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마감일기 (김민철 외, 놀, 2020.) 본문
업계 격언으로 '(글) 생산력은 남아있는 마감 기한과 반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격언에 격하게 공감하며 사는, 그래서 가끔은 글을 쓰기 위해서 일부러 마감의 지옥 속에 스스로를 밀어넣어넣기도 하는 모든 글쟁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마감이 다만 개인의 일이라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의 마감은 타인의 마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글만 해도 그렇다. 내가 마감 기한을 어기는 순간, 다른 작가님들이 아무리 기한 안에 글을 마감해도 이 책은 완성될 수가 없다. 만약에 출간일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데드라인에 맞춰 허겁지겁 마감을 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에디터와 디자이너의 야근으로 이어질 것이다.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일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마감은 에디터의 마감으로, 에디터의 마감은 디자이너의 마감으로, 디자이너의 마감은 인쇄소의 마감으로.
회사 일도 다르지 않다. 우리 팀 회의가 늦어져서, 내 결정이 늦어져서, 감독님에게 아이디어를 늦게 전달하면? 어김없이 감독님과 조감독님의 야근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지. 편집실과 녹음실과 2D실과 모두의 야근으로 줄줄이 이어진다. 세상에 이보다 정직한 도미노도 없다.
결국 마감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나의 마감이 늦어지면 다음 사람이 마감을 맞추느라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아는 것. 나의 일상이 중요한 것처럼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자각하는 것. 더 고민해보고 싶고, 더 써보고 싶고, 끝까지 붙들고 해보고 싶지만, 그리고 그러다 보며면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은 착각도 들지만, 지금까지 최선의 지점에서 멈춰서는 것. 다음 사람을 믿고, 지금까지의 최선의 공을 던지는 것. 그것이 마감의 규칙이다.
중요한 지점은 '지금까지의 최선의 공'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못 던진 대단한 공'이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못 쓴 대단한 글, 지금까지 누구도 못 그린 대단한 그림, 지금까지 누구도 못 이룬 대단한 목표. 이런 목표가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그런 목표들이 가끔은, 정말 가끔은 다른 차원의 결과물로 데려다주기도 하니까. 다만 그 야망은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 그리고 진행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 문제는 내내 미루기만 하다가 왜 갑자기 마감 직전에 그 야망을 불태우냐는 거다. 왜 불타는 야망으로 남들의 일상도 불태워버리냐는 거다. (김민철, 「마감 근육」, 18~20쪽.)
(...) 사람은 왜 글을 쓸까요? 왜 글쟁이들은 항상 돈이 안 된다, 마감이 끔찍하다, 업계 상황이 치사하다,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글을 끊지 못할까요? 자신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표현은 모든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쓰는 건 지긋지긋하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정신병원에 다닐 돈도 없는 가난한 글쟁이가 무엇으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글을 쓸 자신이 없을 정도로 글 때문에 상처받고도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쓰기밖에 없다는 게 이 직업의 비극입니다. (이숙명, 「숨바에서 온 편지」, 55쪽.)
그림을 그리는 일에도, 글을 써 내려가는 일에도 배움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매 순간 그 일이 다음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강하게 끄덕이며 눈앞의 일을 그저 묵묵히 해왔고, 그때마다 얻을 것들은 분명히 발견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잘 모르고, 무언가를 똑같이 따라그리는 기술 또한 없지만, 교과서 모퉁이가 온통 시커매지도록 낙서를 하고 친구들의 공책에 귀여운 그림을 그려주던 나. 나는 손으로 마음속의 이야기를 그리기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만화를 그릴 줄 모르던 내가 만화가의 인터뷰를 읽고 어쩌면 나도? 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잘 그려야만 한다는 마음보다는 때마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차려지는 사람이야말로 훨씬 즐거운 그림을 그리며 산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부분을 그릴 때 욕실 앞에서 쭈그리게 되는 만화가를 상상해보면, 어째 마음이 뻐근해지며 이상한 연대감이 생겨난다. 우리는 때로 무언가를 어렵게 여기며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물론 평소에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금방 끝나는 마감은 무엇보다도 기쁘지만, 재미있는 계단을 밟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어렵게만 보였던 일에서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방향이 보이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삽화가, 그리고 만화, 그리고 또 에세이집을 내는 사람이 된 나의 지난 날에는 그럴 수 있는 나를 만든 마감들이, 그 이전에는 묵묵히 회사를 다니던 시간이 있었다. (임진아, 「마감이라는 캐릭터」, 164~165쪽.)
교정. 초판 1쇄
81쪽 밑에서6줄 : 일이나 국으로 계속 -> 일이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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