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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힘을 믿는다 (정찬, 교양인,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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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힘을 믿는다 (정찬, 교양인, 2020.)

Dog君 2021. 5. 20. 07:51

 

  슬픔은 피동적 감정이 아닙니다. 고통과 절망을 껴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능동적 감정입니다. 제가 비교적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찾자면 ‘슬픔’이라는 감정의 씨앗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 (「책을 펴내며」, 5~6쪽.)

 

  나는 인간이 가진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슬퍼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슬픔 속에는 원한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분노와 원한은 다르다. 폭력에는 분노해야 한다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다.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슬픔인 것이다. (…) (「슬픔의 강변에 서서」, 102쪽.)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칼로 변하는 권력의 언어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은 반공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권력의 언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왔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바탕은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절대적 진리’였고, 북한은 악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여기에 어긋나는 정보와 지식은 차단되거나 왜곡되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허용된 정보와 지식만을 전달함으로써 진실을 불구화했다. (「사드와 전짓불의 공포」, 122쪽.)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느끼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권력의 실존만 확인된다. 5월 광주는 그렇지 않았다. 개인의 실존이 권력의 실존을 견뎌냄으로써 권력이 삼키려 한 ‘진실’을 지켜낸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강물처럼 쉼 없이 이어진 것은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5월 광주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이다. (「5월 광주의 빛」, 152쪽.)

 

  ‘5월 광주’ 이전까지 나는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권력의 실존이 개인의 실존을 끊임없이 삼킴으로써 생명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꿈과 역사를 격절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5월 광주’는 그런 나의 생각을 깨뜨렸다. 개인의 실존이 권력의 실존을 삼키는 모습을 ‘5월 광주’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은 희생이었다. 광주 시민의 죽음이 나에게 ‘순결한 실존’으로 다가온 이유는 그것이 희생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역사와 맞설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인 무기가 ‘순결한 실존’임을 나는 ‘5월 광주’에서 확인했다. (「김재규와 김상진의 죽음」,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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