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스페인 내전 (앤터니 비버, 교양인, 2009.) 본문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서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난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10쪽.)
스페인 북부에서는 혁명적 총파업이 레온의 광산 지대, 산탄데르, 비스카야 등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빌바오에서는 대엿새 동안 치안유지군과 파업 가담자들이 충돌했고, 에이바르와 몬드라곤에서는 40명의 사망자가 났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고 스페인 공군이 광산 지대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반란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에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 아스투리아스는 또한 스페인에서 전국노동연합과 혁명적 동맹 세력인 '노동연합'이 손을 잡은 유일한 곳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지지 기반을 마련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 혁명위원회는 사회주의자 라몬 곤살레스 페냐(Ramón González Peña)가 이끌었다. 그러나 뒷날 공산주의자들은 폭동을 자신들이 주도했다고 자랑했다. 이 폭동은 중도파와 우파가 혁명에 두려움을 품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뒷날 프랑코가 '적색분자들의 음모'를 거론하게 만드는 구실이 되었다.
폭동에 참가한 무장 노동자는 1만 5천 명에서 3만 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무장한 소총은 대부분 당시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가장 온건한 인물로 꼽히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주선하여 보내온 것이었다. (...) 다른 무기는 노동자들이 점령한 지역의 무기 공장들에서 넘겨받았다. 광부들은 또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는데, 이것은 일명 '혁명의 대포'로 불렸다.
(...)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전쟁부 장관은 프랑코 장군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
10월 11일 오비에도에서 혁명 세력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실탄은 거의 다 떨어졌고, 다른 지역의 봉기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10월 12일 황혼 무렵 로페스 오초아 장군은 도시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6일 후 혁명위원회의 새로운 수장 벨라르미노 토마스(Belarmino Tomás)가 모로코군 병력이 도시와 마을에서 철수하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10월 10일 이후 외인군단 병사들과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이 광산촌에 밀고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포로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는 등 그 마을을 마치 적지(敵地) 대하듯 짓밟았다. 치안유지군들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야만스러운 탄압을 자행했다. 가장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친 사람은 치안대 지휘관 리사르도 도발(Lisardo Doval) 소령이었다.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고작 2주 남짓 지속되었지만 1천 명가량의 인명이 희생되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났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고 수천 명이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1935년 1월 전시 상태 해제와 함께 풀려났다. 총 20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실제로 형이 집행된 것은 2명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체제가 혁명적 성격을 띤 반란 행위에 대응했던 방식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너그러운 조치였다. 치안유지군들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야만적 행위는 마드리드의 정치가들보다는 현장에 있었던 치안유지군 지휘관들, 특히 야구에와 프랑코 장군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에서 불가피하게 더 강력한 조치가 뒤따랐는데, 그것은 마드리드 정부가 군대와 치안대의 행동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였다. (74~77쪽.)
새 정부의 수반이 된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는 1936년 1월 1일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그는 이미 코르테스를 해산한다는 칙령을 수중에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총선은 2월 16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는 그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자유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1월 7일에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 운동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한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연합체를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분위기는 중간 지대를 공동화하고 사람들을 좌우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좌파의 혁명적 폭동과 군대와 치안대의 잔인한 진압은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민주주의가 숨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양쪽 모두 종말론적 언어로 상대편을 공격했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정치적 겨로가가 아니라 폭력적 결과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우리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세라 우파도 비슷한 태도로 맞섰다. 우파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면 폭력 혁명과,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미 약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81~82쪽.)
각 주 선거위원회에서 2월 20일 마침내 선거 결과를 발표했는데, 인민전선이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휴를 부추긴 선거법이 1933년의 선거에서는 우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좌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민전선은 총 투표의 2퍼센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으므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선거에서 가장 충격적인 현상은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당이 스페인 전역의 총 1천만 명에 육박하는 투표자 가운데 겨우 4만 6천 표, 그러니까 한 주(州) 평균 1천 표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결과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장한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통치 위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투표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일군의 왕당파들이 힐 로블레스에게 쿠데타를 주도하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힐 로블레스는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 혁명적인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오기 전에 전시 상태를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힐 로블레스는 패배에 분개하여 자신을 지지하고 선거 운동에 돈을 댔던 부자들에게 위선적인 공격을 퍼부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는 등 '자실골이나 다름없는 이기주의'를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총참모부 부장 프랑코 장군은 치안대 사령관 포사스(Pozas) 장군에게 밀사를 보내 '스페인의 질서와 복지 수호를 위해 단행하려는 결정'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했다. 프랑코는 또한 포르텔라 비야다레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인민전선에 권력을 넘겨주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군대의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치안대와 돌격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87~88쪽.)
