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베트남전쟁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본문
역사 속의 굵직굵직한 주제 중에, 의외로 개설서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문화혁명을 들 수 있겠다. 문화혁명을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무척 많지만 문화혁명의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설서는 거의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문혁에 대한 평가에만 집중하거나 그 와중에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에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자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정말 난감하다. 사칙연산도 안 배웠는데 함수부터 들이미는 느낌이랄까.
베트남전쟁도 비슷하다.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와 책은 정말 많다. 고엽제 피해를 입은 군인들, 전쟁 중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들, 전쟁 특수로 돈을 벌어 재벌이 된 사업가들 등등. 하지만 의외로 베트남전의 전체적인 양상과 한국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서술한 개설서는 찾기가 어렵다. 네에, 그러니까요, 함수 중요하고 미적분 중요한 거 다 알겠는데, 저 같은 수포자한테는 사칙연산부터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더 필요한 거 아니겠냐고요.
베트남전의 사칙연산을 찾는 사람에게 바로 이 책,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이 딱 좋을 것 같다. 베트남전 이야기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여러 사실 관계들, 예컨대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 국제적인 맥락, 한국과의 관계 등을 주제별로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목차만 보셔도 이 책의 범위를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거다.
이러한 구성이 가능했던 것은, 이 책이 한겨레신문에 1년 반동안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각 장chapter에 적당하게 분량이 할애되어 있고 주제도 말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신문에 연재된 글이라 가독성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이 책은 약점이 적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든다.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묶어서 낼 경우에는 후반으로 갈수록 글의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의 국제적인 맥락부터 전쟁의 경과, 그에 대한 한미 양국의 대응, 양국 사회에 미친 영향, 이후의 국제정치에 미친 여파 등을 차근차근 다룬다. 마치 성능 좋은 카메라로 천천히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는 듯.
베트남전을 샅샅이 개괄하는 이 책의 구성은 사실 저자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는 베트남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선택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베트남전 '특수' 내지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식의 미화된 기억만 남아있다는 거다. 틈만 나면 '월남 패망'을 거론하는 보수주의 논자들의 언설이나 (정확히 말해서 '베트남'은 패망한 적이 없습니다...) 경제적 가치를 따지며 해외 파병을 주장하는 목소리 등이, 베트남전에 대한 선택적 기억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에 대해 선택적으로 배제된 기억이란 무엇일까. 고엽제 피해를 입은 파병 군인과 가족의 아픔, (한국군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트라우마, 고립을 자초했던 대미의존적 외교자세 등이겠지. 자꾸 이런 식으로 기억을 선택적으로 배제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줄어들 거다. 아니, 당장 현실적으로,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논할 때 우리의 주장도 그만큼 설득력이 줄어들겠지.
너무 뻔한 결론으로 가는 것 같으니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각설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베트남전에 대한 개설서라는 면에서도 무척이나 흡족한 책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베트남전을 이보다 더 잘 개괄한 책은 아직 못 본 것 같다. 베트남전의 사칙연산을 찾는 독자께 이 책을 적극 권한다.
(...) 한국 정부는 왜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을까? 앞서 살펴본 박정희 대통령의 말처럼 주한미군의 이동과 감축을 막겠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또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으며, 또한 미국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의 측면도 존재했다.
좀더 중요한 문제는 수면 아래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이 정전협정 직후부터 추진했던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동시 감군 정책이다. (...) 막대한 한국군 유지비를 지원했던 미국은 재정 부담을 줄이려 한국에 있는 한·미 양군의 감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발했고 그 대응으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을 추진했다. 한국군이 해외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한다면, 한국군을 감축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
물론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군의 유지비가 적게 든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군축이 오히려 광범위한 실업자군을 양산해 한국 경제에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 내에서도 군축이 박정희 정부에 정치적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
미국 관료 일부가 염려한 것처럼 박정희 정부에게 감군은 큰 부담이 됐다. 군축은 가뜩이나 좁은 군대 내의 승진 기회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또다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 (25~27쪽.)
미국 정부가 한국 쪽에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은 근본적으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이었고, 한국군의 유지비가 싸면서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40쪽.)
베트남전쟁 시기에 징병 연령에 해당되는 젊은이들의 수는 총 2,7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어쩌면 1960년대의 20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징병의 대상이 되는 2,700만 명 중에 약 10퍼센트인 250만 명이 베트남에 갔다. (...)
(...) 베트남에 간 250만 명 중 약 80퍼센트는 노동자 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노동 계층의 아이들은 군대에 가고 부잣집 아이들은 대학에 갔다. (...) 1961년부터 1972년 사이 매년 산업재해로 1만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죽었다. 베트남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생겼던 1968년, 거의 같은 수의 미군이 죽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군인이나 노동자나 모두 '가장 더러운the most dirty' 직종이었다. (126~127쪽.)
(...)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곳간이 비었다는 것이었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4.7퍼센트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높았다. (...) 이는 기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너무나 많은 전비를 사용했고, 그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돈을 너무 많이 찍어냈기 때문이었다. (...) 닉슨으로서는 정부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통화 팽창을 막고 인플레이션을 잡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불가피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
이러한 닉슨의 결정은 한국 경제에 결정타가 됐다. 미국은 한국의 가장 큰 수출대상국이었다. 그런데 닉슨 행정부에 와서 수입부가세가 신설됐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 예외조항을 주었던 면직물 수출에 대해서도 쿼터 시스템을 도입했다. (...)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 수출에 집중했던 한국으로서는 이제 새로운 분야의 수출 품목을 찾아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 (182~187쪽.)
(...)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지역에 파병을 하기 위해서는 전 국민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
원호와 위문이 동원을 설득하기 위한 기제였다면, 정부에게는 동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 통제를 위한 메커니즘도 필요했다. 우선 한국 정부에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징병제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 국방부는 아직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던 스물한 살 이상 서른 살 이하의 제1국민역 청년들에 대한 대대적인 징병 작업에 들어갔다.
(...)
1968년 예비군의 창설 역시 군을 통한 사회 통제의 중요한 방식이었다. 1968년의 안보 위기가 예비군 창설의 중요한 이유였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예비군제도가 쟁점화된 것도 사회 통제의 역할 때문이었다. (...)
징병제도의 강화가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특정 세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주민등록법은 전 국민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 (213~217쪽.)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10대 재벌 순위가 바뀌었다. (...) 1950년대 원조를 이용한 삼백산업으로 급부상한 방직공업과 유통산업이 (...)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이 중 10대 재벌 안에 살아남은 것은 삼성과 럭키뿐이었다. 1975년 10대 재벌에는 현대, 한진, 표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구 충남토건), 신동아 등이 새롭게 등장했으며, 이들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 (...)
(...)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해체된 대우와 쌍용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의 10대 재벌 순위는 지금도 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23~224쪽.)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국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이 한국 정부한테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
한국이 무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중공업이 육성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 정부는 무기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육성 계획을 마련하고 있엇으며, 1970년 이미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가 설치됐다. 물론 전투부대 파병을 대가로 존슨 대통령이 선물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였고, 1957년 '외부로부터 성능이 더 좋은 무기를 도입할 수 없다'는 내용의 정전협정 13조 d항을 유엔 군사령관이 무력화한 것 역시 군수산업 도입의 장애물을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었다. (...) (227~228쪽.)
교정. 초판 2쇄
223쪽 8줄 : 마지막 주둔하고 -> 마지막으로 주둔하고
238쪽 14줄 : 뒤끔치 -> 뒤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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