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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없는 개발 (허수열, 은행나무, 2005.)

Dog君 2021. 5. 20. 22:56

 

  역사 연구가 여론의 쟁점으로 떠오르는 일이 1년에 몇 번이나 있을까. 아마 별로 없을걸.

 

  하지만 잊을만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분,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는 그 순간만큼은 역사학이 당당히 자기 존재감을 뽐내는 순간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렇게 영향력이 큰 것은 아마도 식민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곧 지금의 정치적 성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 거다. 또한 식민지가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개인적으로는 '근대화론이냐 수탈론이냐'는 식으로 나뉜 이분법적 구도를 무척 싫어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양비론을 펼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현실에서 가지는 정치적 효과가 동일하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근대화/수탈' 논쟁에 대한 내 생각은, '일단 근대화론은 제껴놓은 다음에 이야기를 좀 더 고급지게 끌고 가보자...'는 쪽에 가깝다. (물론 심정적으로도 근대화론에 정이 안 가기도 하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근대화론에 대한 지금의 비판들도 썩 효과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이나 SNS에서 오가는 근대화론 비판이란 대체로 근대화론을 도덕적이고 당위적으로 비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식민지를 긍정할 수 있냐!'라거나 '친일파니까 근대화론이나 주장하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따위의 주장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논리적으로도 허술하다. 그렇게 안이하고 허술한 비난에 안주하니까 윤서인이니 뭐니 하는 이들이 대단한 통찰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는 척을 하는 거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진지한 비판은 여러 방향에서 가능하겠으나 각종 통계와 수치에 근거한 경제학적 비판으로는 이 책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한다. 저자의 전체 주장은 꽤 간단하다. 식민지시기의 경제성장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조선 전체를 하나의 균일한 범주로 보아서는 안 되고 그 내부에 있는 민족 간 차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거다. 이러한 전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서 저자는 농업, 공업,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통계와 수치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시기의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실은 민족 간 불평등 혹은 수탈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10년대의 통계를 문자 그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논거 중 하나다. 1910년대의 통계는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과소하게 잡힌 통계라는 거다. 이렇게 되면 191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 역시 실제보다 훨씬 과대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 책 이후에 따로 책을 한 권 더 쓴 것으로 안다.)

 

  복잡한 도표와 수식 때문에 수포자인 나에게는 다소 까다롭게 느껴지긴 했지만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은게 2007년이더라. 13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어렵더라...) 일단 책의 전체적인 주장만이라도 제대로 읽어내겠다는 마음으로 통독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제학과 경제사 쪽으로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야 저보다 훨씬 더 즐겁게 읽으실 수 있겠지.

 

  지금까지 나온 여러 국민경제 계산에 의하면 일제시대 조선의 실질국내총생산(혹은 국내총지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4% 전후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제시대는 두 번의 세계대전 및 그 사이 기간과 겹치고 있다. 당시의 세계경제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으로 성장이 둔화되었던 시기였는데, 이 때 이 정도의 성장률이라면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성장률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는데, 그 결말은 1945년의 급락에 의해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일제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렇다면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개발과 성장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 (19쪽.)

 

  1930년대에 조선의 공업구조가 급속도로 중화학공업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조선의 자원, 특히 전력(電力) 자원에 대한 재인식과 관련이 있다. (...) 1911년부터 실시된 제1차 수력발전 자원 조사결과에 의하면 조선의 수력자원은 57,000kW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2년부터 시작된 제2차 조사결과 조선의 수력발전 자원은 2,203,000kW로 크게 증가된다. 더구나 1개소 당 평균 출력은 14,684kW로 일본의 2,625kW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전기를 이용하여 공중 질소를 고정하고,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와 산소를 얻고, 질소와 수소를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얻어 유안을 생산하는 암모니아합성법(전해법)에서는 전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공업 원료이기도 했다.
  (...) 일질이 새로 도입한 암모니아 합성법에 의한 유안생산에서는 전력비가 전체 생산비의 3할 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저렴한 전력비는 곧 저렴한 유안 생산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51~152쪽.)

 

  (...)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농업노동이나 공장, 광산 노동 등의 노동수입을 통해 생활해가는 존재로 전락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수준은 일제시대 내내 생존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다.
  (...) 민족별 경제적 격차의 확대는 민족차별을 더욱 조장함으로써 차별은 일상화되었다. (...)
  (...) 개발의 결과로 돌아온 것은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서의 비참한 삶이었고, 민족별로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상향 이동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구조적 덫에 걸리는 것이었다.
  (...)
  일제시대 조선에는 개발이라는 현상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조선인에게는 개발다운 개발은 없었고, 해방과 더불어 그간 이룩했던 개발의 유산마저 현저히 축소되어 버림으로써, 메디슨의 추계에서 보았던 것처럼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일제 초기에 비해 오히려 더 낮아져버리는 그런 상태가 바로 '개발 없는 개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38~340쪽.)

 

교정. 1판 2쇄

115쪽 각주 60번 2줄 : 논면적은 단 단위로 -> 논면적은 만 단위로

253쪽 12줄 : 이러 한 ->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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