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예수운동 (김근수, 논형, 2024.) 본문
기독교 역사의 첫 몇십 년을 다룬 이 책의 문제의식은 확고합니다. 저자는 예수 사후 초기 예수운동에서 작금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향할 모델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해방신학을 공부했고, 누구보다 작금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은 저자이기에 그런 문제의식은 누구보다 확고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저자가 찾아낸 1세기 예수운동의 미덕은 개방성과 다양성, 평등함 같은 것들입니다. 당대의 역사적 조건이나 다른 종교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들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개방, 다양, 평등 같은 가치가 준수되었기에 예수운동은 기존 종교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들을 연대하게 하고 헌신하게끔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나 종교에서 지금은 없는 혁명성과 순수성을 초기의 역사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역사학에서는 꽤나 익숙한 접근법입니다. (여기서 예전 유행어를 약간 패러디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역사학자 특. 뭐든지 기원을 찾으려고 함" ㅋㅋㅋ) 그러다보니 1세기의 예수운동으로부터 개방성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듣기 좋은 덕성을 뽑아내는 이 책의 결론이 다소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2024년 12월의 상황 때문인지 이런 결론이 영 쌩뚱맞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광장에서 경험하고 외친 것은 단지 특정한 누군가의 탄핵이나 특정한 정파의 승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탄핵을 당장의 목표로 설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존중되고, 다양한 가치가 관철되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소외받거나 차별받지 않아야 하며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혐오가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는 점도요.
'다양'한 목소리들에게 온전히 '개방'된 '평등'한 광장을 만드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라고 할 때, 1세기 예수운동이 보여주었던 다양성과 개방성, 평등함은 교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우리 민주공화국에게도 여전히 절실한 가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들에게 온당한 자리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를 반동에 대한 가장 튼튼한 준비태세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예수 부활 이후 60년 정도까지 약 30년간 갈릴래아 지역과 근처 지역에서 갈릴래아 공동체와 여러 개인의 모임이 유대인과 비유대인에게 역사의 예수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다녔다. 그 전승을 바탕으로 글로는 최초로 예수어록이 생기고, 두 번째로 마가복음이 생겼다. 마가복음에 없던 예수어록 자료를 마태복음 저자와 누가복음 저자는 참고하고 자신의 전승을 덧붙여 각각 복음서를 썼다. 그 다음 요한복음이 탄생했다. 네 복음서에 포함되지 못한 전승도 있었을 것임은 당연하게 추측할 수 있다. (88쪽.)
예수운동은 처음에 예루살렘 공동체와 갈릴래아 공동체로 출발했고, 공통년 약 40년 정도부터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추가되었다. 예루살렘 공동체, 갈릴래아 공동체, 안티오키아 공동체 흐름이 예수운동 처음 역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운동의 역사를 마치 예수와 바울의 양자구도로 좁혀 보는 관점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려준다. 바울은 흔히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2인자로 언급되곤 한다. 예수와 바울의 선포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이 예수와 바울을 비교 또는 대결 구도로 놓기도 한다. (...)
그런 의견은 예수운동 처음에 예수를 이해하는 세 가지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바울-안티오키아 노선은 예수운동 처음에 있었던 세 흐름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바울-안티오키아 노선을 예수운동 처음 세 흐름 중 최고로 치고 다른 두 흐름을 바울-안티오키아 노선의 아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예수운동 초기 역사라는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다루어야 하겠다. 예수운동 처음에 예수의 순수한 복음이 있었고, 다음으로 바울이 예수의 순수한 복음을 엉뚱하게 훼손하고 변질시킨 것으로 간단히 규정할 수도 없다. 예수의 순수한 복음이 예수운동 처음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예수의 삶과 의미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었다. 예수운동이 처음부터 하나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여러 흐름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일치한 적도 없었다. 예수운동에 처음부터 다양성이 있었다.
바울이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할례 없는 선교를 내세워 예수운동 선교에 큰 공헌을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시켜 예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전승을 만들고 간직하고 바울에게 전해준 것은 예루살렘 공동체다. 갈릴래아 공동체는 예수어록과 복음서 전승을 만들고 간직하여 네 복음서 탄생에 크게 공헌했다. 예수운동 역사는 예수와 바울의 양자 구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바울 편지들만 남아있고 네 복음서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예수가 누구인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잘 알 수 있겠는가. (152~153쪽.)
