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이현진, 혜안, 2009.) 한번더 본문

잡冊나부랭이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이현진, 혜안, 2009.) 한번더

Dog君 2021. 5. 20. 23:01

 

  라면 먹을 때는 김치가, 피자 먹을 땐 콜라나 사이다가 있어야 된다. 그러지 않고 라면 옆에 간장을 내놓거나 피자에 김치를 곁들였다가는 음식의 도를 모르는 놈이라고 얼마나 타박을 들을까;; (아, 물론 그런 취향을 가진 분도 분명히 어딘가에 있긴 할테니 그 분은 제외...)

 

  역사학에도 그런 조합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분야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일독해야 한다거나, 그 책을 인용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그런 책이 꼭 하나씩 있거든. 『사기』나 『삼국사기』처럼 이미 그 자체로 사료(史料)가 된 책도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 한창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쓴 연구서 중에도 그런 책이 있다.

 

  최근에 (다시) 읽은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1948~1960』이 정확히 그렇다. 이 책은 1950년대의 한국경제를 공부할 때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1950년대 한국의 경제를 다룬 책은 있었지만 2000년대까지의 연구성과를 총망라하는 한편 지금까지 공개된 국내외 자료를 폭넓게 활용했다는 점에서 볼 때 현재 시점 기준으로는 이 책이 결정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실 1950년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다른 시기에 비해서 다소 피상적이지 않나 싶다. 해방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머리 속에서 하나씩 꼽아봐도 글쎄, 마땅히 임팩트 있는 것이 없다. 교과서에서도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승만의 부정선거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곧바로 4.19로 넘어갔던 것 같고. 학계의 연구경향도 그와 비슷해서 1950년대 연구는 다른 시기에 비해 조금 늦은 느낌이 있다.

 

  연구가 늦게 시작된 것 치고 그 결과는 하나같이 흥미롭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가 어째서 그렇게 연구에서 '홀대'받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예컨대 196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 드라이브의 초기조건을 1950년대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들 수 있겠다. 쿠데타로 일거에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이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가능했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거다.

 

  이 책은 그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책의 특징이자 미덕은 미국 대외정책의 틀 속에서 1950년대 한국 경제를 살펴보았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이 미국의 대외정책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한국현대사 역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미국 대외정책의 틀에서 본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정부수립을 즈음한 시기 미국 대한경제원조정책의 목표는 그저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정권 붕괴를 막고 일본의 상품시장 정도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따라서 원조의 성격 역시 한국의 자립 내지는 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의 군사적 가치가 올라가고 군사원조의 성격이 더 강화되기는 했지만 성장보다는 안정을 중시한다는 기본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정을 비롯한 한국경제 전반은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한국사회 전반이 미국의 정책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장기적인 경제개발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화한다. 국내적으로는 1956년 대선 이후 이승만 정권의 위기가 점차 심화되었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원조가 점차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개발계획안이 본격적으로 모색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를 선거를 위한 선전용으로만 사용했을 뿐이다. 일단 선거부터 이긴 다음에 실현하려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선거 때문에 정권 자체가 끝장나버렸으니 그걸로 다 쫑난 거지, 뭐. 뒤이은 민주당 정권도 단명했고.

 

  짧게 정리하기는 했습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 대한원조기구의 변화와 구성, 원조의 집행과정과 결과 등 1950년대 한국경제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내용이 가득하다. 워낙에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보니 나는 이 책을 세번째로 읽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아니, 그냥 내가 무식한 탓인가...)

 

  (...) 원조를 둘러싼 논의에서 경제·군사원조는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예방 수단으로 여겨졌다. 정용욱의 연구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따른 대비책들을 준비하면서 미국이 제시한 경제원조계획의 핵심은 정권의 안정과 새로운 정책 수립의 융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의 확보였던 것이고, 진정한 경제적 자립과 안정추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66쪽.)

 

  (...) 원조 물자에 대한 이러한 원화적립 계정을 '대충자금계정(Counterpart Fund)'이라고 지칭하는데 당시 한미 양국은 위 규정에 따라 물자가 수입되면 원조물자 취급시 잠정적 환산율인 450원:1달러를 적용하여 이 매상금을 환산한 한국 통화를 조선은행 특별계정에 예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충자금계정은 한국 정부와 협의함을 전제한다는 단서가 있지만, 원조당국의 동의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성격의 규정이었다. 이렇게 자금계정에 대한 운영 권한은 전적으로 원조당국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조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원조당국인 미국이 가진 한국에 대한 발언권은 당순히 경제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인 측면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74~75쪽.)

 

  결국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을 부흥계획으로서 평가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이 계획에서 제시되고 있는 한국의 자립 수준과 관련하여 파악해야 할 것이다.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에 대한 토론에서 번스의 특별보좌관 키니(Robert A. Kinn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계획은 농업경제로부터 공업경제로의 강인한 전환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기존 설비와 국내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는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따라서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석탄광 개발, 전력 개발 문제는 경제부흥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철로 건설 및 수송과 관련된 것이었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한 제한적인 범위에서의 개발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계획을 주도했던 경제협조처장 호프만이 당시 한국의 자립경제 달성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단계에서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줄곧 대한원조와 관련하여 '부흥'과 '자립'을 목표로 내걸었던 이유는 오히려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기정사실화된 이후 미국은 한국이 미국의 경제원조를 통해 생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아의 비공산 국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미국식 체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이들 나라가 공산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 (89~90쪽.)

