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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민음사,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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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민음사, 2019.)

Dog君 2021. 5. 19. 21:52

 

  결과적으로 나는 그 행사를 통해 아무도 찾지 못했지만, 대신 그때 만난 두 명의 입양인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한 명은 나와 같은 방을 쓰던 덴마크 국적의 수지였다. 언제나처럼 밤 산책을 마치고 새벽에 숙소로 돌아오자, 수지의 침대는 비어 있는데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수지가 수도를 틀어 놓은 채 잠시 외출한 거라 여기고 무심코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놀랍게도 이미 반쯤 물이 찬 욕조에 외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수지가 보였다. 수지는 갓 스무 살로 열다섯 명의 입양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발랄했으며, 한국에 있는 가족도 쉽게 찾아서 그때까지 거의 매일 생모와 언니들을 만나러 외출을 나가곤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제야 수지가 날 올려다봤다. 물이 찬지 입술이 파랬다. 나는 일단 욕조의 수도를 잠그고는 수지에게 수건과 목욕 가운을 챙겨 주었다. 잠시 뒤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부축하여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자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그녀가 말했다. 가족을 만나는 게 즐겁지 않다고, 다만 기쁜 척 가장하는 것뿐이라고, 모든 것이 가짜 같다고......
  “함께 밥을 먹거나 쇼핑을 하다가도 어느새 내 영혼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다시 만난 가족’이라는 콘셉트로 연기를 하고 있는 그들과 그들 속에 있는 나를 냉담하게 지켜보는 거예요. 늘 그런 식이죠. 내가 그리던 가족이 아니에요. 실은 그들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들에게는 집과 자동차가 있었어요. 언니들은 둘 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엄마는 늙은 개까지 키우고 있더군요. 뻔뻔해. 낳아 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는데 낳아 놓고는 내 동의나 허락도 없이 먼 나라로 보내 버렸죠. 그랬으면서 개를 키우고 있다니...... 그들은 모를 거예요,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들을 칼로 찌르고 그 시신을 짓밟고 유기하는 상상을 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날 수지는 잠들 때까지 흐느꼈다. 나는 그 곁을 지키고 앉아 가끔씩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수지는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이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나쁜 꿈을 꾸는지 인상을 쓰며 쌔근거리는 수지를, 나는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또 한 명의 입양인은 미국 국적의 스티브였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입양된 스티브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았고 한국말은 간단한 인사의 표현 외에는 전혀 할 줄 몰랐다. (...) 스티브가 말했다.
  “난 일곱 살 때 미국의 미네소타주(주) 시골로 입양됐어요. 스무 시간에 걸친 여정 끝에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이미 세 명의 의붓 형제가 있더군요. 다 입양된 남자 아이들이었는데 고향과 인종은 제각각이었어요. 알고 보니 양부모가 옥수수 농사에 이용하고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 그렇게 무턱대고 아이들을 사들인 거였어요. 그야말로 퍼킹 쉿(fucking shit)이었죠. 열여덟 살이 되자 마자 도시로 도망쳤어요. 빌딩 청소부터 선착장 하역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엄마-그는 그 단어만큼은 한국말로 ‘엄마(umma)’라고 했다.-가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신분증 번호와 주소 같은 걸 모르니까 찾지는 못했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도 했고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 나이가 됐어요. 거의 포기한 채 살고 있었는데, 작년에 내 아이가 태어났거든요. 아이를 보니 엄마를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다시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되었고요. 이번에 한국에 와서 가까스로 엄마의 행방을 찾긴 했어요. 그런데, 오 세상에, 그녀는 남쪽 도시에 있는 노숙자 시설에 방치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더 끔찍한 건 오랫동안 정신병을 앓아서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40년 만에 드디어 엄마를 찾았는데 보러 가지 않았어요. 내가 찾던 사람은 생물학적인 엄마가 아니라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감정적인 차원의 엄마였나 봐요.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이상의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아이를 버린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엄마 말이에요. 엄마는 곧 죽겠죠. 나 외에는 자식을 더 낳지 않았고 부모와 남편도 없으니, 아마도 혼자서. 나는 이제 아무도 용서할 수 없어요, 영원히.”
  긴 이야기를 끝낸 스티브는 잔에 남은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고 빈 잔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You’re lucky.” (29~33쪽.)

 

  유창하게 설명하는 복희를, (...) 나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한 점 집어 입에 넣자 빗소리와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문주야,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차례로 내 감각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조용하게 물결쳤다.
  “맛있어요.”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듯 나는 말했다. 복희는 물끄러미 날 보는 듯 하더니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소주 한 병을 가져왔다. 잔에 따른 소주를 세 모금쯤 마셨을 때, 벨기에는 어떠냐고 복희가 불쑥 물었다.
  “살 만한가? 다르게 생겨도, 그러니까 피가 막 섞인 살마도 차별 안 하고, 그래? 하긴, 유럽 같은 데선 별나게 생긴 사람도 별난 취급 안 받고 인종도 막 섞여 살고 그렇잖아, 맞지?”
  “네, 맞아요.”
  일부는 거짓말이었다. 이방인에게 차별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고, 그건 예외가 없었다. 그새 복희는 소주를 한 모금 더 마셨고 풀죽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살아서 한 번은 가게 될 줄 알았어. 근데 7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한 번을 못 가 보네, 결국 그 한 번을......”
  “그 사진 속 아이, 혹시......”
  버렸어요, 다르게 생겨셔? 라는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복희는 내가 삼킨 말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끝까지 말해 보라고 채근하지도 않았다. (...) 그녀는 그저 소주가 반쯤 차 있는 투명한 잔을 지그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잔에 투영된 형광등 빛이 그녀의 얼굴에 되비쳐져 순간순간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로 돌아간 듯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녀의 단 하나의 얼굴이다.
*
  접시를 다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자 복희가 기다렸다는듯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 스티로폼 상자에 담아 내 가방 안에 넣어 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복희는 쌀과 호밀 식빵이 들어있는 마트 비닐봉지를 번쩍 집어 들었고, 앞장서서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내 짐을 나눠 든 복희를 말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복희가 알았기 때문이다. 복희만은, 오직 그녀만이, 우주의 존재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기 가졌을 땐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
  식당을 나서며 복희는 타이르듯 말했고, 나는 순간적으로 격하게 흔들리는 내 감정의 결을 해석할 수 없었다. 네가 받게 된 가장 처음의 배려, 그리고 내가 간절히 기다려 온, 너를 향한 타인의 환대...... 남은 비닐봉지를 들고 뒤늦게 복희를 따라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그녀의 말이 내게 그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이유를 천천히 깨달았다. (94~96쪽.)

 

  (...) 그 순간, 우주에게 곧 간뇌가 생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내 감정을 우주도 느끼게 된다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우주의 몸 안으로 아무런 감정도 흘러들게 하지 않겠다는 듯 발끝까지 힘을 주었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고 손등의 뼈는 동그랗게 부각됐다. 그렇게 꽉 죄어진 상태로 자리에서 그만 일어나려는데, 돌연 배에서 꿀렁이는 소리가 나더니 지극히 물리적인 움직임이 배 안쪽을 쓰윽 지나가싸. 예상하지 못한 잽에 놀란 복서처럼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움직임은 짧아졌다가 길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우며 활처럼 몸을 안으로 만 채 두 팔로 배를 감쌌다. 몸 구석구석을 죄던 나사가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다는 너의 신호, 세계를 향한 노크, 내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네는 작은 몸의 언어.
  첫 태동이었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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