50년 말~51년 초 쓰인 듯한 데살로니카전서와 55년 쓰인 듯한 고린토후서에서 열정적으로 로마제국을 비판했던 바울은 56년 초 쓴 로마서 13,1-7에서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3,1), "여러분이 여러 가지 세금을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그와 같은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일꾼들입니다"(로마 13,6)라고 전혀 반대의 내용을 주장했다. 로마제국 통치자들이 무려 하느님의 일꾼(λειτουργοί θεοῦ)이라니? 그 짧은 시간에 예수운동과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로마제국에 대한 바울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말인가.
바울이 로마서 13,1-7을 쓰지 않았고 후대에 누군가 끼워넣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성서주석의 근거가 약해서 성서학계에서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13,1-7을 썼을 때 로마황제는 네로(Nero)였다. 바울에게는 예수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도록 촉구해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 로마서가 나온 2년 뒤인 오랫동안 세금 압박에 시달려온 사람이 로마에 저항한 시위가 있었다. 바울은 예수운동 로마 공동체 사람들이 이 시위에 가담하지 않도록 권유하려 했다. 예수운동 공동체가 로마제국에게 미움 받지 않고 안전하게 선교하려면 로마제국과 갈등을 빚어낼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현명했기 때문이다. 곧 다가올 세상 종말을 고대(고린토전서 7,29-31)했던 예수운동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금방 지나갈 현실 정치에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기도 했다. 노예 해방, 세금 문제 등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서 13,1-7은 바울의 편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아니지만, 가장 논란되는 대목 중 하나다. 인류 역사에서 많은 독재자들은 로마서 13,1-7을 즐겨 인용하며 정치적 저항과 혁명을 좌절시키려 애썼다. 그런 독자재들에게 협조한 종교인과 신학자도 있었다.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구절을 찾는다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로마서 13,1-7을 쉽게 꼽을 수 있다. 만일 지배자가 포기할 수 없는 인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행동은 시민의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가 된다.
로마서 13,1-7은 예수운동과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세상 끝 날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이나 오류가 없는 교리에 해당되지 않는다. 로마서 13,1-7은 바울의 말이지 예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가 그나마 안심해야 하는가. 로마서 13,1-7이라는 일시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 반대했던 바울 신학의 가치와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거나 위축될 수는 없다. 로마서 13,1-7을 인용하여 바울을 깎아내리거나 예수운동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220~222쪽.)
예수운동 역사에서 바울만이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중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다. 늦어도 고린토후서가 쓰인 55년 무렵에 바울 선교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48년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낳은 결과 중 하나이자 발전된 흐름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렸고 합의된 내용이 있었지만, 예수운동에 참여하려는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유대교 율법을 어느 범위까지 요구해야 하느냐 문제는 예수운동 내부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예수운동을 둘러싼 안팎 상황이 복잡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서쪽으로 퍼지는 바울 선교는 갈수록 확장되었고, 바울이 세운 공동체들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른 편으로, 유대교 내부 모임으로 스스로 이해하던 예수운동 예루살렘 공동체는 증가하는 유다 민족주의 분위기에서 유대교 측이 가하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운동 자체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는 종교적 정치적 결단의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예수운동이 바리사이, 사두가이, 꿈란 공동체처럼 유대교 내부 모임 중 하나로, 좀 더 개혁적이고 자유로운 유대교 모임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에서 출발했고 유대교와 계속 연결되긴 하지만,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세례를 요구하며 빵나눔을 가지는 독자적인 새로운 종교로 발돋움할 것인가. 유대교 모임으로 남아있으려는 예루살렘 공동체는 독자적인 길로 접어든 바울 공동체를 설득하고 압박하고 반대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231~233쪽.)
예수를 직접 보고 따라다닌 베드로와 제자들보다 예수를 직접 만난 적도 없는 바울이 예수운동 초기 역사에서 돋보이는 인물로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역할을 맡은 덕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이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할지라도 편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면, 바울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바울 편지가 없었다면, 바울은 예수운동 초기 역사에서 여러 선교사 중 평범한 하나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쓸 학문적 능력과 선교 의지를 둘 다 갖춘 인물이었다. 나는 바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는 편지를 쓴 일이라고 생각한다. (241쪽.)
예수운동은 유대교 모임을 가리키는 단어 회당(συναγωγά; 사도행전 9,2)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동체(ἐκκλησία; 사도행전 8,3)이라는 정치 용어를 빌어왔다. 오늘 널리 쓰이는 단어 공동체(=교회, ἐκκλησία)가 정치 분야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바울은 예수운동을 가리키는 단어 교회(ἐκκλησία)의 특징을 자유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τῆς ἐλευθέρας) 몸에서 난 자녀입니다"(갈라디어 4,3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Τῇ ἐλευθ ερίᾳ ἡμᾶς Χριστὸς ἠλευθέρωσεν)"(갈라디아 5,1).
