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어크로스, 2018.) 본문
이 책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을 계기로 집필되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적대하고 우방을 존중하지 않으며 제도적 절차까지 의심하는(부정선거 음모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침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浮上은 전세계의 모범을 자임했던 미국 정치의 일탈처럼 보입니다. 이런 식의 극단주의자 혹은 독재자가 트럼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칠레),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등도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고 지적하지요. 저자는 이들 "포퓰리즘 아웃사이더"(31쪽)는 당장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단기적 유혹에 빠진 기성 정치인과의 연합이나 이들의 공백을 틈타 집권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정당 체계를 부정하고 엘리트 집단과 기성 정치인들을 부패하고 음모를 꾸미는 집단으로 매도하여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곤 하는데요, 이는 저자가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으로 꼽은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15, 130~148쪽) 같은 덕목과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을 거추장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정치적 반대자의 기본권도 박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는 것이 단기적인 정치적인 득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확고하게 선언합니다.(87쪽)
사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이들은 정당과 기성정치인을 통해 걸러져야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20세기 버전이라 할만한 헨리 포드가 끝내 대선 후보로 지명되지 않은 것도 정당이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덕분이었죠. 하지만 당장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에, 정당이 본래의 수행하지 못하면 극단주의자는 권력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권력을 획득한 극단주의자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해 인내심 부족을 드러내고, 결국에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구요.
이들 극단주의자의 돌출행동은 도덕과 윤리에 대한 사회적 기존을 하향시킨다는 점에서도 문제입니다. 트럼프의 일상적인 모욕과 거짓말, 속임수는 어느새 일상의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전까지는 용납될 수 없었던 스캔들이 새로운 기준이 되면서 사회 전반의 도덕과 윤리 기준까지 하향조정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지겠지요.
짐작하시겠지만, 이 책은 현재 한국의 독자에게 굉장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장의 권력 획득에 눈이 멀어 민주주의적 소양이 부족한 포퓰리즘 아웃사이더를 영입하고, 집권에 성공한 아웃사이더가 민주주의 질서를 노골적으로 유린하는 상황이 지난 몇 년간 우리가 겪었던 일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지적들이 그만큼 더 통렬하게 느껴집니다. (최근 이 책의 판매가 크게 늘고, 각종 시사 방송에서 이 책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겠죠.)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정치가 본래의 역할을 되찾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먼저 정당은 조직체계를 재확립하고 지도부의 권한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원과 시민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되 대중적 정치 선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지지자 집단의 구성을 다각화할 수 있도록 주류 집단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양한 인종, 종교, 성을 포괄하여 정치적 양극화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극화된 정치구조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새롭게 발화되는 메시지들까지 양극화된 틀에 가둔다는 점에서 관용과 자제의 덕목을 가로막으니까요.(280~285쪽) 정리해보면, 결국 정치와 정당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자는 정도의 소박한 해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소박한 내용에 대해 딱히 반론을 제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결국 착하게 살자는 말이니까 ㅋ) 책을 읽고 나서 우리의 현실로 눈길이 돌아오면 살짝 물음표가 생기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자가 제시한 민주주의의 두 가지 핵심 개념인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한국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물어볼 때 흔쾌히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개념들은 조지 워싱턴 이래 미국 공화정의 전통 속에서 도출되고 지켜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정치사에서 '상호 관용'과 '자제'가 관철된 기억은 좀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김대중과 노무현 등 민주당 계열의 정치 리더는 그래도 이들 덕목에 충실한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후 집권한 민정당 계열의 정치 리더는 욕보이기식 검찰 수사나 가혹한 정치 보복으로 응수하곤 했습니다. 이승만 이래로 한국의 정치사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사법 살인과 탄압으로 점철되었던게 사실 아입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에게 그런 전통이 없으니 이들 규범도 실현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전통이 부재한 우리가 이들 규범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쉬이 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혹한 정치 보복이 '트라우마'로 남은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지금처럼 갈등이 심화된 우리 상황에서, 이처럼 '건강한' 규범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의 인내심이 양측 모두에게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저 슬플 따름입니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이들 규범을 준수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들 규범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놓고 헌정질서를 유린한 이들에 대해서도(서부지법!!) 관용과 자제가 가능한지, 가능/불가능하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등등이 두고두고 논쟁의 여지로 남겠지요. (저자 역시 상호 관용의 범위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133쪽)이라고 명시하기도 했구요.) 2025년 3월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측은 단지 세계관의 차이를 넘어서 공존이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분열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당장 12월 3일 밤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저자가 우려했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빠져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148쪽) 활동이 아니었나 싶은데, (여기서 살짝, 이 책이 나온 이후에 벌어진, 미 의회 폭동 사건에 대해 저자가 어떤 입장인지가 궁금해집니다.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에서는 너무 단편적인 언급만 있어서요.) 많은 분들이 이들 탄핵반대세력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명쾌한 합의가 나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잠시 온라인에서 화제였던, 정희진의 칼럼('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3월 19일자)과도 맞닿는 부분이기도 하네요.)
