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그들의 5·18 (노영기, 푸른역사, 2020.) 본문
해마다 5월만 다가오면 5·18과 관련된 온갖 거짓뉴스가 넘쳐난다. 북한군 개입설부터 시작해서 시민군을 '폭도'로 매도하는 주장까지... 최근에는 극우 유튜버들까지 가세해서 온갖 험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여당에서는 이른바 '역사왜곡방지법'을 발의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이 법안에 매우 비판적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헛소리들을 반박하거나 5·18의 전체적인 과정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정리하려고 하면 또 마땅한 역사책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 5·18을 다룬 어떤 책을 읽기는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책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웠다. 지나치게 감정이 과잉되었다는 느낌만 들 뿐 5·18에 대한 엄정하고 객관적인 접근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영기의 『그들의 5·18』은 무척 만족스럽다. 이 책은 5·18을 다룬 거개의 책과 미디어가 흔히 빠지곤 했던 감정과잉과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종일관 덤덤한 자세로 5·18의 전말을 그려낸다. 5·18의 전말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이 정말 안성맞춤이다.
'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라는 부제에도 드러나는 것처럼 『그들의 5·18』은 전두환을 위시한 군부 세력의 동향을 중심으로 5·18에 접근한다. 이 책에 따르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예컨대 공수부대의 투입과 시민에 대한 조준사격 등은 단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우발적인 일어난 일들이 아니었다. 12·12로부터 시작된 쿠데타의 과정에서 군부 세력(이라고 쓰고 '반란군'이라고 읽읍시다.)은 일찍부터 시위 진압에 군부대를 투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즉, 시위가 격화됨에 따라 부득이하게 군부대를 투입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시위하는 시민들을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자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을 '적군'으로 간주했다.
설사 당시의 시위가 격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공수부대 투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시의 시위는 경찰만으로도 충분히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5월 18일 오전 금남로 학생시위를 경찰력만으로 해산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광주 시내의 실제 상황과는 상관 없이 공수부대는 계속 투입되었고, 급기야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계엄군들은 정작 국가 보안시설에는 전체의 10%도 채 배치되지 않았다.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시위 진압에 나섰다는 군부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5·18은 12·12로부터 시작된 반란군의 권력 탈취 과정 마지막 단계이자, 그에 대한 시민들의 최후의 저항이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이 되는 주권자로서(헌법 제1조 2항) 불법적인 권력 탈취에 저항권을 행사하여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상황을 두고 "폭도"를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전체적인 얼개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디테일에서도 이 책은 밑줄 그을 부분이 많다. 극우 논객과 극우 유튜버들이 즐겨 주장하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둥, 계엄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남도청에 TNT를 설치했다는 둥, 시민군이 광주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둥, 하는 세세한 가짜뉴스에 대한 반박이 책 곳곳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5·18과 민주주의를 폄훼하는 가짜뉴스 대잔치에 질리신 분에게 이보다 더 탄탄하고 접근성 좋은 치료제는 없을거다.
『그들의 5·18』은 이처럼 단단한 책이지만 정작 저자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5·18의 여러 의문, 예컨대 최초 발포 명령자가 대체 누구인가 같은 핵심적인 의문들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이 군부 세력의 고의적인 조작과 은폐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또한 5·18의 여러 주체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도 더 진행되어야 하고, 5·18이 시민군과 계엄군 개개인에게 남긴 트라우마에 관해서도 좀 더 많은 고찰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아직도 5·18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과 밝혀야 할 사실이 많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5·18에 대해 우리 같은 주권자들이 더 많은 교양과 관심을 가져야 할 거다.. 그것은 5·18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들의 5·18』은 아마도 앞으로 한동안 5·18을 논할 때 절대 빼먹어서는 안 될 책이 되리라 확신한다.
5·18의 쟁점들 중에서 4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5·18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나 참여자는 많으나 가해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1980년 5월, 누가 군인들에게 총과 칼, 곤봉 등을 쥐어 주고 폭행과 발포를 사주했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쟁점 중 하나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무렵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이다. 군대라는 특성에 비춰볼 때, 상부 명령 없이 돌발적으로 집단발포가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발포 명령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황 변화에 따라 계엄군이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자료조차 발굴되지 않고 있다. 발포와 관련한 의문이 여태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5·18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다. (32~33쪽.)
1980년 5월 21일은 광주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긴 하루였다. (...) (38쪽.)
1993년 특전사령부는 정규훈련 항목 중에서 폭동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폐지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공수부대는 충정훈련을 정규 임무 중 하나로 훈련하고 중앙기동예비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후방의 시위 진압에 투입될 때마다 그 효용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47쪽.)
1979년 10월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자행한 폭력적인 시위 진압은 다음 해 광주에서 발생한 무자비한 폭력의 예고편이었다. (...)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민간의 시위 진압에 자주 동원했다. 이 같은 선례를 보며 성장한 신군부가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이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군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은 오랫동안 길들여진 관행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72쪽.)
신군부는 1980년 초반부터 시위 진압에 군대를 투입시키려는 계획을 하나하나 준비해갔다. 3월 4일부터 6일까지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충정훈련을 시연한 뒤 3월 6일 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 회의 결과 다중의 집단이 사회 법질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폭도가 될 경우, 군과 경찰이 공세적으로 진압하여 시위대를 와해시키고 재집결을 분쇄하며 주모자를 체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신군부는 학생들이 교내를 벗어나 가두시위로 반정부투쟁을 전개함에 따라 경찰력만으로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차 충정회의에서처럼 신군부는 대학생들이 본격 가두시위에 나서기 전부터 학생 시위에 강력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시키려는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
국회는 1979년 11월에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구성했다. 여야 동수의 총 28인으로 구성된 개헌특위는 공청회와 토론을 거쳐 개정된 헌법 전문을 국회에 제출했다. 임시국회 개회와 동시에 1979년 10월 27일부터 계속된 '비상계엄령'의 해제가 안건으로 상정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법적·제도적으로 유신독재의 청산이 가능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신군부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했다. 결국 신군부는 이후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봉쇄하고 헌정질서를 중지시켰다. (82~85쪽.)