장군들은 스페인령 모로코와 스페인 전역에 주둔한 수비대들의 봉기를 신호탄으로 삼아 쿠데타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거사의 성공 여부는 병력의 규모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이 주는 심리적 효과에 달려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이 쿠데타를 완전히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화 정부 역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48시간 이내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48시간 동안에 모든 지역의 점유(공화 정부 점령 지역과 반란군 점령 지역)가 결정되었다.
공화 정부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에서 치명적이었는데, 이는 초기의 불확실성이 방어적 사고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총리인 키로가는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의 무장을 두려워했다. 그는 국가가 자신의 '척추'(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법치(法治)로부터 일탈하기를 거부했다. (의용군에게) 제때에 무기를 내주지 않음으로써 반란군을 선제 공격하거나 신속하게 역공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공화 정부 당국자들으느 군대보다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기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반란을 24시간 내에 진압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결코 믿지 않았다."라고 세비야의 한 목수는 회고했다.
공화 진영 사람들 불가피한 상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 그들은 한 슬로건이 말해주듯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조장했다. 심지어 반란이 진행 중인데도 공산당 소속 의원 '라 파시오나리아'(돌로레스 이바루리)는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이 생각을 '노 파사란!'(No Pasarán, '저들은 결코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리라!')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문구는 베르딩에서 페탱이 했던 유명한 말을 표절한 것이었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완전한 기습 공격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 측의 의심과 혼란은 확실히 반란 주모자들에게 유리했다. 만일 지역 수비대가 자극받아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한 정부 당국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더라면 쿠데타 세력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후에 망설임의 대가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 노동자들은 후에 망설임의 대가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병영을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더라면 대부분의 준군사 단체들도 노동자들에게 합류했을 것이고, 반란에 가담한 수비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115~116쪽.)
8월 초에 이르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서쪽 갈리시아와 레온에서부터 동쪽 나바라와 북부 아라곤까지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땅을 차지했다. 이 띠 모양의 지역이 반란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아스루리아스, 산탄데르, 바스크 등의 북부 해안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남쪽과 서쪽에서는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 안달루시아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이때는 돌격과 본능이 무기와 군사학보다 더 중요했다)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 진영이 내세울 만한 군사적 장점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4만 명의 아프리카 주둔 군대였다. 국민 진영은 또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장비도 빈약한 본토 대도시 주둔 병력에서 5만 명 정도를 자기편으로 확보했다. 여기에 17명의 장군과 1만 명 정도의 장교들이 반란 세력에 합세했다. 그들은 또한 케이포의 카라비네로(국경수비대) 중 3분의 2, 돌격대의 40퍼센트, 치안대의 60퍼센트가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세 개의 준군사 단체 병력 가운데 약 3만 명이 반란에 동조했음을 의미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13만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반란군에 합류해 있었다. 이에 반해 히랄이 군대 해산령을 발표할 무렵 공화 정부는 준군사 조직 병력 약 3만 3천 명과 5만 명의 병사, 22명의 장군과 7천 명의 장교를 두고 있었으며, 이는 이론적으로 모두 9만 명의 병력에 해당했다.
전쟁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을 고려할 때 공화 정부의 상황이 유리해 보였다. 공화 정부는 산업 시설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보유한 대도시 광산 지대, 함선과 상선 대부분, 본토 총 면적의 3분의 2, 국가 보유 금, 국가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감귤류 생산지 발렌시아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불리한 상황을 외국으로부터 끌어낸 지원과 주요 농업 지대 장악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국민 진영의 주요 병력 공급원은 한동안 모로코의 리프족 원주민들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국민 진영에 육해공군과 전략·기술적 지원을, 미국과 영국의 사업가들은 전쟁에 필수적인 신용 대부와 석유를 제공할 터였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 군대의 자칭 '예방 차원의 반혁명' 시도는 공화국에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마저 다 파괴해버렸다.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중이 이루어낸 것을 승인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파의 반란은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혁명을 좌파의 열정적인 두 팔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156~157쪽.)
