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열린 책들, 200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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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열린 책들, 2005.)

Dog君 2016. 5. 8. 15:01



1. 영화랑 같이 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완독하지도 못했을 것이야. 읽는 내내 '아, 나랑 스파이소설은 안 맞는구나'하는 생각만 했다. ㅋㅋㅋ 역시 내 독서 취향이란 이렇게나 좁은 것이었어.


  짐 프리도와는 다르게, 조지 스마일리 씨는 빗속을 달려가는 일은 잘 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것도 한밤중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는 어린 빌 로치가 나중에 크면 그렇게 될 법한 예고편 인물이었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데다 중년의 신사인 그는 외관으로 보아 큰 상속 재산은있을 것 같지 않은, 영락 없는 런던 무지렁이였다. 다리는 짧아서 걸음걸이는 전혀 민첩하지 못했고 옷은 비록 값비싼 것이지만 몸에 잘 맞지 않았으며 게다가 비에 푹 젖어 있었다. 약간 홀아비 냄새를 풍기는 그의 외투는 습기를 잘 흡수하도록 디자인된 검은색 느슨한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소매는 너무 길거나 아니면 그의 팔이 너무 짧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로치가 비옷을 입을 때 그렇듯이 외투 소매가 그의 손가락을 다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멋을 부린다며 모자를 쓰지 않았다. 모자를 쓰면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맞는 생각이었다. 그를 가리켜 〈보온용 삶은 달걀 덮개 같은 사람〉이라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버리고 가출하기 얼마 전에 한 말이었는데, 그런 비판은 늘 그렇듯 한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이제 빗방울은 한 손으로 닦아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두꺼운 안경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때문에 스마일리는 빅토리아 역의 어두운 아케이드를 에두르는 보행 도로를 황급히 걸어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아니면 뒤로 젖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서쪽 첼시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발걸음은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 만약 짐 프리도가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와 당신에게 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는 아마도 이런 때는 친구보다 택시가 더 급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했을 것이다.

  (중략)

  그날은 시작부터 일진이 안 좋은 날이었다. 그는 지난밤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는 바람에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밤늦게 공부하는 것은 지난해 은퇴한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온 버릇이었다. 집 안에 커피가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식료품 가게에서 기게 줄서서 기다리다가 그만 인내심이 다해 개인 사무를 먼저 보기로 했다. 아침 우편물과 함께 도착한 은행 잔액 보고서는 그의 아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월별 수령의 연금을 상당 부분 인출해 갔음을 보여 주었다. 상관 없어, 값나가는 물건을 팔면 되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한 반응은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상당히 유복한 상황이었고 그의 연금 지급 업무를 대행하는, 무명의 시내 은행은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그의 연금을 지급할 터였기 때문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부터 귀중하게 여겨 온 그리멜스하우젠의 초판본을 싸들고 커즌 거리의 헤이우드힐 책방으로 향했다. 그 책방에서 그는 때때로 주인의 호의로 좋은 거래를 하곤 했다. 책방으로 가는 길에 그는 갑자기 짜증이 나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변호사에게 그날 오후 면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p. 34~36.)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우산꽂이에 들어 있는 낯선 우산에 시선이 멈추었다. 가족 손잡이에 이니셜 없는 황금 링이 달린 비단 우산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시간 계산이 흘러들었다. 우산꽂이에도 물방울이 없고 또 우산이 보송보송한 것을 보면 비가 내리기 시작한 6시 15분 이전에 거기 놓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아주 근사한 우산이었다. 우산 끝은 완전 새것은 아니었지만 긁힌 자국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 우산은 아주 민첩한 젊은이, 가령 앤의 새 애인 같은 남자의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우산 주인은 쐐기 나뭇조각에 대해서 알고 있고, 일단 집 안에 들어온 다음에는 그 쐐기를 도로 원위치 시킬 줄 알고 문을 여는 바람에 흩어진 우편물을 읽지 않고 문 밑에 가지런히 도로 놓을 줄도 아는 것을 보면 스마일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앤의 애인 나부랭이는 아니고 스마일리처럼 전문가였다. 한때 그와 긴밀하게 일했던 자로서, 업계의 전문 용어로 말한다면 필적을 읽을 줄 아는 자였다.

  거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그 문을 부드럽게 밀어서 더 열어 젖혔다.

  「피터?」 그가 말했다.

  그는 열린 문큼으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스웨이드 가죽 구두 한 켤레를 보았다. 게으르고 포개어진 그 구두는 소파 끝 부분에 비죽 나와 있었다.

  「옷은 그대로 입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조지, 올드 보이.」 다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갈 길이 좀 멀어서요.」

  5분 뒤 집에 남아 있는 것 중, 유일하게 젖지 않았고 또 앤이 선물한 갈색 양복을 입고서 그는 조지 길럼의 통풍 잘되는 시원한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었다. (후략) (p. 49.)


  (전략) 나는 그에게 부, 여자, 캐딜락, 값싼 버터 따위를 약속하지는 않았어. 그는 그런 것들을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어. 또 그날 아침에는 그의 아내 얘기도 더 이상 꺼내지 않았어. 당시는 그런 얘기로 설득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어. 나 자신도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면 명확한 입장 같은 게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서로 같은 처지가 아니냐는 논리에 호소했어. 〈이봐요.〉 내가 말했어. 〈우리는 이제 노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상대방 시스템의 약점을 찾으면서 평생을 보냈어요. 당신이 서방의 가치를 환히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나도 동방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비참한 전쟁의 기술적 측면을 신물이 날 정도로 경험했어요. 그런데 당신네 쪽에서 당신을 총살하려고 해요. 당신 측이나 우리 측이나 무어 그리 내세울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당신도 이제는 알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보세요.〉 내가 말했어. 〈우리의 이 일은 오로지 부정적 비전만 갖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신이나 나나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젋은 시절 거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지요.〉 ― 나는 또다시 그가 순간 꿈틀하는 것을 느꼈어. 그 전날 시베리아를 건드렸을 때와 같은 긴장된 반응이었어 ― 〈하지만 그런 거대한 비전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에게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 달라고 말했어. 그나 나나 비록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인생에 대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나의 결론에 대해 그게 아직 해방되지 못한 결론이라고 그는 말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작업을 해온 것이 아니었냔 말이야. 아무리 거대한 비전도 정치가의 손에 맡겨 놓으면 결국에는 저 옛날의 비참함을 재탕하는 것이 아니었냔 말이야. 따라서 당신의 귀중한 생명을 무의미한 총살형으로부터 건져 내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당신의 의무, 약속, 당신을 자기 파멸로 내몰고 있는 그 어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평생을 바쳐 일해 온 제도가 당신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냉정하게 당신을 총살하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제도가 정당한 것인지 의심해 볼 생각도 나지 않았는가? 나는 그에게 호소하고 애원했어. 우리는 이제 공항으로 나가는 길이었고 그는 나에게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어. 그가 지금껏 봉사해 온 제도가 이런 시점에서도 과연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어.」 (pp. 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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