또 하나 이 책에서 생략된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도 있습니다. 이 책은 극단주의자의 등장과 집권을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전제하지만, 저에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위협과 일탈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공화정의 오랜 전통을 가진 미국에서조차 이러한 극단주의가 심지어 집권까지 할 정도의 중요한 흐름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그리고 한국에도 이런 집단이 전체 여론의 몇십%를 차지할 정도로 엄존한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가치판단과 별도로 충분히 시간을 들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미국 정치사상의 또다른 기원인 잭슨주의의 부상과 탈단극적 세계질서의 등장에서 트럼프 부상의 원인을 찾은 차태서의 『30년의 위기』가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읽는 중인데, 재미있네요.)
이 책에 대해서 현재의 우리에 대한 기시감을 말했습니다만, 이 책은 미래의 우리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작금의 혼란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귀결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되리라 믿고 또 희망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책은 후안 린츠의 연구를 인용하여 잠재적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지표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30~31쪽) 물론 이 기준에 트럼프나 윤석열 등의 집단이 99.9% 합치한다는 것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만, 그에 저항하는 이들 역시도 이와 완벽하게 별개는 아닐 수 있습니다.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이 종종 꺼내드는 '역사왜곡방지법'이니 무슨무슨 검열법이니 하는 것들 역시 이들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을 향하는 날카로운 잣대는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성찰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찰은 협상과 양보, 타협이 반복되는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러한 지난함을 불필요한 속박으로 여기지 않고 그 과정 모두가 민주주의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민주적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이 두 규범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왔다. 양당 지도자는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처럼 관용과 절제의 규범은 미국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軟性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당파 싸움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반면 1930년대 유럽이나 1960년대와 70년대 남미에서 나타난 자멸적인 당파 싸움은 여러 국가의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15쪽.)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의 시나리오는 정황만 달리하여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와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같은 아웃사이더 정치인들 모두 내부로부터, 그리고 선거나 강력한 정치인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좌에 올랐다. 각각 사례에서 기존 엘리트 집단은 인기 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여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으며,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그들은 두려움과 야심, 그리고 판단 착오라는 치명적 실수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들은 권력의 열쇠를 잠재적 독재자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21쪽.)
잠재적 대중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인 셈이다. (29쪽.)
그렇다면 우리는 독재의 징후를 보이지 않은 정치인 중에서 잠재적 독재자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뛰어난 정치학자 후안 린츠Juan Linz에 주목해보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에 스페인 내전을 겪은 린츠는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비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일 대학 교수인 린츠는 오랜 연구를 통해 민주주의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다양한 주장은 얇지만 중요한 책, 《민주주의 정권의 몰락The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8년에 출판된 이 책은 정치인의 역할을 조명하면서, 그들의 선택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강화하거나 위태롭게 만드는지 살피고 있다. (...)
우리는 린츠의 연구를 기반으로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개발했다. 우리는 1)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 (...)
이러한 기준 중 하나라도 충족한다면 우리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인들이 전제주의 리트머스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을 보이는가? 주로 포퓰리즘 아웃사이더가 그렇다. 포퓰리스트는 기성정치에 반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부패하고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 집단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 정당 체계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기성 정치인들을 비민주적이고 비애국적인 자들로 매도한다. 또한 지금의 통치 시스템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엘리트 집단이 독점한, 부패하고 상처입은 가짜 민주주의임을 유권자들에게 강조한다. 포퓰리스트는 엘리트 집단을 처단해서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포퓰리스트가 선거에서 이길 때 그들은 종종 민주주의 제도부터 공격한다. (...) (30~31쪽.)
