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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과거 (테사 모리스-스즈키, 휴머니스트, 200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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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과거 (테사 모리스-스즈키, 휴머니스트, 2006.)

Dog君 2024. 12. 23. 10:53

 

  사료史料로서의 소설, 사진, 영화, 만화, 온라인콘텐츠에 대한 분석의 가능성과 방법론을 모색한 이 책의 내용은, 쓰여진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보면 아주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비전공 독자가 이제 와서 이 책을 굳이 찾아 읽을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료로서가 아니라, 분석의 대상(텍스트)으로서의 소설, 사진, 영화, 만화, 온라인콘텐츠에 대해 여전히 적절한 수준의 방법론을 가지지 못한 역사학에게는 (이하나, 「한국 공공역사 연구의 가능성과 지향」, 『역사비평』 148, 2024.) 아직 이 책이 필요해보입니다. 

 

  게다가 이 책이 나온 이후로 사료와 텍스트의 범위는 더 확장되었기에 비평에 대한 고민은 더 깊게 요구될 겁니다. 유튜브의 대중화와 '짤meme'의 범람은 역사학이 그간 묵수했던 전통적인 방식의 텍스트 분석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이지요. 작금의 현실에 적절히 적응/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역사학은 계속 더 분투해야겠습니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의 아시아 침략 같은 사태에 관한 모든 서술을 동등하다고 보는 것은―어떤 역사는 다른 역사보다 '더 나은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가능성을 방기하는 일이다. 만일 모든 서술이 진실이든 진실에 반하는 것이든 동등하다면, 과거의 잘못된 유산을 바로잡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책임 문제와 정면으로 맞붙어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31쪽.)

 

  여기서 나는 '해석으로서의 역사'가 '동일화로서의 역사'보다 바람직하다거나 또는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미디어는 기념에 적합한 반면 다른 미디어는 해석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어떤 종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보다 본질적으로 '뛰어나다'고 넌지시 암시하려는 생각은 없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이해가 단지 지적인 사안은 아니라고 인식하는 대목부터 출발했으면 싶다. 과거와 만나는 일은 어떤 경우든 순수한 지식과 함께 감정과 상상력을 동반하는 법이다. 과거에 관한 지식은 개인적인 아이덴티티를 이끌어낼 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결정하는 실마리도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의 역사를 볼 때 감정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역사 지식을 마치 순수이성의 한 형태인 것처럼 취급하여, 그것을 훼손할지도 모르는 열정이나 공포, 희망, 기쁨 같은 영역을 넘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기 쉽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수많은 대중 미디어의 표현은 말할 것도 없고, 경계해 마땅한 국수주의적 역사학의 대중적인 형태조차도 학문의 역사가 걸핏하면 억눌러왔던 감정에 호소하는 힘을 자신의 밑천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역사의 해석적인 차원과 함께 정서적인 차원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대한 지식이 감정이나 아이덴티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며, 또 우리의 행동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인식하여, 그러한 정서의 원인이나 거기에 포함된 함의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왜 과거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서술에서 더욱 감정의 몰입을 느끼는 것일까? 과거 사건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 깊이 감동하면서도 다른 이미지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정서적인 몰두는 사건의 원인이나 결과를 해석할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요컨대 '동일화로서의 역사'와 '해석으로서의 역사'는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 것일까? 과거에 대해 가르치는 미디어는 그것들의 상호작용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그러한 미디어는 개인이 과거 사건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숱한 미디어에서 만나는 과거의 이미지가 어떻게 역사적 책임의식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형성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42~44쪽.)

 

  역사소설의 상상풍경을 검토하는 일은 '역사에 대한 진지함'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하다. 역사소설과 '올바른' 역사 사이의 관계는 소설에 나오는 사건이나 인물의 리얼리티 문제를 통해 자주 논의된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의 이야기를 검토해보고 '이거 정말일까?' 하는 물음이 논의의 중심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진지함'을 추구하는 데는 더욱 폭넓은 과정이 내포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은 의문도 고찰해야만 한다. 어떤 이유로 이 소설가는 이 사건에 대해 쓰고 싶어했으며, 독자는 그것을 왜 읽고 싶어할까?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에서 어떤 풍경이 빠져 있는가? 소설 속에서 마주치는 과거의 풍경은 특정한 역사의 일부에 일체감을 느끼거나 그것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90쪽.)

