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허버트 허시, 2009, 책세상.) 한번더 본문
1-1. 학문의 사회적 효용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한다. 넓고 얕은 지식만 있어도 지적 대화가 가능하다고 설파하는 책이 수십만권씩 팔리는 이 시대에,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란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인문학이라는게, 사람들 바깥에 서서는, 마치 나는 그 속에 속하지 않은 양 거기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분석을 덧붙이는 일인데, 어느 순간에는 그게 참 그렇게 거만해 보일 수가 없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스스로를 사람들과 분리시켜놓고 그게 뭔가 대단한 권위인양 맞다 틀리다 남말하듯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써내는 글자들이 내가 속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드는데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 건지 회의가 드는 경우가 참 많다.
1-2. 제노사이드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고발하고 그것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참 쉽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대체 뭘 해야 되는지에 답하는 것은 참 어렵다. 지금껏 학살에 대해 그 많은 이야기들과 연구들이 있었지만, 엄정한 진상규명이니 뭐니 하는 수준의 원론 이상의 것을 말했던 연구가 과연 열마나 있었는지 솔직히 궁금타. '제노사이드'라는 주제를 놓고 세상에 던질 수 있는 주장이라는 게 그 정도 뿐인가.
2-1. 그런 맥락에서 프리모 레비가 눈에 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온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제노사이드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악몽 같은 수용소 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해준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었다. 그에 따르면, 하루 한 번 세수는 아나콩콩 온몸에 변을 바르고 살 수밖에 없는데다가 일상적으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결국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마저 잃어버렸던 사람은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했던 반면(그것은 나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스스로에 대한 존중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에 대한 (사소하나마) 인간적인 도움과 교류를 나눴던 사람들은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프리모 레비에서 '인간적임'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최악의 비극을 이겨내는 가장 구체적인 힘이었다. 프리모 레비가 온 힘을 다해 수용소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 박찬승 선생님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도 비슷한 맥락에서 되씹어볼 가치가 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학살사건의 구체를 결정한 것이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외부적이고 커다란 요인이 아니라 그 마을(혹은 공동체) 내에 평소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었다고 말한다. 똑같이 전쟁과 학살에 휩쓸렸지만 어느 마을은 서로를 죽이다 못해 전쟁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반면 또 어떤 마을은 참사의 크기를 최소화하고 전쟁의 상처도 일찍 이겨낼 수 있었던 차이가 그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갈등 관리를 잘 해왔고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체계도 잘 갖춰져 있다면, 전쟁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지랄발광의 파도 속에서도 그나마 사람다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 말이 단지 한국전쟁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꽤 큰 시사점을 준다는 점 정도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알 수 있다.)
3. 허버트 허시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가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이야기도 결국 이것이다. '인간적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배제와 혐오가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평소부터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제노사이드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구체적인 힘이다. 우리가 혐오발언을 혐오해야 하고 '일베'니 뭐니 하는 것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그 때문 아닐까. 그리고 국가/권력의 갈등 조장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존감과 공감능력일테고.
4. 거창한 이야기들을 늘어놨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이것이 사람이냐고 한탄하기 싫으면 그냥 지금 당장 인간적으로 살면 된다는 것. 당장 옆에 있는 사람한테 잘 해주고, 동료들한테 화 좀 덜 내고, 먹고살고 돈 좀 남으면 기부도 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인터넷에 악플 안 달고, 가족들한테 많이 웃고, 나 스스로한테 잘 해주면 된다. 옆에서 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대단한 정의감 없어도 된다. 비극을 이기는 힘은 거기에 있다. 어려운 일 아니다.
인종주의적 혹은 성적 농담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비인간성을 무시하다보면 개인은 억압과 부정의를 무시하는 데 익숙해지고, 비인간성이 자기 앞에 벌어졌을 때 그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결론적으로, 억압과 부정의한 행위에 분개하는 감각을 잃게 된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 안에서 정의감과 동정심을 배우거나 다시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침입 국가의 세력과 정치적 삶의 슬픈 현실들로부터의 보호와 구원을 구하는 것은 일상의 작아 보이는 영역들 안에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존재는 우리를 부정적인 현실과의 대면에서 분리시키는 완충물이며, 우리가 애착과 정체감을 발전시키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랑과 애정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어떤 공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애착은, 우리가 부정의와 비인간성을 똑바로 대면하도록 배우는, 그래서 우리가 삶의 파괴와 보존 사이에서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보다 큰 맥락의 일부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권능empowerment의 한 형태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자신이 무력하지 않으며 선택권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삶의 보존을 선택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경우에는 지역·국가·세계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알베르 카뮈가 언급했듯이, 만일 우리 모두가 희생자가 되는 것도 처형자가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둘 중 어느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파괴 욕망을 한껏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pp.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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