'집단적 포기collective abdication',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Ivan Ermakoff가 '이념적 공모'ideological collusion'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잠재적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제어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야 한다. 비록 이를 위해 달갑지 않은 경쟁자와 잠시나마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는 2016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인사들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협하는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저버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다. (...) (86~87쪽.)
(...) 민주주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가족 소유의 기업과 군대는 명령에 따라 수직적으로 움직이지만,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협상과 양보·타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대통령이 발의한 법안은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거나, 사법부의 반대로 무산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제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비판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아웃사이더들에게, 특히 선동 성향이 강한 독재자들에게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속성은 견대기 힘든 속박이다. 견제와 균형은 그들에게 멍에와 같다. 법안을 발의할 때마다 당 대표와 오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후지모리 대통령처럼 잠재적 독재자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일상적인 정치 과정에서 인내심 부족을 드러낸다. 그리고 후지모리처럼 어떻게든 그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100~101쪽.)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잠재적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 미국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완전하게 작동하는 통치 체제를 개발할 수 있는 뛰어난 지혜를 그 어떤 정치인이나 철학자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
미국 민주주의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준 것이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한 헌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랬단 말인가? 아마도 미국 사회의 경제적 풍요, 탄탄한 중산층, 활발한 시민사회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두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을 꼽고 싶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비록 이러한 규범은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다. (...)
가정이나 기업, 그리고 대학 운영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규범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길거리 농구를 떠올려보자. 길거리 농구에서는 NBA나 NCAA와 같은 단체가 규정한 경기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규칙을 강제할 심판도 없다. 다만 무엇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해 선수들 사이에서 합의된 규범이 경기가 혼란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다. 일반적으로 농구 코트 절반을 이용하는 길거리 농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규칙을 잘 알 것이다. (...)
(...) 규범은 성문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규범이 제대로 작동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규범의 필요성을 종종 간과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규범의 가치는 물과 산소처럼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규범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 사람들은 폭력 행위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고, 혹은 공식적인 비판이나 노골적인 배척을 통해 부정하는 입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규범을 어긴 정치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상원이나 선거인단 운영에서 대통령의 기자회견 방식에 이르기까지 정치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그래도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를 들 수 있다. (130~132쪽.)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 물론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주장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정당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경쟁자가 올바르고, 국가를 사랑하고, 법을 존중하는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경쟁자가 반역을 꾀하고, 전복을 꿈꾸고, 혹은 민주주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선거에서 이길 때 우리는 그날 밤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상호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이러한 상호 관용의 개념은 어쩌면 당연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정치 경쟁자가 적이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혁신적이고 놀라운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자에 대한 반대는 곧 반역을 의미했다. (...) (133쪽.)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두 번째 규범은 우리가 '제도적 자제'라 부르는 개념이다.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137쪽.)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둘은 때로 서로를 강화한다. 정치인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제의 규범도 기꺼이 실천하려 든다. 또한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정치인은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시키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자제 규범의 실천(가령 민주당 대통령이 제시한 연방대법원 판사 임명안을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통과시킨 것처럼)은 스스로 관용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줌으로써 선순환을 이뤄낸다.
그러나 상황은 얼마든지 반대로 흐를 수 있다. 상호 관용의 규범이 허물어질 때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정당이 서로를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할 때 정치 갈등은 심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 패배는 일상적인 정치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재앙이 된다. 패배의 대가가 심각한 절망일 때 정치인들은 자제 규범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넘어간다. 헌법적 강경 태도는 관용의 규범을 허물어뜨림으로써 경쟁자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키운다.
(...)
이처럼 극단적 정치 분열은 민주주의 규범에 위협이 된다. 정치판이 세계관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배타적인 진영으로 분열될 때 그 사회는 관용의 규범을 유지하기 힘들다. (...) 정치집단이 서로 간 공존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분열될 때, 특히 구성원끼리 교류가 부족하고 고립이 심해질 때 정상적인 정당 경쟁이 사라지고 적대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상호 관용이 사라지면서 정치인들은 자제의 규범까지 저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 상황이 이러한 국면으로 접어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143~148쪽.)