 

  사진은 보는 이에게 공감과 아이덴티티를 환기시키는 한편, 아이덴티티 의식에 대해 반성하는 기회를 마련해줄 수도 있다. 말을 바꾸면 사진은 진실이나 날조라는 꼬리표가 붙는 증거자료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여러 사유―역사에 대한 진지함을 지향하는 과정의 핵심을 이루는 지속적인 사유―의 대열을 움직여가는 의문부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필름에 어떤 다른 영상이 찍혔는가? 여기에 어떤 영상이 결여되어 있는가? 그 부재는 사진가가 처분한 탓일까, 편집자나 검열자가 삭제한 때문일까. 또는 단지 결정적인 순간에 사진가가 도저히 셔터를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사진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영상, 텍스트, 이야기된 말, 그 밖의 기억의 단편은 어떻게 짜여 있는가? 사진에 비친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사진을 둘러싸고 어떤 다양한 서술이 구축될 수 있을까? 어찌하여 나는 이 영상에 저 영상보다 강한 감정을 품는 것일까? 다른 장소, 다른 시대 사람들은 이들 영상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이 사진이 찍힌 다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63쪽.)

 

  두 사이트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비슷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1단계에서 논의의 조건을 재정의한다. 역사적 문맥이나 원인, 의미와 같은 폭넓은 문제를 숙고하기보다는 논의를 의도적으로 좁혀서 하나의 틀정한 쟁점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종군위안부'는 정말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 왔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데 신경을 모은다. 이 사이트들은 이렇게 문제를 재정의하고 나서 2단계로 넘어가는데, 구체적인 사료나 증언을 선택해서는 신빙성이 없다는 데 집중 공격을 퍼붓는다. (...) 이러한 축소의 과정은 중요한 수사적 기능도 수행한다. 특정한 여성이 군데 의해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는 증거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다른 모든 여성도 그런 식으로 징집되었다는 데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또 강제적 징집이라는 문제를 의심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군 폭력의 희생자라는 '종군위안부'의 이미지를 모조리 부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수사가 지닌 구조는 오늘날 말살의 역사학 전체가 나타내는 특징이라 할 만하다.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든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든 '종군위안부'든, 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주의자가 저지른 원주민 학살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든, 말살의 역사학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해 2단계 전략을 되풀이하여 전개한다. 우선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원인, 결과라는 전체적 차원으로부터 논점을 분리하고, 논의를 오로지 편협한 정의의 문제로 몰아넣는다. 그 다음 아주 적은 수의 증거만 뽑아내서 집요하게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다.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학살에 대한 말살의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살해당한 사람의 숫자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그러고 나서 사건 희생자의 잠재적인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특정한 증거문서나 증언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 옮겨간다. (...)
  인터넷 같은 하이퍼텍스트 미디어는 이러한 전략을 꽤 쉽게 유용할 수 있는 성질을 띤다. 물론 인터넷은 학술논문이나 국제연합인권위원회의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고처럼 긴 문장으로 쓴 복잡한 문서를 게재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지만, 이런 글은 화면에서 읽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인터넷의 형식으로는 다루기가 주체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웹 사이트를 어떤 사건의 역사적 유래나 의미에 관해 포괄적인 인식을 얻기 위한 출발점으로 활용하는 데는 상당한 곤란이 다른다. 거기에 실린 논의라고 해봐야 극히 한정적일 뿐이어서 (이 문서는 신용할 수 있는가, 이 사실 도는 숙자는 믿어도 좋은가 하는 질문처럼) 사실을 둘러싼 쟁점에 갇히기 쉽다.
  바꿔 말하면 인터넷이란 과거의 지식이 문자 그대로 '파편이 되어(in bits)'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역이다. 보통이라면 찾아보거나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1차 자료나 증언에 많은 사람들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엄청나게 유익하다. 또한 이론의 여지가 있는 쟁점에 대해 각양각색으로 대립하는 의견을 폭넓게 진열하는 데도 뛰어난 장이다. 그러나 '파편'들을 뜯어 맞추어 지속성 있는 해석의 서술로 정리해야 할 단계에 이르면, 그다지 유익하다고 할 수 없다. (309~311쪽.)

 

교정. 1판 1쇄
302쪽 각주5번 : 제국 북진해오자 -> 제국이 북진해오자
311쪽 11줄 : 환희 -> 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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