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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초인간 : 극장 밖의 히치 코크 (김중혁, 자이언트북스,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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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초인간 : 극장 밖의 히치 코크 (김중혁, 자이언트북스, 2020.)

Dog君 2021. 5. 20. 20:44

 

  (…) 우리 모두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관통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일종의 살얼음판이기도 했다. 한 번만 잘못하면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작은 실수로 기회를 송두리째 날리게 되는 아슬아슬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책에서 읽은 대로라면, 젊음이란 대체로 그런 시간의 연속인 모양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관계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좋아했고,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을 좋아했고, 계획을 증오했다. 전망을 싫어했고, 보상이라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 월급보다는 주급을 좋아했고, 저축보다는 소비를 좋아했다. 소비할 돈은 많지 않았고, 저축할 돈은 아예 없었지만, 돈이 생기는 대로 다 함께 소비했다. (49~50쪽.)

 

  재이는 10초 동안 수많은 시간을 경험했다. 도시에 처음으로 자율 주행차가 나타났던 때로 돌아갔다가 상암동에 처음으로 도로가 생기고 설계가 이뤄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과거에서 더 먼 과거로, 다시 더 오래된 과거로 계속 움직였다. 그때 이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건물이 보이지 않고 도로의 윤곽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때다. 재이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허허벌판의 풍경이 아주 오래된 과거인지, 아니면 자신이 곧 만나게 될 미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도시가 재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간이 하나의 인격이 되어 재이 앞에 나타났다. 카오스인지 코스모스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 안에 어떤 흔적이 있었다. 재이는 과거에서부터 시간의 계단을 건너뛰어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재이는 들고 있던 두 팔을 내린 다음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에 질서가 생겼고, 마쳐 날뛰던 좀비 자동차들이 하나씩 참착해졌다. 재이는 도시와 대화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도시의 허공을 존중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오래 날아서 피곤해진 새들처럼 평화가 천천히 천천히 도시 위에 내려앉았다. (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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