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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미야지마 히로시, 창비, 20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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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미야지마 히로시, 창비, 2013.)

Dog君 2014. 8. 30. 20:45



1. 진보든 보수든 알고 보면 마 똑같더라...하는 식의 이야기가 이제는 좀 식상할 때도 되긴 했다. 이런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지도 한 20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정작 나오는 이야기는 20년째 답보 상태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전에 어디 워크샵에서, 그런 얘기 해서 제일 좋아한게 결국 조선일보 아니었냐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좀 냉소적인 것 같아도 그거만큼 제대로 짚은 이야기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비판을 영리하게 내화시킨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이 씨발 왜 내 등에 칼 꽂아"하면서 감정적인 반론 펴기에 바빴으니까.


2. 엉뚱하게 이야기가 샜는데,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주 대단히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히는 어렵다는 것. 이 책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전반부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봉건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과거부터 오늘까지의 집착인데, 이게 흔히 역사인식의 서구중심주의라든지 선형적 역사발전모델이라든지 뭐 이런 얘기 정도에서 멈추는 것에 반해 여기서는 이걸 '탈아론'과 연결을 시킨다. 근데 여기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꽤 재미가 있다.


4. 그러니까 일본사에서 '봉건제'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 단지 서구와 닮아지고 싶은 욕망이라든지 그들 머리 속에 깊이 자리잡은 서구중심주의적 시각 뭐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아시아 지배를 위한 이론적 토대의 구축이라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책이 기존의 연구에 비해서 한발짝 더 나간 지점을 굳이 찾자면, 그게 바로 여기가 아니겠나 싶다. (일본 근대역사학이 '탈아입구'하려고 그리 용썼던 이야기들은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에 훨씬 더 자세하게 잘 나와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한 언설로는 '일선동조론'과 '정체론' 두가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양자 모두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언설로 동렬에 놓였으나, 엄밀하게 생각하면 양자 사이에도 모순되는 면이 있다. 즉, 전자는 이 글에서 말하는 문명론적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일본 '봉건제'론을 배출한 탈아적인 일본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한국의 '보호국화'에서 '병합'에 이르는 과정을 지배한 이념은 기본적으로 후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했는데, 그것은 '일선동조론'만으로는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p. 63~64.)


5-1. 그리고 이러한 식의 '봉건제', 혹은 고대-중세-근대 시기구분은 여전히 한국과 일본에서 공히 역사인식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은 일본'봉건제'론이 성립 당시부터 지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즉, 일본 근대화의 역사적 전제로 유럽과 일본의 동질성을 '발견'하기 위한 담론이었다는 것)이 이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쇄국시대는 대외전쟁과 화교 세력의 확대를 회피하고, 자력으로 경제발전과 문화적 성숙을 실현한 시대이기도 했다. 메이지시기의 공업화의 기초는 근세(에도시대)에 형성되었다"는 이 책의 기술은 일본'봉건제'론과 근대화론의 연관성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p. 127.)


5-2. 아, 여기서 사족을 하나 꼭 붙여야할게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한국 역사학의 봉건제론이 식민주의 역사학과 벌여야 했던 지난한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측면을 간과하면 곤란하다는 사실. "대전제 : 일본 역사학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소전제 : 한국 역사학은 일본 역사학과 동일하게 봉건제론을 주장한다", "결론 : 한국 역사학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마, 이런 얘기로 이야기가 튀어가면 그거는 쫌 마이 곤란타이.


6. 여기까지 이야기를 쌓아오면, '제대로 반성되지 않는 일본의 전쟁책임'의 문제가 결국 그런 '탈아론'적 역사인식에도 한쪽 다리를 기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시작과 끝만 봤을 때는 ㅅㅂ 이게 뭔 소리야 싶었는데, 중간 과정을 차곡차곡 밟아가니 아주 말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네.