 

  (...) 유엔군 대여금을 비롯한 한국의 전비부담은 한국경제를 압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구호품의 다량확보와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을 통한 달러 수입의 확보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을 무엇보다도 강력히 요구한 것은 그것이 수요와 공급 양면에서 한국경제의 안정에 직접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유엔군으로부터 상환 받은 외환을 민간 경제주체에게 판매하여 시중 통화를 회수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민간 경제주체는 구입한 외환을 이용하여 국내에 필요한 물자를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엔군 대여금은 정부의 지속적인 상환요구에도 불구하고 1951년 10월 15일에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총 대여금의 1/5 정도에 해당하는 1천 2백 16만 달러(원화 환산액 630억 원)가 상환되었고, 1952년 5월 24일 경제조정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상환되지 않았다. (118쪽.)

 

  4개월간의 논의 끝에 1953년 12월 14일 조인한 '백·우드 협약'은 한국 경제재건이 국제연합과 미국의 원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 특히 본 협약은 원조물자 판매대금을 통한 대충자금 설치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인출은 합동경제위원회가 승인한 목적과 방법에 의해서만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국가재정 중 대충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결국 한국의 국가재정이 원조의존적 국가재정으로 확립됨을 의미했으며, 미국은 원조를 매개로 한국의 국가재정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합동경제위원회가 비록 형식적으로는 심의기관이지만 합동경제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대충자금 방출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원조의존적인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경제운영 전반에 걸쳐 합동경제위원회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190~191쪽.)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일본에서의 구매를 증가시키기 위해 한국이 일본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는 항목들을 집중분석하였고, 그 대표적인 것들로 비료, 원면과 면사, 산업 장비들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백두진을 비롯한 한국 정부 인사들은 일본산 비료가 유럽산보다 1톤당 3달러 50센트나 비싸다고 지적했고, 기계류에 대해서도 구미 지역으로부터의 선진기술의 도입을 희망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물품을 일본에서 구매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국 정부의 계속적인 저항에 대해 미국은 '원조상품 도입의 지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대응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대일강경책은 일본을 중심에 둔 아시아 정책을 진행하고 그 일환으로 한일관계의 강화를 중시하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구상에 큰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 측의 절박한 물자공급 사정을 이용하여 원조프로그램의 승인을 지연하는 전술로 대응하여 원조상품의 대일 구매에 한국 정부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192쪽.)

 

  (...) 1954년은 원조를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 경제원조운영과 관련하여 한국과 마찰을 빚었던 원조물자의 대일구매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중요함을 지적하면서 원조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한다는 내용을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유엔군에 대한 환화지불을 중지하면서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은 남한에 대한 유류 공급 중지로 이에 맞섰다. 유류 공급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으로서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 협상의 지연으로 전후 재건을 위한 원조가 지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겪은 유류파동으로 산업시설과 차량운행에 차질을 빚는 등 한국은 경제적으로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원조계획이 확정되지 못함으로써 국회에서는 추가예산안의 심의도 미룰 수밖에 없었고, 유류공급의 중단으로 대부분의 공장은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194~196쪽.)

 

  한국 상황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미국의 대한원조정책의 전환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1956년 중반 이후부터 진행되었다. 군사적 논리에 의한 현상유지를 중시하고 장기적 경제개발에는 소극적이었던 종래의 정책과는 달리 장기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경제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 (219쪽.)

 

  (...) 1957년 이후 합동경제위원회 회의 안건을 살펴보면 1950년대 전반과는 달리 기술원조계획과 장기적인 개발계획에 대한 논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합동경제위원회에서 논의된 기술행정부문의 대충자금 방출의 건을 살펴보면 정부재정관리 및 통계개선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원조프로그램에서 계획된 기술원조가 행정인력들의 재정관리 기술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역시 당시의 기술원조가 원조의 삭감에 따르는 조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239쪽.)

 

  1957년 3억 8천 2백 90만 달러였던 미국의 대한 원조는 1958년 3억 2천 1백 20만 달러, 1959년 2억 2천 2백 20만 달러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원조의 감소는 위기의식을 불러 왔으며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자립적인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의 전환 역시 계획의 필요성을 제고하였다. 개발차관기금은 무상원조와 달리 이자를 붙여 원금을 갚아야 하며, 차관 계약시 채권자 측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맞는 계획을 제시해야만 승인받을 수 있었다. 개발차관기금의 차관을 받기 위해서는 단일 사업과 관련된 계획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한국 정부의 관료들은 차관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개발계획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252쪽.)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구조적 개혁보다는 경찰력에 의존해서 부정선거로 대처하는 방안을 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정선거의 후유증, 선거자금문제, 2·4보안법 파동 등으로 여야의원들이 정면충돌하고 정국불안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경제관계 입법 및 경제안정책들에 관한 논의는 계속 국회 회기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경제개발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임박한 선거에 대비해서 근본적인 행정개혁과 경제개혁조치를 취할 만한 여유와 자율성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당시 경제개발계획을 안정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재원의 확보문제가 가장 중요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원조가 감소되고 있고 기본적인 재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조세징수와 차관도입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조는 삭감되고 정부 수입은 제한되어 있는데 국방, 경찰비는 오히려 증가함으로써 그 피해는 결국 산업투자의 위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50년대 후반에 수립된 산업개발위원회의 경제개발3개년계획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계획 자체가 지니는 중요성과 그것이 이후 한국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이 계획안은 무엇보다도 경제의 계획화를 도모한 한국 정부 최초의 종합계획안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이 시기 작성 조사한 각종 자료와 계획 수립에서의 경험은 이후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기여하였다. (265~267쪽.)
Comments