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1Q84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0.) 본문
역사는 스포츠와 함께 아오마메가 즐기는 것 중 하나였다. 소설은 별로 읽지 않지만 역사와 관련된 책이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역사에서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실이 기본적으로 특정한 연도와 장소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연도를 외우는 건 그녀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숫자를 달달 외우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의 전후좌우 관계를 잘 파악하면 연도는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중고등학교 때 아오마메는 역사시험만은 항상 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역사의 연도를 외우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오마메는 의아했다. 어떻게 그런 간단한 것을 못할까. (1권, 10~11쪽.)
“그렇게 쉽게는 들키지 않아. 나는 마음만 먹으면 아주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 그리고 설령 들켰다고 해봤자 회사 따위는 기꺼이 그만두지. 어차피 윗사람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내내 찬밥 신세였어. 일자리쯤이야 금세 또 구할 수 있어. 내가 말이지, 무슨 돈을 바라고 이런 일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문단을 조롱해주자는 거야. 어둠침침한 동굴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서로 칭찬하고 상처를 핥아주고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소리를 주절거리는 한심한 자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 시스템의 뒤통수를 치고 들어가 철저히 조롱해줄 거라고. 유쾌할 거 같지 않아?” (1권, 56~57쪽.)
고쿠분지 역에서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이 우르르 차에 올라탔다. 모두 합해 열 명가량, 남녀 반반, 나이는 육십대 후반에서 칠십대 초반 사이로 보였다. 제각기 배낭을 등에 메고 모자를 쓰고 소풍 가는 초등학생처럼 떠들썩하니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물통을 허리에 차거나 배낭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나도 저렇게 즐거워질 수 있을까, 덴고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 그건 어려울 것이다. 덴고는 노인들이 어딘가 산꼭대기에서 의기양양하게 물통의 물을 마시는 광경을 상상했다. (1권, 218쪽.)
어쨌거나 다마루는 틀림없이 그 고무나무를 귀하게 돌봐줄 것이다. 나보다는 훨씬 더 꼼꼼하게 책임지고 돌봐줄 것이다. 그는 생명 있는 것을 돌보고 아껴주는 데 익숙하다. 나하곤 다르다. 그는 개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낀다. 틈만 나면 정원을 돌며 노부인의 저택 나무들도 세심하게 점검한다. 고아원에 있을 때는 매사 서투른 손아래 소년을 자신의 몸을 던져 보호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해,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나 아닌 다른 생명을 맡아서 돌볼 만한 여유는 내게 없어. 나 하나의 생명의 무게를 견디고 나 하나의 고독을 견뎌내는 데도 이토록 허덕이는데 (2권, 516~517쪽.)
그래도 결국 그녀의 존재는 조금씩 먼 것이 되어갔다. 그녀와 함께 보낸 오후는 이미 그 의미가 끝나버린 과거의 일로 떠오를 뿐이다. 덴고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느새 중력은 변하고 포인트는 이동을 마쳤다. 어떤 일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더이상 없다. (3권, 69쪽.)
대개 열시에는 침대에 들어 책 몇 페이지를 읽고, 그리고 잔다. 아오마메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잠드는 데 애를 먹었던 일은 없었다. 활자를 눈으로 좇는 사이에 저절로 졸음이 찾아온다. 머리맡의 불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는다.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눈을 뜨는 건 다음 날 아침이다.
그녀는 원래부터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설령 꿈을 꾸었다 해도 눈을 떴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꿈의 자잘한 조각 같은 것이 몇 개, 의식의 벽에 걸려 있을 때는 있었다. 하지만 꿈의 스토리라인은 잡히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맥락이 닿지 않는 짧은 파편뿐이다. 그녀는 매우 깊이 잠을 자고, 꾸는 꿈도 깊은 곳에 있는 꿈있다. 그런 꿈은 심해에 사는 물고기 같아서 수면 가까이로는 떠오르지 못하는 것이리라. 만일 떠오른다 해도 수압의 차이 때문에 원래의 형태를 잃고 만다. (3권, 181쪽.)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아직 판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구조를 가진 세계이건 나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이 세계에는 아마도 이 세계 나름의 위협이 있고, 위험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 나름의 수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더듬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해만 그래도 좋다. 괜찮다.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달을 가진 이 세계에 발을 딛고 머무는 것이다. 덴고와 나와 이 작은 것, 셋이서. (3권, 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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