이천 년 전 노예가 많았던 지중해 지역에서 자유와 차별 없음을 강조했던 예수운동은 당시 사회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을 것이다. 교회의 특징이 자유라는 사실을 알고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오늘 얼마나 될까. 인간에게 자유가 있고 세상 안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교회 안에 자유라니?'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 교회에서 자유와 평등과 차별 없음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 교회, 자유와 평등과 차별 없음을 내세운 예수운동은 자신을 설명할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은 예수운동 처음부터, 바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쁜 소식(εὐαγγελίον=복음)', 믿음(πίστης) 단어는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흔히 쓰이던 뜻을 훨씬 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έν Χριστῷ) 단어는 특히 강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έν Χριστῷ) 단어를 전승에서 받아들여(고린토전서 1,30; 고린토후서 5,17; 갈라디아 3,26-28) 예수운동을 가리키는 대표 단어처럼 바울 편지에서 무려 64번이나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특정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예수운동 주장은 하느님의 선택과 계약, 토라, 성전, 땅을 내세운 유대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운동은 유대교에서 시작하여 유대교를 넘는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운동이 당시 문화와 종교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헌 땅이 새 씨앗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새 씨앗은 아예 싹트지 못할 수 있다. 새 씨앗이 헌 땅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248~250쪽.)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예수운동 내부의 여러 신학적 입장이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유대교 율법을 여전히 고수하던 야고보 중심의 예루살렘 공동체, 율법을 벗어나는 바울, 그리고 그 두 흐름 사이에 베드로, 세 흐름이 있었다. 우리 시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예수운동 초기 역사부터 예수운동 보수파, 예수운동 개혁파, 예수운동 중도파로 분류할까. 야고보, 바울, 그리고 그 사이에 베드로가 있었다. 그 후 안티오키아 충돌 사건에서 바르나바와 베드로는 바울과 다르게 야고보 중심의 예루살렘 공동체 입장으로 기울었다. 유대인 아닌 사람들에게 개방적이던 흐름에서 또 하나의 갈래가 생긴 것이다.
안티오키아 충돌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점차 더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었다(갈라디아 2,12). 66년 시작된 유대 독립전쟁 직전에 더 강력해진 유대민족주의 분위기에서 예수운동을 거절한 유대인들이 야고보 중심의 예루살렘 공동체를 얼마나 괴롭히고 압박했을까.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 아닌 사람들과 내통하여 유대교를 말살하려 한다는 헛소문과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럴수록 더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 내부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을 유대인에게 심어주어야 했다. 그런 난감한 처지에 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 아닌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어록(=Q문헌)을 낳은 갈릴래아 공동체는 어땠을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며 심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옴을 이스라엘에 전하는 유대교 내부 개혁그룹의 하나로 자신을 생각했다. 그들을 '유대인 예수 사람들'이라고 칭하는 의견도 있다. 갈릴래아 공동체는 유대교 주류와 논쟁하고 거절당한 듯하다. 갈릴래아 공동체가 많은 유대인에게 배척당한 흔적이 복음서에 남아있다. 갈릴래아 공동체는 자신을 거절한 유대인을 '이 세대 사람들(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τῆς γενεᾶς ταύτης)'(누가 7,31; 11,29.50Q)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갈릴래아 공동체의 예수 선포를 거절했고(누가 7,31Q), 악하다(누가 11,29Q). 갈릴래아 공동체의 선포 중심은 곧 다가올 심판이었다(누가 3,7-9; 10,12-15; 17,23-37Q). 갈릴래아 공동체는 예수 활동과 말씀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 아래 예수어록에 담았다. (252~253쪽.)
유교, 불교 등 다른 종교보다 예수운동에서 경전이 일찍 쓰인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제국 통용 언어가 그리스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 어디에 있던지, 예수운동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쓰인 네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1세기에 지중해 지역에 종이는 아직 없었지만, 오늘날 책처럼 여러 장을 겹치거나 묶은 코덱스 책이 널리 사용되었다. 두루마기에 둘둘 만 유대교 책보다 가볍고, 운반하기 쉽고, 기록할 공간이 더 많고, 값이 비싸지 않았다. 코덱스 책은 로마에서 널리 퍼진 듯하다. 예수운동 사람들은 처음부터 코덱스를 이용하여 복음서 사본을 만들고 여러 공동체에 퍼뜨린 것 같다.
