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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 상상스퀘어,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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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 상상스퀘어, 2023.)

Dog君 2025. 4. 3. 16:54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한국현대사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두 가지 서사로만 구성된 것 같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양분할 수 있는 이들 서사 사이에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어 보이지요.

 

  이러한 구도에 입각해서 이 책의 내용을 따진다면 이 책은 보수적인 축에 속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그런가, 책을 읽으면서 감정적인 저항감이 일어나는 부분이 몇 있었습니다. 해방 후 귀속재산의 처분 과정을 리스크를 감수한 자본(가)의 형성 과정으로 설명한다거나 한국 기업이 R&D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주주의 이해관계에 충실하지 않을 수 있는 재벌 특유의 소유구조 덕분이라고 설명하는 부분 등에서 당장 반발심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즉각적인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이 책은 꽤 재미있는 책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현재 남한의 시장경제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최근만 해도 (기업 이사의 의무를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한) 상법 개정안이 왜 논란이 되는지, 어째서 애플의 PBR(주가순자산비율, 즉 시장에서 기업의 가치가 순자산에 비해 어느 정도로 높게 평가되는지를 나타내는 값)은 67이 넘는 반면(2024년 말 기준) 경쟁사인 삼성은 1도 채 되지 않는지(2025년 4월 기준) 등, 현재 한국경제가 이런 모습이 된 연유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지식들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떤 독자는 이를 통해 경제면의 뉴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을 얻을 것이고 또다른 독자는 투자를 위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애초부터 현대사에 대한 도덕적·당위적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양분화된 서사 구도 위에서 판단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진보/보수의 치열한 해석전쟁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당장 '건국/정부수립' 논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에 내걸린 현수막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써있었고 연호도 1919년을 기준으로 하여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했으니 '정부 수립'이 타당한 것 같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조차 몇 차례에 걸쳐 "건국"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을 보면 '건국'이라는 해석이 옳은 것도 같습니다. 이처럼 '건국'과 '정부 수립'의 용례가 진보/보수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오간다는 것은, 이들 용어를 진보/보수의 척도 위에서 판단해서는 안 될 뿐더러 양자가 배치되는 개념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랬던 것이 2000년대 언제쯤에 이른바 '뉴라이트'라고 하는 이들이 '건국'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집어넣기 시작하면서 지금 같은 아수라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게 뭔가요.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 '1919년이냐, 1948년이냐' 같은 앙상한 이지선다만 남아서는 빨간당이냐 파란당이냐 하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렸죠.

 

  이렇게 돼서 가장 손해본게 아이러니하게도 (뉴라이트가 그렇게나 물고 빨고 하는) 1948년 8월 15일입니다. 이 날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성별과 계층,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 보통선거를 실시해서, 노동자의 이익균점권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천명한 헌법을 만들고, 뭐 그런 등등의 일들이 다 포함된 끝에, '임시' 같은 궁색한 표현 다 떼어버린 어엿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그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의미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되면서 우리는 1948년 8월 15일에 등장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현실의 권력관계를 초월해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현실의 권력관계가 뚜렷하게 양분되어 있으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그러한 구도에 속박될 수밖에 없지요.

 

  저는 그 때문에라도 일말의 민주주의적 소양조차 없는 저 권력집단이 쓸려나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관점과 상상력이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믿거든요. (그러니까 내일 꼭 좀...)

 

  농지 개혁은 공산화 및 정치 불안정의 위험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성도 향상시켰다. (...)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농민의 생산성은 거의 제자리걸음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소수의 지주가 토지 대부분을 지배하고, 이들이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면, 그 사회에는 기술 혁신이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1945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사회에 실업자가 넘쳐흘렀기에, 지주들은 가혹한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소작을 줄 수 있었다. 문제는 지주들이 많은 수입을 얻더라도 관개 시설을 개선하는 등 투자에 나설 유인이 없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고리대금을 통해 자금을 운용하고,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은 땅을 취해 보유 토지를 늘리는 식으로 얼마든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사회는 지속적인 악순환의 늪에 빠진다. 국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함에도 기아는 사라지지 않고, 극소수의 지주들은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쌓기만 할 뿐 투자할 의지를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농지 개혁은 투자를 게을리하는 지주 집단을 농촌에서 쫓아냄으로써 생산성 향상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
  토지 개혁 이후 농업 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된 또 다른 이유는 '동기 유발'에 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봐야 대부분의 수확물을 지주에게 빼앗기는 상황에서 수확량을 늘리려는 동기가 생기기는 어렵다. 그런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자기 땅이 생김에 따라 가족 구성원을 총동원해 생산량을 늘릴 가능성이 열렸다. (...)
  특히 한국 전쟁 당시 전쟁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정부가 토지세를 쌀로 거둬들일 수 있었던 것도 농업의 회복 덕분이었다. 정부는 한국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심각한 물가 불안으로 인해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보다 현물을 직접 가져가는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37~39쪽.)