그러나 북한의 남침 위협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학생들이 교내를 벗어나 가두시위에 본격적으로 나선 때는 5월 13일 이후부터이다. 아직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시작되기 전부터 군은 이동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충정부대로서 후방에 배치될 군 병력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98쪽.)
정부와 신군부의 주장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 보안시설의 경계를 강화하고 계엄군 병력도 그곳에 집중 배치되어야 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런데 이날 전국 국가 보안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의 비율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
(...) 계엄군 병력의 90퍼센트 이상이 휴교령이 내려진 대학에 배치된 것은 이 무렵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그중에서도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이끌던 대학생들의 시위에 군대를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억누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 (126~127쪽.)
5월 17일의 명령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 아직 국무회의에서 군 투입과 관련된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군은 마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즉 군의 동원이 결정된 것처럼 충정작전 시행에 대비하고 있었다. (139쪽.)
5월 18일 오전 금남로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에 경찰 6개 중대 800여명을 투입하고 해산시킨 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날의 학생 시위 진압은 경찰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 경찰의 물리력만으로도 학생 시위에 대처할 수 있었으나 공수부대를 추가로 투입했고, 이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11공수여단의 광주 파견 결정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7공수여단이 광주 시내에 투입되기도 전에 11공수여단의 광주 파병이 결정됐다. 광주 시내의 실제 상황과는 상관없는 결정들이 내려져 실행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책임이 있는 전교사의 요구가 없었음에도 내려진 명령이었다. (...) (157쪽.)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본격 대립하는 가운데, 5월 19일 오후 5·18항쟁 기간 중 처음으로 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이날 오후 4시 50분경 광주시 동구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의 동원빌딩 부근에서 시위 진압에 투입된 계엄군의 장갑차가 인도와 도로 사이에 걸려 멈춰 섰다. 인근의 시민들이 장갑차로 달려들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11공수여단 한 장교가 해치를 열고 M16소총을 발사했다. (194쪽.)
(...) 5월 20일 밤 시민들이 몰던 버스에 치여 4명의 경찰관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모두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들이었다. 희생 경찰관들은 전남대병원 한쪽 구석에 방치되었다가 5월 27일 이후에서야 장례를 치렀다. 유족들이 "치안본부에 진정을 하였으나 '경찰관 신분으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순직 처리가 안 된다'는 황당한 사유로 반려됐다"고 한다. 부상자들에 대한 정확한 수치도 파악되지 않아 "보상이나 지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공권력 남용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과 분노가 낳은 애꿎은 희생자들이었다. (204쪽.)
군에서는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교도소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조작했다. (...) 특히 류영선은 시위 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사망한 '폭도의 전형'으로 기술됐다. 그러나 이 문건은 5·18항쟁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해 조작한 자료이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고, 류영선이 항쟁 기간에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류영선은 예비검속된 조가 류소영(조선대 약대 재학)을 찾으려다 공수부대의 만행ㅇ르 보고 항쟁에 합류했다. 이후 류영선은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 최후 항쟁 때 YWCA 부근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 류영선이 사망한 후 가족들은 차례로 전남합수단에 끌려가 '류영선이 형 류락진을 구하기 위해 시민군을 선동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혐의로 심문받았다. (315~316쪽.)
상무충정작전은 실시하기에 앞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전남도청 회의실 지하에 있던 다량의 폭발물이었다. 이 폭발물은 군에서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폭발물을 제거한 뒤 작전이 실행되어야 했다.
폭발물 해체작업은 폭발물을 관리하고 있던 한 시민군의 제안으로 실시됐다. 당시 호남신학대 학생이자 전도사이던 문용동이었다. 전남도청 지하실에서 보관 중이던 TNT를 비롯한 폭발물을 관리하는 시민군의 '폭약반'으로 활동했던 그는 수거한 총기류를 들고 직접 전교사를 방문하여 폭발물 해체를 군에 먼저 제안했다. 상무충정작전을 앞둔 5월 24일 전교사는 폭발물 전문가인 군무원을 전남도청 지하실로 파견했다. 문용동을 비롯한 몇몇 시민군의 협조를 받은 전교사 군무원은 폭발물의 뇌관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군무원은 5월 27일 3공수여단 특공조를 전남도청까지 길 안내를 했다.
전교사로부터 신변안전을 보장받았던 문용동은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이 전개될 때 전남도청을 지키다 3공수여단 특공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군은 그의 죽음을 폭도들이 벌인 살인의 한 가지 사레로 사실을 왜곡시켜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폭약반으로 활동하던 시민군들은 그가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398쪽.)
40년이 지났음에도 5·18은 아직 풀리지 못한 의문들이 남아 있다. 이는 무엇보다 자료의 조작과 은폐에서 기인한다. 40년 전 5월 18일 이후 군에서는 수많은 명령들이 오간 명령서와 그 행위를 증명하는 자료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중 있어야 할 자료 중 상당수가 사라지고 조작됐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5·18 이후 정부와 군은 진상규명에 대응하는 논리를 만들거나 자료를 없앤 것으로 추정된다. (430쪽.)
교정.
168쪽 9줄 : 사망한 사람의 -> 사망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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