  전후 평화이념의 또다른 문제는 앞서 말한 것과도 깊게 관련되겠지만, 2차대전을 연합국, 특히 미국과 영국에 대한 일본의 '패전'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라는 측면, 일본의 침략자로서의 측면에 대한 반성이 결정적으로 미약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본 스스로 서구열강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들이 아시아를 '문명화'할 주체라고 인식하는 데서 기인한 것인데, 그러한 인식을 지탱하는 것이 일본사에 대한 '탈아'적인 역사인식이다. 따라서 일본의 '근세화'를 동아시아세계 속에서 검토하는 작업은 현재도 뿌리깊이 존재하는 '탈아'적 '근세사' 이해를 비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현재 일본정부가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탈아'의 문제는 낡았지만 여전한 쟁점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p. 178.)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이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구조적인 파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일본론에는 항상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 지적 자체는 옳은 일이지만 '늑대와 소년'의 우화처럼 늘 되풀이되면 불감증에 걸리게 마련이다. 내 생각으로 이제 일본의 우경화는 위험한 수준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문제는 일본이 왜 그렇게 위험한 길을 다시 밟으려고 하는가이다. 그 최대 원인은 일본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의 일본 비판이 일본의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p. 312.)


7. 마지막으로, 소농사회론 관련된 내용을 메모 삼아 옮겨둔다.


  중국 '근세화'를 소농사회론의 입장에서 파악할 때 그 핵심은 다음 네가지이다. 첫째, 경제에서 집약적 벼농사 농법 확립, 둘째, 정치에서 과거제도 확립과 과거관료에 의한 집권적 국가지배의 확립, 셋째, 사상에서 유교혁신운동과 그 결과 등장하는 주자학의 형성 및 주자학의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상 확립, 넷째, 사회에서 종법(宗法)질서 확립이다. 중국에서는 이 네가지가 서로 관련되면서도 독립된 움직임으로 송대부터 시작되어 명대에 들어서면서 완성된다는 것이 소농사회론의 입장이다. 먼저 사상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주지하듯이 주자학은 송대에 일어난 유학혁신운동으로서의 송학(宋學)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송학이란 송대에 전면적으로 확립된 과거제도와 함께 등장한 사대부층의 세계관임과 동시에 그들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엘리뜨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이러한 과제에 가장 뛰어난 해답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양명학(陽明學)도 사대부의 사상이라는 면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송학 및 주자학이 사대부층의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이해하려면 사대부라는 독특한 지배엘리뜨의 존재양식과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출신계층 혹은 신분을 불문하고 개인의 능력을 근거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다음 황제의 보좌로서 관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존재, 그리고 관료로서 능력의 기준은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시험받는 도덕능력에 있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 이렇게 해야만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열' 수 있다는 평범치 않은 자각 등, 사대부는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꽤 특수한 지배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특수한 계층이 어떻게 송대에 형성되었고, 어떻게 그 체제가 중국대륙에서 천년이란 장기간에 걸쳐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근거를 주자학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체제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소농사회 형성에서 구하려는 것이 소농사히론의 입장이다.

  소농사회론의 내용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단순하다. 중국뿐 아니라 동사이아 전통사회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고 생각되는 두가지 특징, 특 토지지배가 국가에 집중되고 농민 소경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것에 우선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단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최대 특징이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 동아시아사회까지도 강하게 규정했다고 보는 것이 소농사회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두 특징 가운데, 더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농민 소경영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먼 옛날부터 건조지대에서는 밭농사, 그리고 습윤지대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왔다. 주지하듯이 중국의 황하문명은 건조지대의 관개 밭농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이러한 밭농사와 벼농사의 비중이 바뀐 것은, 중국대륙에서는 송대 이후이고 한반도·일본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규모에서는 16세기 이후이다.