 

  결국 50년대 말로 가면서 내재되었던 문제들이 하나둘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원화 가치 고평가의 부작용이 커지는 데다, 전후 복구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대외 원조마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 Combined Economic Board를 통해 1956년부터 통화 공급 축소 요구가 관철된 것도 문제를 가져왔다. CEB는 1952년 12월에 한국과 미국 간에 맺어진 협정으로 만들어졌는데, 미국은 대규모 원조를 해주는 대신 경제 정책의 운용에 있어서 CEB의 통제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50쪽.)

 

  그러나 화폐 개혁은 총체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생활비에 한해서 6월 17일까지 가구당 한 사람에게 500원 한도로 10대1의 비율에 따라 새 은행권을 바꿔준다고 했지만, 충분치 않은 한도로 사회적 불안감만 높아졌다. 이후에 순차적으로 1인당 교환 한도가 늘어날 예정이었고 또 실제로 예금 동결 조치도 해제되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이 매우 컸던 것이 주된 실패 원인이었다. 특히 군사 정부가 '부정한 돈'이라는 딱지를 붙여 마음대로 국민의 돈을 빼앗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컸다.
  특히 미국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미국 관료들은 화폐 개혁이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며, 이는 그동안 미국과 박정희 정부가 함께 노력해 왔던 인플레이션 해소 노력을 한꺼번에 망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결국 군사 정부는 예상보다 적은 은닉 자금 그리고 미국의 강력한 반발 속에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예금 동결 조치를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유증은 극심했다. 일단 시중에서 강력한 사재기가 펼쳐졌다. 돈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니, 월급이나 거래를 통해 받은 돈으로 재빨리 물건을 사두려는 욕구가 생겼고, 이는 고스란히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금융 기관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화폐 개혁 과정에서 한 사람당 500원 한도로 돈을 바꿔주는 한편, 은행 예금을 동결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군사 정부가 화폐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투자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은행 예금이 감소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금리가 인플레이션 수준보다 훨씬 낮았던 것도 시중 자금을 은행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집세부터 각종 생필품 물가가 1962년 한 해에만 18.4%나 오르는 반면, 은행 예금 금리는 15.0%에 고정되어 있으니 예금을 하면 할수록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원조처는 한국 정부에 "국내 저축을 늘릴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채택"하라고 권장한 바 있으나, 한국 정부는 물가 상승률보다 금리를 더 높게 인상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수출 제조업 부문에 투자하도록 촉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저렴한 금리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화폐 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국내 저축을 활용해 투자를 촉진하기가 힘들어지자, 군사 정부에 남은 선택은 미국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는 것 외에는 없었다. (...) (69~72쪽.)

 

  1997년에 발생했던 외환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있지만, 필자는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가 가장 중욯나 배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대출 금리 수준(16.2%)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다도 되며 이후 5년에 거려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특혜였고, 이는 한국 기업들이 부채에 의지한 '브레이크 없는' 성장 전력을 더욱 강하게 추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 조치 이후 기업들의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된 반면, 금융 비용 부담률은 5%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기업들의 반대편, 즉 가계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은행 이자율이 인플레이션 수준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 사채 시장에서 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특히 자본 시장의 발달이 미약해 안정적인 배당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는 저축 자금을 고리 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8.3 조치로 자금이 묶이고 심지어 낮은 금리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이 사건 이후 박정희 정부의 독주가 시작된 것도 경제 전체를 놓고 볼 때 큰 문제가 되었다. (...)
  포항제철소 건설로부터 시작된 중화학 공업의 육성은 미군의 철수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철강과 기계 부품 그리고 선박 제조 등 방위 산업에 대한 육성이 생존의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자본력은 물론 기술 개발 능력을 갖춘 대기업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8.3 조치와 같은 심각한 재산권 침해를 단행해서라도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 셈이다. (...)
  8.3 조치 등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세 가지 문제를 일으켰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첫 번째로 재산권이 상시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국내 저축이 늘어나고 자본 시장이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가 은행 중심의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기업의 상장을 촉진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두 번째는 성과 부진 기업에 채찍을 휘두르는 과정에 '사심'이 개입될 여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정부가 저금리 대출을 배분해 주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점점 한국 경제의 짐으로 작용하게 된다. 중화학 공업의 공급 과잉 문제가 부각되어 이른바 산업 합리화 조치가 취해질 때 많은 기업이 부당한 처우라고 반발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더 나아가 기업들이 많은 대출을 받아 공격적인 경영에 나섬으로써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로 변모하게 된 것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1984년부터 시작되는 3저 호황으로 보상받게 되지만, 이때부터 경기 변동의 폭이 커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02~106쪽.)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때 근로자들의 임금이 상승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소득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의 근로자들은 경제 성장의 과실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1965년 제조업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은 152,000원 수준이었는데, 1990년에는 604,000원으로 늘어났다. "임금이 거의 4배 늘었으니 좋은 일이 아니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같은 기간 한국의 1인당 실질 국민 소득이 7.4배나 늘어났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화가 이뤄지자 폭발적인 노사 쟁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 노동조합 수는 2,618개였지만, 1990년에는 무려 7,698개로 늘어났다. 물론 노동조합의 설립이 경제에 꼭 나쁜 영향을 미치지만은 않는다.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던 이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이들이 다시 소비의 주체로 나서면 '소비 주도 성장'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순환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경쟁력이 개선되고, 경쟁 국가에 비해 생산 비용이 절감되어야 가능하다. (135~136쪽.)

