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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4부 본문

잡史나부랭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4부

Dog君 2019. 1. 3. 14:06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정말 쓸데없는 팩트체크 시간.


  자,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의 출처로 신채호가 지목된 것은 대체 언제란 말입니까.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날짜는 물론이고 시간까지 찍을 수 있습니다.




  1편 제일 처음에 걸어둔 스크린샷이 정답입니다. 2013년 5월 11일 무한도전이죠. (아래는 5월 18일 방영분.) 적어도 제가 찾은 자료 중에서는, 이 방송 이전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와 신채호를 연결지은 글은 없습니다. (어떤 개인블로그에서 딱 하나 발견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한도전을 지목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무한도전이 신채호를 지목한 근거가 이 블로그 글이라면, 무한도전은 개인블로그의 내용을 긁어다가 검증도 안 하고 방송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 이후부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의 발언으로 확인되어 인터넷과 언론을 도배하게 되죠.


  어쩌면 이것은 (이른바) ‘인문학 대중화’의 어떤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고 재미있으면, 그래서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정작 중요한 사실관계는 소홀히 하는 것 말입니다. 내로라 하는 스타강사들이 동원되고 수많은 작가들이 달라붙었지만 정작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 무심함의 결과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와 신채호를 연결시키는 오해가 온 인터넷과 언론에 떡칠된 것입니다.


  물론 무한도전이 저지른 실수는 작은 실수나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이 무한도전의 내용에 대해 의심을 가졌더라면, 그래서 그 내용이 실수였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면, 틀린 내용이 상식으로 자리잡아버린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저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지게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의 출처가 신채호라는 실수가, 어째서 그렇게 삽시간에 퍼졌고, 그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도 그렇게 없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민족주의와 역사 사이에 작용하는, 강력한 친연성과 관련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의 분석은 저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013년을 전후한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봅시다.


  2012년 8월, 임기 말의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임기 내내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일본 정부에 대해 이렇다 할 강력한 외교적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죠. (심지어 임기 초에는 그 유명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201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 역시 임기 초기에는 대일강경메시지를 쏟아냈습니다. 물론 거기에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 역시 빼먹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메시지가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는 2015년 '위안부 합의'를 통해 충분히 증명됐죠?)



  정리하자면, 2013년을 전후한 시기는 '반일反日'을 기치로 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팽배하던 시기였습니다. 강력한 식민지 경험을 원체험으로 가진 한국인에게 '일본'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반일' 인식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식입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아베 정권이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여주던 때였으니 그런 인식은 더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일'은 종종 국내정치를 위해 오남용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전형적인 사례가 위의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의 경우,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게 되면 불필요하게 일본을 자극할 수 있고 또 독도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식화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의 그 점퍼 차림으로 독도를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임기 말의 대통령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을 일본이라는 더 큰 적에게 돌리려고 했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메시지 앞에서 대통령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박근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는 이른바 '위안부 합의'에서 보여주었듯이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과거를 청산할 의지도, 그 문제를 보듬어 안을 감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임기 초기에는 대일 강경 메시지를 쏟아내면서 자신을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켰고 대선 과정에서 확인된 안티정서도 어느 정도 잠재우려고 애썼습니다. 우경화하는 아베 앞에서 대통령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것이 2013년을 즈음하여, 우리(그리고 우리 사회)가 역사와 일본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해버리는 상황 말이죠.


  물론, 저는 무한도전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역사인식을 추종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무한도전이 정치권에 대해 갖고 있었던 건강한 비판정신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말고도 스포츠맨십, 생태주의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무한도전만큼 건강한 예능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한도전 역시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만큼은 민족주의의 덫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한도전은 몇몇 특집에서 역사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대체로 독립운동에 몸바친 운동가를 기린다거나 국가를 구한 영웅의 행적을 살핀다거나 혹은 으리으리한 왕궁이나 문화재들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쳤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끌어내는 통찰이라는 것들은 우리가 역사수업시간에 익히 들었던, 국가주의적, 영웅주의적, 국왕/귀족중심주의적 교훈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죠.


  '민족'과 '국가' 따위의 가치만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은 정말로 매력적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신채호의 이미지 역시 『조선상고사』니 뭐니 해서 민족주의의 화신처럼 되어 있었으니, (여기서 또 유사역사학에게 욕을 안 할 수가 없군요...) 그 문장과 신채호를 연결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매끄러운 과정이었겠죠. 그리고 그런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우리들 역시, 역사를 단지 '민족'과 '국가'가 중심에 놓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해버린 나머지, 그 문장의 주인이 신채호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수긍해버렸구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만, 그랬다간 애초의 질문에서 너무 벗어나는 셈이니까 일단은 이 정도에서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은 신채호가 한 말도, 처칠이 한 말도 아닙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속담에 불과하죠. 하지만 그 평범한 속담을 굳이 신채호의 것으로 만들고 만 것은, 역사를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만 생각해 온 우리의 편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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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1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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