베스파시우스와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시기는 묘하게도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쓰인 시기와 겹친다. 그 황제들 시절에 예수운동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문헌을 내세우며 세상에 등장했다. 로마황제 우상화 작업이 한참 진행되던 그 험악한 시절에, 마가복음 저자는 로마황제가 아니라 나자렛 예수가 앞 못 보는 사람을 치유한 기적을 행했다고 여러 차례 기록하였다(마가 3,1-6; 8,22-26; 10,46-52). 로마황제가 복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나자렛 예수가 복음을 가져왔다고 용감하게 선언하였다(마가 1,1; 9,7; 15,39). 그 당시 공동체 빵나눔 모임에서 마가복음을 들었던 예수운동 사람들은 예수와 자기 시대의 로마황제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가 공통년 70년 무렵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복음서는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예수운동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로마황제 베스파시우스가 취임한 70년 무렵 탄생한 듯하다. 마가복음 이전에 이미 글로 있었던 전승(마가 2,1-3,6; 4장; 10장; 13장), 예수어록(누가 1,1), 예수 수난 전승은 언젠가는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다. 늦어지는 예수 재림, 예수운동 내부의 여러 갈등과 문제를 해명할 필요도 시급해졌다.
마가복음 저자는 자신 앞에 놓여 있던 여러 전승을 어떻게 편집하고 연결할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문학 유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역사를 이야기로 엮어낸 복음서를 통해 예수운동은 예수 역사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황제 우상화 작업 때문에 복음이 쓰인 것은 아니지만, 복음은 로마황제와 예수를 비교하며 쓰여졌다.
네 복음서 저자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각자 관점에 따라 예수 역사를 서술하기로 합의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운동이 복음서를 네 권 저술하려고 처음부터 기획했던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공동체에서 자신의 문제를 예수 역사에 비추어 복음서를 쓴 것이다. 예수 역사를 쓴 책이 딱 네 권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후대에 예수운동 여러 공동체에서 가장 자주 인정받고 존중된 네 권만 받아들여졌다. (278~280쪽.)
1세기 예수운동 역사에서 마가, 마태, 누가복음은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처음으로 나자렛 예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했다. 복음서 이전에 바울 편지만으로는 예수운동이 나자렛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예수 죽음과 부활의 의미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자렛 예수를 전하는 것은 한참 부족했다. 예수 행동과 말씀이라는 역사를 기초로 예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비로소 온전하게 설득할 수 있었다. 예수 역사 없는 예수 의미는 가능하지 않다.
기적, 치유, 말씀, 수난 역사 등 단편적인 사건이나 이야기로는 나자렛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온전히 알기는 어려웠다. 복음서 저자마다 자기 관점과 공동체 문제에 따라 예수를 다양하게 소개하였다.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등장 이후부터 소개해도 예수의 참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에 예수 말씀이 상당히 빠져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마가복음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율법(νόμος) 단어를 되살리고 유대교와 연결을 강조하였다. 누가복음 저자는 마태복음 저자처럼 예수어록을 보충하고 예수 족보와 부활한 예수를 추가하고 확장했다. 누가복음 저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저자처럼 예수 역사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운동 역사를 처음으로 썼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베드로와 바울, 예수 형제 야고보가 처형된 이후 쓰였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저자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할례 없는 선교를 받아들였고, 그 문제를 더 이상 다루지는 않았다. 세 복음은 바울과 달리 예수 재림이 가까운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가복음 저자는 바울 편지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도 바울 편지를 넘어서고 확장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저자도 마가복음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도 마가복음을 또한 넘어서고 확장했다. (304~305쪽.)
야고보서 저자는 예수운동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바꾸도록 촉구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야고보 1,27; 2,15-16).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며(야고보 1,27), 동시에 부자들을 비판해야 한다(야고보 2,1-13; 4,13-5,6).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에 대해 야고보서에 나타난 많은 가르침이 단순히 가난의 영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쏙 빼놓고서 가난이라는 복음적 가치를 칭송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서 가난의 영성을 외친 사람들은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고 말하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생겼는지 침묵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고 말하지만, 부자들을 전혀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한 야고보서도 가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누가복음 저자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저자가 예수운동 공동체 내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면 야고보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상호 연대를 좀 더 강조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유하게 하시고 당신을 살아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야고보서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했다는 진리를 신학적으로 기초 놓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나눔과 베풂이라는 이웃돕기 차원에서 접근하면 부족하다. 내가 어떻게 좀 더 가난해질까 고뇌하는 윤리 문제로 축소하면 부족하다.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고뇌와 삶은 소중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생겼는가. 그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세계 정치경제라는 구조적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 문제는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정치경제 문제다. 지난 이천 년 서양신학은 하느님나라를 망각해온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난 이천 년 서양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망각해온 역사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누가 6,20-49)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산상수훈 말씀보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누가 16,13)라는 말이 예수와 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부자들이 다니기 불쾌한 종교다. "부자들에게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야고보 5,1).