국민 진영 지배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을 점령하는 것과 동시에 탄압이 시작되었다. 전선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대개 현장에서 살해되었으며, 노동조합 지도자와 공화 정부 관리인 주지사와 시장, 전부터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쳐 온 관리들이 가장 먼저 살해당했다. 심지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항복한 공화주의자들도 죽였다.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친 장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구속되었다. 군대의 관행은 공화 정부에 충성하거나 중립을 지킨 정규군 장교들은 가능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못하고 망설인 사람들은 구속되었고, 정부에 끝까지 봉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장군들과 해군 제독들까지 '반란' 혐의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말뜻의 놀라운 전도(顚倒)는 해군에서도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국민 진영은 정부 명령을 따르는 수병들을 '반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군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나면 전보다 더 지독한 두 번째 학살의 물결이 밀어닥쳤는데, 지역에 따라 팔랑헤당원이나 카를로스파 사람들이 민간인에게 가차 없는 '정화'를 집행했던 것이다. 그들의 정화 대상에는 노동조합 간부, 정부 관리, 좌익 정치가(인민전선 소속 의회 의원이 40명 피살되었다), 지식인, 교사, 의사, 심지어 혁명위원회에서 일한 타자수까지 포함되었다. 인민전선에 투표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우에스카에서는 프리메이슨 지부 회원이 10명이 채 안 되었는데도 프리메이슨 혐의로 총살당한 사람이 100명도 넘었다. (172쪽.)
의용군 중심 체제의 가장 중대한 결점은 규율 부족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대원(支隊員)들이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에서 주말을 보내려고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전선을 무단 이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 전에는 누구보다도 외적인 속박과 통제의 대상이 되곤 했던 공장 노동자들의 규율 이완 현상이 가장 심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농민이나 수공업자처럼 독립적 삶을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제심을 유지했다. 그동안 의용군 내에서 선거로 지휘관을 뽑고 정치적 입장에 따른 편 가르기를 했다는 사실이 자주 부각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난제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힘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외부인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부대원들 내부에서 상호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진짜 문제는 혼란스러웠던 처음 몇 주 동안에 발생했는데, 이때 의용군은 혁명적 분위기에 젖어 조금이라도 권위주의적으로 보이는 모든 태도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던 것이다. (...) (233쪽.)
국제여단의 훈련도 그와 비슷한 양상을 따랐는데, 그들은 전선에 배치되기까지 많지 않은 시간 대부분을 교련, 규율 교육, 정치 사상 교육을 받으면서 보냈다. 당에서 발간한 소책자는 병사들이 왜 싸우는지에 대해 교육만 잘 받으면 잘 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이념 교육은 정치 지향적 인민위원들이 맡았고, 제5연대는 일종의 시범 조교라고 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민위원들은 정규군 지휘관들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감독하기 위해 와 있었지만, 사실은 공화 정부 군대를 접수하려는 공산당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파견된 비밀요원들이었다. 만일 전통적 방식의 전쟁이 시작되면 공화 정부 군대는 조직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속의 군종 신부들'은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정부 간에 벌어진 대규모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된다. (237~238쪽.)
히틀러가 프랑코를 지원한 진짜 이유는 전략과 관계되어 있었다. 스페인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 프랑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고, 또한 수에즈 운하로 가는 영국의 해상 루트에도 중대한 위협이 될 터였다. 또한 대서양 해안에 U보트 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다는 즐거운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항구 도시 비고, 엘페롤, 카디스, 라스팔마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의 대 중유럽 전략이 유럽 각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반면에 독일의 인적 자원을 훈련하고 장비와 전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반란이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나지 않아 국민군은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게 된 반면, 공화 정부군은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불균형은 국민 진영이 재정 지원을 제공받으면서 더 증대되었는데, 재정 지원은 장기전에서 군사 지원 못지않게 중요했다. 전쟁 초기에 공화 정부는 635톤에 이르는 국유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화 7억 1500만 달러에 해당했다. 이에 비해 국민 진영이 대부를 받고 대신 제공할 수 있는 담보물은 오직 승리의 가능성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8일 '적의 재정 능력이 별 볼일 없기 때문에 공화 정부가 보유한 금이 공화 정부에게 무한한 저항 능력을 제공할 것'이라던 프리에토의 주장은 결국 오판으로 판명되었다.
