는 무관한 민중이야말로 변혁 에너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학을 연구한 그의 『이단의 민중반란』(박맹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8)에 따르면, 정통 주자학에 대한 '이단'으로 성립한 동학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체제내화되고 있을 때, 민중이 동학 내부의 이단적 측면을 통해 스스로를 변혁적 주체로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갑오농민전쟁이다. 통속도덕의 내면화로부터 벗어나 있는 민중이라는 자율적 집단을 상정하는 것, 지배의 균열 논리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민중 해석이다. (246~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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