종교를 명예 세탁과 권력 사다리로 악용하는 부자나 정치인은 역사 어디에나 있었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고 '돈 먼저, 하느님 그다음'을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섬겨왔는지도 혹시 모르겠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라고 거짓말하며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먹는 종교인도 있다. (...) (374~376쪽.)
로마제국 황제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는 통치 말기에 신으로 숭배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즉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시내뿐 아니라 로마제국 동쪽 지역에서 황제숭배 사상을 퍼뜨렸다.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전통적인 로마 종교가 복구되기 시작했다. 황제숭배 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달력에서 달 이름과 새해 시작 시점이 바뀌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많은 비석과 문헌에서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다. 로마제국 황제는 세상에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주고 제국의 정치적 통일을 보장하며 시민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숭배되었다.
로마제국 수도인 로마뿐 아니라 각 정복지 대도시에도 황제숭배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황제숭배 사상은 로마제국 정치 이데올로기이자 사실상 종교나 다름없었다. 로마제국 모든 지역에서 똑같은 의식이 거행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탄생하였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안, 티투스 황제가 황제숭배 사상을 퍼뜨리는데 덜 적극적이었다면, 칼리구아, 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주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예수운동은 황제숭배 행사나 로마제국의 공공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로마제국에 의심받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정치범을 구원자로 믿는 행동은 외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빵나눔을 둘러싼 갖가지 나쁜 소문들도 있었다. 예수운동을 미신의 하나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운동은 정치적으로 위험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비방도 받았다. (383~384쪽.)
1세기 예수운동은 성공한 종교운동이었을까. 시작한지 겨우 70여년도 안된 예수운동은 1세기 말 지중해 60여개 도시에서 100여개도 못되는 공동체에서 1만 명도 못되는 사람들이 참가한 소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1세기 예수운동은 성공했을까. 운동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1세기 예수운동 성공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런 평가보다는 예수운동의 매력을 알아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우리가 1세기 예수운동에서 좋은 것을 배우려 한다면 말이다.
1세기 예수운동의 외부 상황을 살펴보자. 비교적 단일한 문화와 정치체제를 갖춘 로마제국 영토 안에서 1세기 예수운동은 활동했다. 로마제국 밖으로 선교는 후대의 일이다. 공용어처럼 일상에서 쓰이던 그리스어, 편리한 여행과 이동 가능성은 예수운동의 선교에 유리했다. 로마제국 곳곳에 있던 유대교 회당과 거주 지역은 예수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한편, 유대교에 호감을 가진 유대인 아닌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운동의 1차 선교 대상이 되었다. 철학과 종교에 관심이 많고 토론을 즐기던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 예수운동은 가까이 다가갔다. 예수운동은 어떤 형식의 토론과 대화에도 꺼리지 않고 참여했다. 당시 유행했던 많은 사교 모임에서 예수운동 소식은 이야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운동 공동체도 사교 모임의 일부로 당시 사회에서 거부감 없이 인정되고 이해되었다.
기존 종교들의 허술한 모습이 상대적으로 예수운동에게 유리한 공간을 제공했다. 그리스로마 종교들에게 선교라는 개념도 활동도 거의 없었다. 많은 그리스로마 종교 단체들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그리스로마 종교의 다신론과 운명론에 비해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었다. 유대교의 일부 분파로 처음에 알려진 예수운동은 유대교가 쌓아놓은 호감 덕택을 입은 셈이다. 유대교 윤리와 비슷한 예수운동 윤리도 사람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다가섰다.
예수운동은 의사소통 수단을 잘 이용했다. 편지를 주고받고, 여행하여 방문하고, 선교사에게 친절한 모습은 선교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예수운동 여러 공동체는 서로 형제자매라고 생각하고 교류하고 일치하려 애썼다. 인종, 신분, 직업, 성별을 가리지 않고 예수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개방성과 포용은 그리스로마 종교나 사교 모임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을 가르치는 예수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이 까다로울 리 없었다. 상인, 군인, 노예, 여성들이 예수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가난한 하층민들이 대거 예수운동에 들어왔다. 예수도 그랬지만, 예수운동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작한 운동이었다.
예수운동에 들어오는 참가비가 없었다. 예수운동에 다니는데 요구되는 돈이 없었다. 돈이 없어 예수운동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돈이 없어 예수운동에 다니기 어렵다는 말은 없었다. 예수운동에서 돈 있다고 으시댈 수도 없었다. 예수운동처럼 부자를 비판하고 훈계하는 종교가 인류 역사에 어디 또 있을까. 부자들이 행세하지 못하는 종교가 예수운동이었다.