1993년 뉴욕의 민주당 상원 의원이자 전작 사회학자였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Daniel Patrick Moynihan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력 있는 주장을 했다. 모이니핸의 설명에 따르면 불문율에 대한 위반이 계속해서 일어날 때 사회는 '일탈의 범위를 축소하는', 다시 말해 기준을 하향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행동이 정상적인 행동으로 바뀌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모이니핸의 가설을 미국 민주주의에 적용할 수 있다. (...) 트럼프 취임 후 미국 사회는 정치적 일탈을 정의하는 기준을 하향 조정했다. 트럼프의 일상적인 모욕과 괴롭힘, 거짓말, 속임수는 이러한 행동을 일반적인 행동의 범주로 넣어버렸다. 트럼프의 트윗은 언론과 민주당 인사, 그리고 몇몇 공화당 인사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트윗이 많아질수록 이에 대한 사회의 대응 능력은 떨어지게 된다. 모이니핸이 지적한 것처럼 정치적 일탈이 광범위하게 벌어질 때 사회 구성원들은 그 흐름에 압도당한다. 그리고 점차 자극에 둔감해진다. 지금 미국인들은 예전에는 스캔들이라고 생각했을 사건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251~252쪽.)
(...)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하게 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
우리는 저항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는 권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반트럼프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연합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 가장 효과적인 형태는 서로 이질적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집단이 하나로 뭉치는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은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 (272~275쪽.)
(...) 공화당은 미국 전역에서 승리했지만, 공화당 '체제'라고 하는 것은 이제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공동화 현상으로 인해 공화당은 극단주의자의 등장에 취약한 조직이 되어버렸다.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공화당은 전면적인 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개혁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공화당의 기존 체제를 회복해야 한다. 이 말은 네 가지 핵심 영역에서 즉 재정, 풀뿌리 조직, 메시지 전달, 후보 공천에서 당 지도부가 권한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도부가 후원 단체와 우파 언론에서 자유로워질 때 공화당은 비로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그 개혁은 주요한 변화를 포함한다. 우선 극단주의자를 주류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지지자 집단의 구성을 다각화함으로써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백인 개신교 집단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그리고 백인 민족주의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혹은 공화당 애리조나 상원 의원 제프 플레이크가 언급한 "포퓰리즘, 민족주의, 선동에 대한 도취"에서 벗어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280~281쪽.)
비록 민주당은 심각한 양극화의 주범은 아니지만 양극화 해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일부 민주당 인사는 백인 노동자 계층과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영향력 있는 많은 인사들은 이를 위해서 민주당이 이민자 수용, 그리고 소위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개인의 관심과 입장은 인종, 민족, 종교, 성 등의 중요한 기준으로 형성된다는 정치 견해―옮긴이)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비록 널리 울려 퍼지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민주당이 백인 노동 계층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소수민족의 영향력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아마도 당파적 양극화를 완화해줄 것이다. 민주당이 소수민족의 요구를 외면하거나 부차적인 사안으로 치부한다면 노동 및 중산층 백인 유권자 표를 분명히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민주당은 1980년대와 90년대, 즉 백인이 주축이 되고 소수민족은 부차적인 집단에 불과했던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말 그대로 민주당은 그들의 경쟁자인 공화당을 닮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민과 인종 문제에 대해 트럼프 쪽으로 입장을 기울이면서(즉, 두 사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공화당 지지자들의 두려움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끔찍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 내에서 소수집단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시도(대단히 강력한 전략)를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미국은 지난날의 가장 수치스러웠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건국자들은 인종차별 문제를 그냥 덮어두었고, 이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재건 시대가 실패로 끝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결국 화해를 했지만, 그들의 타협은 다시 한번 인종차별을 묵인하는 데 기반을 둔 것이었다. (...) 물론 이는 대단히 힘든 과제이지만, 이제 미국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 (283~285쪽.)
교정. 초판 21쇄
262쪽 13줄 : 가드레인은 -> 가드레일은
280쪽 밑에서8줄 : 극단주의자 등장에 -> 극단주의자의 등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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