  동아시아 농업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변화한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산간의 작은 평야지역에서만 가능하던 이식식(移植式) 집약적 벼농사가 대하천의 하류 평야지역에서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에서 이러한 변화는 송대에 시작되어 명대 16세기에 이르러 장강(長江) 델타지역의 치수가 안정됨에 따라서 확립되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16~18세기에 기본적으로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집약적 벼농사의 획기적 확대가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도의 토지생산성과 높은 인구밀도를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몽골제국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어 16세기에 비약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 형성의 움직임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부유함을 동경하면서 기동한 것이었는데, 중국의 부의 원천은 집약적 벼농사의 성립이었던 것이다.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단지 농업에서의 큰 변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체제와 국가체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인구의 현저한 증가는 가족과 친족제도의 변화와 깊이 결합되었으며 촌락과 도시의 성격, 상업·화폐경제의 전개 등과도 관련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체의 변화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관료제를 토대로 한 집권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고 이를 지지하는 주자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되었으며 양자를 결합하는 과거제가 확립되는 등 일련의 사태였으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국가체제의 변화가 토지지배의 국가적 집중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송대의 과거제 확립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엘리뜨인 사대부계층의 발흥을 재촉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송학은 이러한 사대부층의 사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송대 국가의 운영원리는, 신법당(新法黨)과 구법당(舊法黨)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집권의 강도에 대해 아직은 유동적인 상황이었고 주자학이 국가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송대는 새로운 국가 지배원리의 모색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송·원시대를 거쳐서 명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자학이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정착하게 된다. 중국에서 이처럼 새로운 국가체제와 그 운영원리의 확립에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그 선구성 때문이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정치조직이 중국의 예를 배우면서 국가체제를 구상할 수 있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면 중국에서 긴 모색기를 거치는 가운데, 왜 주자학이 국가운영의 기본적 이념으로 정착한 것일까? 그것은 주자학이야말로 소농사회에 가장 적합한 국가체제를 지지할 수 있는 이념과 구체적인 정책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농업경영 면에서 보면 가족경영의 발전을 촉진했다. 즉 새롭게 획득한 농업생산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용노동력이나 예속적 노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가족노동력만을 이용한 경영이 가장 적격이었다. 다른 한편 화북(華北)의 농업은 본래 그 기후조건 때문에 축력(畜力)의 이용이 불가피했고 가족경영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축(役畜)을 소유한 대경영과 이를 보조할 노동력을 제공하는 영세경영 내지 예속적 노동력의 이중구조가 존재했는데,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함으로써 가족경영의 보편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송학, 특히 주자학은 이렇게 대두한 농민층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을지를 강하게 의식한 사상이었다. 주지하듯이 주자학은 생래적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배움의 차이에 의해 사회질서를 형성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귀족체제를 부정하면서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즉 실력에 의거해 지배엘리뜨가 된 사대부층에 걸맞은 사상임과 동시에, 경영주체로 성장해온 '백성'의 존재를 인정해 그들을 통치하는 것을 자각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성립한 사상인 것이다.

  게다가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가족경영의 발전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농업으로부터의 분리를 촉구했다. 중국 강남의 개발에 즈음해서는 사대부층의 역할이 컸는데, 일단 개발이 완료되면 그들은 농업생산에서 물러났다. 왜냐하면 집약적 벼농사에서는 가족경영이야말로 가장 높은 생산력을 실현하므로 사대부들은 스스로 농업에 종사하는 것보다는 지주로서 지대(地代)를 얻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이 농업생산에서 유리된 사대부층은 동시에 농촌지배를 위한 독자적인 기반도 상실하게 되었다. 사대부들은 지배엘리뜨이기는 하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특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토지지배는 완전히 국가에 집중, 독점되는 현상이 생겼다.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중국의 토지장부는 이러한 토지지배의 국가집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거기에는 업주(業主, 토지소유자)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파악되어 있는바, 사대부도 일반 농민층과 마찬가지로 업주로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유교는 원래 군현제(관료제)에 의한 국가체제보다는 봉건제에 의한 국가체제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주자학은 관료제에 의한 국가체제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거한 국가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의 토착적 정치세력의 등장을 얼마나 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는데, 앞에서 서술한 지배엘리뜨의 존재양식은 관료제적 국가체제에 대단히 적합한 것이었다 하겠다. 일찍이 중국대륙의 역대 왕조에서는 볼 수 없던 명대·청대의 안정성은 이렇게 해서 담보되었다고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pp. 18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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