1세기 예수운동에 사제 계급은 없었다. 사제 계급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1세기 예수운동 공동체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다. 공동체에서 여성의 목소리도 그리스로마 사회의 사교 모임에서보다 훨씬 컸다. 공동체에서 누구도 차별당하지 않았고, 누구도 지도층으로 거만하게 처신하지 못했다. 특별한 임무나 은사를 부탁받은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지도층 행세를 하진 못했다. 공동체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거나,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고 가르는 권력 구조가 만들어지진 않았다. 그리스도교 이천년 역사에서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평등이 실천된 유일한 시기는 1세기 예수운동이었다.
세례, 매주 모이고 만나는 예배와 빵나눔 모임, 소규모 가정 공동체는 예수운동 사람들의 연대와 일치를 튼튼하게 해주었다. 예수운동 사람들이 자주 모이고 만나고 대화하는 종교는 유대교 말고 없었다. 은혜 넘치는 예배, 은사 체험과 성령 체험, 공동체에서 생기는 기적과 치유는 사람들을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구약성서뿐 아니라 바울 편지들과 네 복음서를 사람들은 듣고 토론하고 연구하였다. 종교 창시자의 삶과 말씀에 대한 문헌이 그렇게 빨리 나타나고 사용된 경우는 예수운동이 고대 사회에서 유일했다. 예수운동은 책 운동이요 교육운동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예수운동에서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새로운 존재, 운명론이 아니라 확실한 구원을 제공한다는 예수는 운명론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죽음 이후 세상이 아니라 지금 세상이 중요하다는 가르침과 우리 가까이 계신 하느님과 죽음 이후 세계까지도 설명하고 보장하는 부활 사상도 큰 매력이었다. 예수운동의 독특한 가르침이 좋은 영향을 주었다. 예수운동은 여러 종교 중 하나를 추가로 더 가지라고 선교하지는 않았다. 예수운동에 참가하면, 기존 종교와 단절하라는 요구였다. 기존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예수운동의 자신있는 선교는 상대주의에 지친 당시 사람들에게 의외로 큰 매력을 주었다.
1세기 예수운동에 나타난 여러 패러다임은 예수운동이 살아남은 전제이자 원천이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사라졌다고 해서 예수운동이 소멸되진 않았다. 여러 패러다임은 예수운동의 신학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주었다. 1세기 예수운동 신학에서 절대 강자나 1강은 없었다. 1세기 예수운동은 다양성이 제1 특징이었다. 다양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치하려 애썼다. 다양성이 없었다면 일치하려는 노력 자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개방, 다양성, 평등이 1세기 예수운동을 나타내는 주요 단어다. (464~467쪽.)
교정. 초판
5쪽 밑에서4줄 : 유다인 -> 유대인
7쪽 밑에서5줄 : (들어쓰기 수정)
10쪽 9줄 : (들여쓰기 수정)
19~61쪽 : (장절표기에 띄어쓰기가 들어있음)
20~23쪽 : (각주의 쪽수표기에 띄어쓰기가 들어있음)
23쪽 각주12번 : 2판, p.99 (띄어쓰기 2칸)
24쪽 밑에서4줄 : 불트만Bultman은 -> 불트만(Bultman)은
28쪽 각주22번 : pp 17-92 -> pp.17-92
33쪽 각주1번 : (내어쓰기 수정)
41쪽 각주27번 : p. 126-133 -> p.126-133
53쪽 각주52번 : pp12-25.93-95 -> pp.12-25, 93-95
53쪽 각주55번 : Die Apostelgeschichte -> Die Apostelgeschichte (띄어쓰기 2칸)
54쪽 각주56번 : p.131. 주 104 -> p.131
55쪽 각주64번 : pp.87-114, p.107 -> pp.87-114
57쪽 밑에서3줄 : 마가 10, 13-16; 고린토전서 1, 16; 에페소 6, 4를 -> 마가 10,13-16, 고린토전서 1,16, 에페소 6,4을
57쪽 각주66번 : p.135, 주 116 -> p.135
58쪽 밑에서2줄 : 바치는(마가 10, 45c) 71 -> 바치는(마가 10, 45c)71 (각주번호 띄어쓰기)
58쪽 각주68번 : p.136, 주 119 -> p.136
60쪽 각주72번 : pp.689-712, p.707 -> pp.689-712
60쪽 각주72번 : pp.370-383, p.378 -> pp.370-383
62쪽 10줄 : (들여쓰기 수정)
62쪽 각주76번 : pp.300-309, p.11-88 -> pp.11-88, 300-309
65쪽 2줄 : 사도행전 6, 5 -> 사도행전 6,5
65쪽 4줄 : 사도행전 6, 8-15 -> 사도행전 6,8-15
65쪽 4줄 : 사도행전 6, 8 -> 사도행전 6,8
65쪽 6줄 : 사도행전 6, 9-14 -> 사도행전 6,9-14
65쪽 7줄 : 사도행전 6, 8-15 -> 사도행전 6,8-15
65쪽 10줄 : 사도행전 6, 13-53 -> 사도행전 6,13-53
86쪽 밑에서3줄 : 맞는다면 -> 맞다면
87쪽 밑에서4줄 : 필립비(마가 8,27)지역에서 -> 필립비(마가 8,27) 지역에서
96쪽 3줄 : 되었다.모든 -> 되었다. 모든
97쪽 3줄 : 전하였다.(사도행전 8,26.40) -> 전하였다(사도행전 8,26.40).