국민 진영은 즉각 국내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외국 재정 기구에도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반란 세력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은 담배 밀수로 큰 돈을 번 사업가 후안 마르치의 막대한 재원이었다. 그는 밖으로 드러난 것만 해도 1500만 파운드를 국민 진영에 기부했다. (...)
미국과 영국 사업가들도 석유 부호 헨리 디터딩(Henry Deterding)처럼 기부 같은 적극적 지원은 물론, 공화 정부의 정상적 교역 활동을 교란하고 은행에서 신용 대부를 방해한다든지 하여 국민 진영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1945년에 스페인 외무부 차관 호세 마리아 도우시나게(José María Doussinague)는 "만약 미국의 석유와 미국의 트럭, 미국의 신용 대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들과 국제 기업가 집단으로부터 외면받은 공화 정부는 오로지 멕시코와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이 1927년에 승리했는데, 이것은 해외에서 혁명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고, 스탈린은 1933년 미국에서 체제 전복 활동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7월 25일 총리 히랄은 파리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스탈린 정부에 현대식 무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될 수 있으면 많은 양의' 탄약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국제 상황과 그에 따른 결과를 우려했다. (...)
(...) 히랄의 무기 지원 요청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 스페인 내전 초기 2주 동안 이 문제를 두고 소련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그것은 외국 공산주의 진영에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작품인 붉은군대를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소비에트가 그처럼 허약한 시기에 외국에서 히틀러를 자극할 수도 있는 모험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이러한 침묵에 대해 스탈린이 스페인의 혁명을 배신하고 파시스트를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스탈린이 행동에 나선 것이 트로츠키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스탈린은 만약 소련이 스페인 공화 정부를 돕지 않는다면 소련 공산주의는 지금까지 쌓은 모든 신뢰를 잃을 것이고 아마도 유럽 각국 공산당의 충성심도 잃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스페인 정부에 도움을 제공하되 꼭 필요한 정도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탈린이 잠재적 동맹 세력으로 생각했던 영국 정부를 놀라게 하지도, 독일을 자극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55~258쪽.)
공화군 부대, 특히 국제여단은 자주 참호 속에서 공성 때문에 마드리드로 모여든 외국인들의 방문을 받았다. 방문객은 기자들,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여행가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공화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방문객 가운데 더라는 한 국제여단 병사가 쓴 것처럼 '전쟁과 비슷한 스릴'을 즐기려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선을 방문해서 병사들로부터 소총이나 심지어는 기관총을 빌려서 적군이 있는 쪽을 향해 몇 발씩 쏴보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런 방문객의 좋은 예였다. 전선의 병사들은 이런 새로운 얼굴들, 특히 유명한 사람들의 방문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스릴을 원하는 방문객이 적들을 자극하여 폭격을 받기라도 하면 방문객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334쪽.)
의용군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이론은 하나같이 병사들의 사기를 꼽았다. 그런데 사기는 군대에 필요한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게다가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사기가 실용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는 규율을 자기 규제로 대체할 생각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신념을 비효율성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로 변질시키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시프리아노 메라처럼 비록 자신의 이상과는 충돌하지만 현재 적에게 맞서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는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1936년 가을과 겨울 동안에 이런 생각을 돌아섰다. 물론 그들도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급속히 커지는 데에는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군과 벌이는 전쟁이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대화' 과정을 방해하는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통일된 지휘권' 원칙이었다. 아나키스트들과 통합노동자당은 비록 전통적 전쟁에서 '통일된 지휘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 군 기강의 강요였다. 통합노동자당이 러시아 혁명 때 구성되었던 것과 같은 병사평의회를 설치하자고 주장하자 공산주의자들은 경악했다. 한편 아나키스트들은 이 문제를 두고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갈렸다. 메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은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대포 소리, 기관총 소리, 포탄 떨어질 때 나는 휘파람 소리'가 사방에서 난무하는 전시 상황에서는 개별적 의지만으로 보호 본능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아나키스트들의 신념은 대개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지휘관 직책을 수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데, 그 결과 그들의 힘이 약해졌다. (...) 아나키스트들과 군 수뇌부의 갈등은 일련의 타협으로 해결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상관에 대한 경례와 경어 사용, 외부에서 들어온 장교들은 거부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그에 준하는 계급을 주었다. (...) 임금 차별 문제는 장교들이 자신들이 일반 의용군보다 더 받는 만큼을 전국노동연합 전쟁 기금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368~369쪽.)