 

  그러나 2000년 정보 통신 거품의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모두 한국 경제에는 큰 기회이기도 했다. 위기가 기회로 작용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기업들이 불황에도 핵심 기술을 향상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 한국은 다르다. 세계적인 미디어 기업 블룸버그Bloomberg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혁신 국가 랭킹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적극적인 연구 개발R&D, Research and development 투자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의 경우 2000년 정보 통신 거품이 붕괴될 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가입국가들 중 평균 수준의 연구 개발 지출을 기록했지만, 2008년에는 4등 수준으로 올라갔고, 2020년에는 2위에 이르렀다(2020년 세계 1위는 이스라엘).
  (...)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는 국제 유력 학술지 82개에 발표된 논문을 바탕으로 세계 연구 기관의 순위를 매기는 데, 이를 네이처 지수라고 부른다. 2022년(2021년 12월 1일부터 2022년 11월 30일 기준) 한국은 세계 7위에 올랐는데, 2019년 세계 9위였던 것을 감안할 때 지속적인 향상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세계적인 불황 이후 경쟁력이 개선되는 두 번째 이유는 환율 때문이다. (...) 환율이 금융 위기 때마다 상승하는 이유는 1997년 외환 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환율 상승과 주식 가격 폭락으로 큰 고통을 겪었기에, 이때부터 한국 원화 자산을 '불황에 약한 위험자산'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즉 불황이 닥칠 때마다 한국에서 해외로 달러가 빠져나가기에 환율이 급등하는 것이다. 물론 수출이 잘 안되면서 무역 수지가 악화되는 것도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 경제는 세계 경기의 하강이 마무리된 다음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 이 결과 한국의 세계 수출 시장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제는 일본을 추월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202~205쪽.)

 

  1972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상승세는 1차 석유 위기에도 꺾이지 않았다. (...) 1차 석유 위기는 제4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 목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이 감산에 돌입한 사건이다. 당시 배럴당 1달러 내외에서 거래되던 가격이 10달러까지 급등함으로써 세계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 한국 경제는 14.9%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사채 동결 조치로 기업들의 이자부담이 줄어들며 공격적인 투자가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1973년에 삼환기업부터 시작된 대규모 중동 건설 수주 때문이었다. (...) (270쪽.)

 

  그렇다면 왜 한국 기업 이익은 위기 이후에 늘어날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외국인 투자 자금이 유출되며 환율이 상승한 것이지만, 이 외에도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이다. (...)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은 생산의 효율이 개선되는 것을 의미한다. (...)
  지속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독자들 중에 일부는 "그게 왜 위기 이후에 기업 실적이 개선되는 원인인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당연히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투자는 항상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주가의 흐름에 민감한 선진국 기업들은 경기가 나빠질 때 즉각 비용 통제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반면 한국은 불황이 온다고 해서 대규모 정리 해고가 단행되는 일은 드물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정리 해고가 단행되었지만, 이후 기업 파산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정리 해고 소식을 접하기 힘들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호황 때 주식 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을 활용해 불황에도 지속적인 투자를 단행한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 검색 창에서 '2022년 삼성전자 투자'라고 검색해보면 필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식 시장이 급격히 침체되는 중임에도 수십조 원에 이르는 투자가 단행되었음을 금방 발견할 테니 말이다.
  한국 기업들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총수가 바로 '오너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너십은 기업에 대한 지배력 및 통제력을 뜻하는 동시에 "이 회사는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뚝심을 가지고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 중반 이후 거의 20년에 걸친 삼성그룹의 반도체 투자와 현대자동차그룹의 끊임없는 신차 출시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를 경영학계에서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기업을 설립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더 큰 목표를 향해 지속적으로 향상을 추구하고 투자를 지속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업 총수가 주식 시장 참가자들에게 애증의 존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병철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 같은 불세출의 경영자들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주주들에 대한 보상 면에서는 짜디짠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결국, 한국이 위기 이후 레벨업하는 이유는 한국 특유의 총수 경영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불황이 닥치는 순간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면서 화끈하게 주가가 하락하는 대신, 회복 국면에서는 누구보다 더 탄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국 총수가 결단을 내려 불황에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340~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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