99쪽 8줄 : 들은 후 3년 후 -> 들은 3년 후
99쪽 밑에서6줄 : 스티파노의 -> 스테파노의
108쪽 4줄 : 제자들에게((요한 20,24-29) -> 제자들에게(요한 20,24-29)
130쪽 밑에서4줄 : 할례 없 선교를 -> 할례 없는 선교를
146쪽 5줄 : 예수어록 (Q문헌)은 -> 예수어록(Q문헌)은
148쪽 1줄 : 떠난다.(사도행전 15,39-40) -> 떠난다(사도행전 15,39-40).
148쪽 3줄 : 이고니온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 이고니온의 유대인 회당에서
152쪽 2줄 : 유대인(디아스포라)중에 -> 유대인(디아스포라) 중에
152쪽 9줄 : 갈릴래이 공동체 -> 갈릴래아 공동체
152쪽 9줄 : 안티오키아 공동체세 흐름이 -> 안티오키아 공동체 흐름이
152쪽 밑에서5줄 : 놓기도 하다 -> 놓기도 한다
153쪽 2줄 : 노선이 -> 노선을
153쪽 밑에서4줄 : 예수와 바울이 -> 예수와 바울의
164쪽 밑에서7줄 : 우리가-우리가 -> 우리가
164쪽 밑에서7줄 : 방법은 -> 방법이
169쪽 밑에서2줄 : (문단 띄우기)
169쪽 각주28번 : pp.233, 주 29 -> p.233
174쪽 각주1번 : (내어쓰기 수정)
174쪽 밑에서5줄 : 대부분 로마인이었지만 -> 대부분이 로마인이었지만
176쪽 밑에서3줄 : 듯하다.( -> 듯하다.
187쪽 밑에서1줄 : 안되겠다.(안된다.) -> 안된다.
194쪽 밑에서1줄 : 사림들에게 -> 사람들에게
196쪽 밑에서6줄 : 단어 (데살로니카전서 -> 단어(데살로니카전서
199쪽 7줄 : 로마 12.8 -> 로마 12,8
202쪽 4줄 :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띄어쓰기 2칸)
219쪽 5줄 : 종교정책(Paz Romana)(삭제)이었다 -> 종교정책이었다
221쪽 9줄 : 사람의 -> 사람이
225쪽 7줄 : 만족((고린토후서 -> 만족(고린토후서
232쪽 8줄 : 있다 -> 있었다
243쪽 밑에서1줄 : 은시(은사?) -> 은사
248쪽 밑에서8줄 : 회당(συναγωγά;사도행전 9,2)를 -> 회당(συναγωγά;사도행전 9,2)을
249쪽 5줄 : 교회안에 -> 교회 안에
249쪽 9줄 : 예수운동처음부터 -> 예수운동 처음부터,
249쪽 11줄, 12줄 : 그리스도 안에서έν Χριστῷ 단어는 -> 그리스도 안에서(έν Χριστῷ) 단어는
253쪽 7줄 : 악하다.(누가 11,29Q) -> 악하다(누가 11,29Q).
253쪽 8줄 : 심판이었다.(누가 3,7-9; 10,12-15; 17,23-37Q) -> 심판이었다(누가 3,7-9; 10,12-15; 17,23-37Q).
263쪽 밑에서3줄 : 야고보, 베드로, 진보파 -> 야고보, 진보파
278쪽 8줄 : 그리스였다는 -> 그리스어였다는
281쪽 5줄 : 마가복음 없었다면 -> 마가복음이 없었다면
288쪽 4줄 : 엮어냈다.( -> 엮어냈다.