프랑스 국경을 넘어 다시 국민 진영 스페인으로 돌아온 15만 명의 공화 진영 사람들은 비록 참호 속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사회가 아직도 전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1940년 4월 26일에 제정된 것과 같은 탄압법들은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발생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색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사항에 보복을 요구했다. 조사는 대인(對人) 범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국가 재산 등에 대한 '도덕적' 범죄까지 망라했다.
'책임의 귀속'은 '인민전선 내 여러 당, 노조, 프리메이슨 단체 간부들의 물리적 파괴'와 '공화 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한 정치 세력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페인의 여러 주 가운데 약 반 정도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공식적 처형만 적어도 3만 5천 명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전쟁 후 널리 인정된 5만 명이라는 숫자가 실제보다 상당히 낮게 추정된 것임을 말해준다. 만약 여기에 비공식적이고 무작위적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 수는 아마도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
국민 진영 스페인은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문만 잠그지 않았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다양한 비밀경찰 부서들이 생겨났다. 프랑코는 프리메이슨을 편집증적으로 혐오하여 1940년 '반(反)프리메이슨특별정보부(Servicio de Información Especial Antimasónico)'를 설립했다. 프랑코는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스페인 제국 상실, 왕정 붕괴, 제2공화정 기간 동안의 수많은 '국가 범죄'에 직접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고 주장했다. 1941년 3월 29일 '국가안보'법이 도입되었는데, 불법 선전, 파업 행위 등 범죄적 결사 행위, 체제에 불리한 소문 유포 등을 '군사 반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뿌리 뽑는 것이 목표였다. 1947년 4월에 게릴라 저항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제정한 '산적과 테러 근절을 위한 법'은 개인의 자유를 한층 더 억압했다. (696~700쪽.)
1936년 9월 블라디미르 고레프 장군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모스크바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백색분자들'과 벌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아나키스트들과도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할 텐데, 이 싸움은 매우 잔혹한 것이 될 것입니다." 코민테른 대표 앙드레 마르티는 10월 10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우리는 심지어 그들(아나키스트들)도 해치워야 할 것입니다. 그 무렵이면 우리가 강력한 군대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프라우다〉는 12월 10일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숙청은 소련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정도의 열정으로 수행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로 발송된 많은 보고서들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듯이, 인민전선 전술은 '일시적인' 전술이었을 뿐이다. 스페인 내 코민테른 대표들은 명백히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을 추구하고 있었다. (...)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성격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장기적으로 권력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요인만이 스페인에서 이 경향을 완화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요인은 바로 국제 무대 다른 곳에서 좌우될 수 있는 소련의 이익이었다. 스탈린은 만일 '사회주의 모국'의 이익에 합치한다면 다른 나라 공산당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이미 보여준 바 있었다. 스페인의 경우 소련의 정책을 결정지은 것은 주로 중부 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차지하고자 했을 때 영국이 보여준 유화 정책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새로운 경로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비록 결국에는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739~740쪽.)
교정. 초판 6쇄
86쪽 5줄 : 위심스러워했고 -> 의심스러워했고
351쪽 각주1줄 : 빌터 -> 발터
620쪽 12줄 : 루이스 M. 데 로헨디오(Luis M. de Mojendio) -> 루이스 M. 데 로헨디오(Luis M. de Lojendio)
626쪽 밑에서12줄 : 베르셀로나 ->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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