288쪽 10줄 : 마가복음 의도는 -> 마가복음의 의도는
288쪽 밑에서2줄 : 강현 -> 강한
315쪽 1줄 : 안타오키아 -> 안티오키아
316쪽 밑에서3줄 : 反그리스도입니다 -> 반(反)그리스도입니다
316쪽 밑에서1줄 : 가현설(假現說 doketismus) 영향을 -> 가현설(假現說 doketismus)의 영향을
338쪽 밑에서6줄 : 비교(Antithese) 고 -> 비교(Antithese)하고
365쪽 밑에서2줄 : 에수그리스도 -> 예수그리스도
375쪽 밑에서7줄 : 연대을 -> 연대를
386쪽 각주28번 : (삭제)
388쪽 밑에서5줄 : 겉으는 -> 겉으로는
395쪽 밑에서6줄 : 고린토전서 6,12-20; 7,1-16.25-40 -> 고린토전서 6,12-20; 7,1-16.25-40 (띄어쓰기 2칸)
408쪽 2줄 : 십자가는 -> 십자가라는
417쪽 3줄 : 부요하게 -> 부유하게
424쪽 각주2번 : (내어쓰기 수정)
436쪽 1줄 : 어렵다.요한복음 -> 어렵다. 요한복음
438쪽 8줄 : 넷째, 바울과 -> 넷째, 바울과 (띄어쓰기 2칸)
442쪽 2줄 : 법(야고보 2,12)이라며 긍정적으로 -> 법(야고보 2,12)이라며 긍정적으로
443쪽 1줄 : 1,1-4는 -> 1,1-4은
443쪽 7줄 : 13,22-25는 -> 13,22-25은
443쪽 밑에서3줄 : 듯하다. 43그래서 -> 듯하다.43 그래서 (각주번호 띄어쓰기)
445쪽 밑에서2줄 : 안타오키아 -> 안티오키아
447쪽 7줄 : 요한"(갈라디아 2,9)이그들에게 -> 요한"(갈라디아 2,9)이 그들에게
449쪽 밑에서1줄 : 것이어서 역사의 -> 것이어서 역사의 (띄어쓰기 2칸)
457쪽 6줄 : 복음은 예수와 -> 복음은 예수와 (띄어쓰기 2칸)
458쪽 밑에서1줄 : 되었다.영지주의에 -> 되었다. 영지주의에
462쪽 밑에서10줄 : 보디올리(사도행전 28,13-15)이다. 여행 -> 보디올리(사도행전 28,13-15)이다. 여행 (띄어쓰기 2칸)
462쪽 밑에서8줄 : 아폴로니아(사도행전 17,1) 제외했다 -> 아폴로니아(사도행전 17,1)는 제외했다
467쪽 3줄 : 종교중 -> 종교 중
472쪽 8줄 : 안타오키아 -> 안티오키아
476쪽 밑에서4줄 : 공통년 70년 지날 무렵 -> 공통년 70년 무렵
476쪽 밑에서3줄 : 1세데 -> 1세대
477쪽 밑에서4줄 : 하느님 나라라는 -> 하느님나라라는
* 이하는 표기를 통일해야 하는 것
44쪽 9줄 : 칼리구아(Caligua)
86쪽 밑에서4줄, 밑에서1줄 : 칼리굴라
87쪽 2줄, 4줄 : 칼리굴라
125쪽 1줄, 9줄 : 칼리구아
383쪽 밑에서3줄 : 칼리구아
384쪽 6줄 : 칼리굴라(Caligula)
92쪽 8줄 : 견유학파(Kynismus)
138쪽 6줄 : 견유학파(Kyniker)
278쪽 11줄 : 코덱스(Kodex)
456쪽 5줄 : 책(Codex)
278쪽 밑에서3줄 : 도미티아누스
383쪽 밑에서3줄 : 도미티아누스
386쪽 3줄, 4줄, 5줄, 밑에서4줄, 밑에서3줄, 밑에서1줄 : 도미티안
387쪽 1줄, 밑에서6줄 : 도미티안
388쪽 3줄, 밑에서2줄, 밑에서1줄 : 도미티안
389쪽 2줄, 밑에서7줄, 밑에서5줄, 밑에서4줄, 밑에서3줄 : 도미티안
390쪽 1줄 : 도미티안
316쪽 밑에서1줄 : 가현설(假現說 doketismus)
319쪽 밑에서5줄 : 가현설(Doketismus)
458쪽 10줄 : 가현설(Doketismus)
400쪽 밑에서1줄 : 경전Kanon
401쪽 5줄 : 경전(kanon 經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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